아산, 불멸의 시작
서울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린 시절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며 유년을 보냈다. 사적 아산 이충무공 유허 내에는 잘 알려진 아산 현충사가 있다. 이 현충사 가까이에 장군이 결혼한 21세부터 살았던 고택과 키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늘 높이 솟은 나이 많은 은행나무가 시선을 끈다. 청년 이순신은 이곳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무예를 연마했다.
아득한 과녁 정중앙에 그의 열정이 날아가 꽂히듯 쏜살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활터는 현재 활쏘기 체험장으로 활용된다. 이 평화로운 모습 뒤에는 멸실의 위기를 견뎌낸 역사가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장군의 묘소와 위토(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가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안타까운 소식에 국내외에서 민족 성금이 모금되었고, 고택 부근에 1932년 구 현충사를 중건했다. 그것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들의 눈물겨운저항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전시된 이순신 장검(복제)은 시퍼런 빛을 뿜어낸다. 2m에 달하는 검신에 새겨진 문장에서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들의 색이 변하는구나!”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구나!”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의 행간을 더듬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장군은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의 세월을 낱낱이 기록했다. 장군의 글씨는 강인하나 내용은 무겁다. “밤새 홀로 앉아 있었다”거나 “비가 억수같이 내려 마음이 어지러웠다”는 고백은 영웅 이면의 고독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아파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다 간 실존이었음을 일깨운다.
이어지는 보물 이순신 유물 일괄 중 요대와 복숭아 모양 잔은 명나라 수군 장수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업적을 명나라 장수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수와 통영, 치밀하게 계획된 불멸의 순간
아산을 떠나 전라남도 여수로 향한다. 여수 앞바다는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고 있을까. 카메라 렌즈에 담긴 수평선은 장군이 지키고자 했던 불멸의 의지처럼 단호하고도 고요하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여수 땅을 밟은 장군은 이곳에서 다가올 전란에 대비했다.
사적 여수 선소유적은 그 치밀한 준비 기간이 응축된 곳이다. 천혜의 요새처럼 바다가 깊숙이 들어온 독특한 지형은 바다라기보다 잔잔한 호수를 닮았다. 병법에 문외한이라도 왜군의 눈을 피해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을 직감할 수 있다. 선소 안에 발을 들이면 도심의 소음이 파도 소리에 씻겨 나가고, 적막만이 감돈다.
여수 시내에 자리한 국보 여수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본영이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널어선 목조 건물에서 당시 수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지붕을 떠받친 수많은 기둥은 국운을 짊어진 채 밤잠을 설쳤을 장군의 깊은 고뇌를 보여주는 듯하다. 전면전을 앞두고 장군은 이곳에서 어떤 전략을 구상했을까. 여행자의 질문에 이순신광장의 거대한 장군 동상은 대답 대신 말없이 바다를 보고 서 있다.
여수가 준비의 땅이었다면, 통영은 승리의 무대였다. 한산도로 향하는 물길은 고요하다. 사적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한산대첩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운주당을 두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전장을 지켜야 했던 장군에게 이곳은 생사의 갈림길이었을 것이다.
긴박했던 전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산대첩비가 내려다보는 바다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저 무심한 관광선만 유영하듯 그 위를 지나갈 뿐. 그러나 400여 년 전 이곳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승리의 빛을 찾아내야 했던 절박한 사투의 바다였다. 장군은 이곳 수루에서 전황을 살피며 깊은 고뇌에 잠겼을 테다. 그 마음이 한 편의 시로 남아 전해진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장군의 고뇌를 품은 한산도를 떠나 통영 시내로 시선을 옮기면,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인 국보 통영 세병관이 있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닦는다’는 이름처럼 평화를 바랐던 간절함이 거대한 목조 기둥마다 스며 있다.
사적 통영 충렬사와 그곳에 보관된 보물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은 명나라 황제조차 경외했던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화려함조차 그가 겪은 삶과 죽음의 고뇌를 다 가리지 못한다.
해남과 목포, 기적 같은 불멸의 순간
승리를 만끽한 통영을 뒤로하고, 해남 울돌목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화 〈명량〉의 도입부에서 장군은 “전하, 신 이순신. 그간 전하의 명을 받들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낮게 읊조린다. 백의종군하던 죄인이 나라의 명운이 다한 순간, 다시 칼을 쥐며 내뱉는 이 한 서린 첫마디는 울돌목으로 향하는 여행자의 마음에도 무겁게 내려앉는다.
발길은 자연스레 사적 해남 전라우수영으로 이어진다. 칠천량의 참패로 사실상 궤멸했던 조선 수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던 이곳은 13척으로 133척의 왜선과 맞서 싸운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울돌목의 물살은 지금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그 사나운 물결 위에 선 장군의 동상은 칼 대신 두루마리를 쥐었다. 전략가의 고뇌가 뒷모습에 고스란히 서려 있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는 그 형상은 국운을 어깨에 메고 홀로 바다를 지탱하는장수의 집념과 같다. 장군은 이 물살 앞에서 외쳤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그것은 독기가 아니라 절망을 직시한 선언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삶보다는 죽음이었을 테다. 먼저 베지 않으면 베이는 살육의 바다에서 그는 승리를 낚아챘다. 그 기적 같은 승리의 기록은 보물 해남 명량대첩비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대승의 여운을 안고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로 향한다. 명량대첩 이후 장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진을 옮긴 곳이다. 고하도는 둘레가 12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곳이 왜군에게 점령당하면 호남의 곡창지대와 통하는 영산강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장군은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6일 고금도로 본영을 옮기기까지 106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그동안 장군은 판옥선을 새로 건조해 40여 척을 확보하고, 군량미 수만 석을 비축했으며, 병사를 모아 훈련했다. 척박한 땅에서 일궈낸 전선과 군량은 꺼져가던 수군의 전의를 되살리는 불씨가 되었고, 이는 결국 7년간 이어진 전쟁을 끝내는 결정적 단초가 됐다. 고하도 숲길 끝에 자리한 전라남도 기념물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수 있다. 고하도의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풍전등화의 나라를 지키려 했던 한 사내의 집념이 나무의 옹이마다, 차가운 비석의 글자마다 깊게 박혀 있음을 느낀다.
내친김에 고하도 해안을 잇는 해상데크길로 향한다. 해안에는 일제가 판 갱도들이 흉터처럼 남아 있다. 전쟁의 광기를 보는 듯해 씁쓸하다. 장군이 지켜낸 이 바다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함은 언제든 되돌아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지 않을까.
남해에서 다시 아산으로, 불멸의 흔적
마지막 여정은 1598년 11월 19일,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남해 관음포 앞바다이다. 사적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이락사)은 장군이 전사한 노량을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있다. 언덕에 오르면 장군이 남겼다고 전하는 마지막 음성이 노량의 파도에 실려 오는 듯하다.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사적 남해 충렬사에 잠시 안치되었던 그의 유해는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옮겨졌다. 사적 아산 이충무공묘는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자락에 자리한다. 호석을 두른 봉분과 절제된 석물들은 평생 무인으로 살았던 그의 생애를 닮았다. 봉분 뒤를 감싸안은 곡장은 장군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처럼 느껴진다. 묘역 입구와 기슭에는 숙종과 정조가 대를 이어 세운 신도비가 서 있다. 석비에 새겨진 글자들은 장군이 지켜낸 이 강산처럼 지워지지 않는 불멸의 흔적이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출처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