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과 창덕궁, 북궐의 실체와 새로운 인식
〈북궐조무도〉는 강희언의 참신하고 개성 있는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후경까지 시원하게 뻗은 대로와 대로 끝 2층 누각 등만 화면 가득 묘사되었다. 대로 좌우에는 버드나무와 가옥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고, 대로에는 2층 누각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들이 그려졌다.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아래서 올려다보는 시점 등을 적용하여 넓고 깊은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북궐’은 보통 왕의 거처로 통용되었는데,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덕치를 실현한 군왕을 북극성[北辰]에 비유한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어도 뭇별이 그 주위를 중심으로 돈다”라는 글에서 유래됐다. 이 작품의 건물들은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전, 대로 좌우에 늘어선 육조(六曹) 관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왕산도〉처럼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했던 그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왜 실재하는 것처럼 그렸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낸다.2) 또한 대로변 건물은 웅장한 육조 건물이라기보다 민가, 상점처럼 소박하게 느껴져 ‘북궐’이 과연 경복궁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북궐’은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전란 후 왕들은 창덕궁, 경희궁 등에 거처하였다. 18세기에는 창덕궁을 왕의 공식 처소인 북궐로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무를 보는 왕의 시각에 맞춰 지도 상단이 남쪽인 도성 지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중 1776년 간행된 〈도성도(都城圖)〉에서 경복궁이 세 개의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진 홍예문(광화문)과 하얀 돌기둥이 나란히 놓인 경회루 터 등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반면에 창덕궁은 무성한 나무와 웅장한 건물로 가득 차게 그려졌다. 특히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그 뒤에 위치한 창덕궁 건물 등은 〈북궐조무도〉에서 대로 끝에 위치한 누각과 안개에 싸인 수목 사이로 우뚝 솟은 건물 등의 배치와 매우 유사하다. 강희언이 인왕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 음영법 등의 새로운 화풍을 적용했던 것처럼 〈북궐조무도〉도 당시 왕의 거처인 창덕궁을 북궐로 인식하여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판단된다.
관상감 출근길에 마주한 탈속의 공간
그렇다면 강희언은 왜 창덕궁의 실경을 그렸을까? 이는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 이 그림을 감상하고 남긴 강세황의 “새벽녘 통행금지 해제를 기다리다 신발에 서리가 가득했으니 나로서야 어찌 이 그림의 묘미를 알겠는가(五更待漏靴滿霜, 吾烏知此畵之妙)”라는 평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도성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됐고, 이를 어길 시 엄격하게 처벌했다. 도성문은 밤 10시경인 인정(人定)에 닫히고 오경(새벽 4시경)인 ‘파루(罷漏)’에 쇠북을 33번 치면서 열렸다. 따라서 강희언이 ‘파루’를 기다렸다는 사실은 그림 목적보다는 급한 공무나 근무지인 관청으로 출근과 관련해 그의 직업인 천문관과 관청인 관상감을 주목해야 한다.
하늘이 보내는 뜻을 받아 땅을 다스려야 한다고 여겼던 조선의 왕들은 천문, 지리, 역법 등을 담당했던 관상감을 가까이 두고자 했다. 그러나 경복궁과 광화방(廣化坊)에 설립된 관상감은 양난으로 불타버렸고, 그중 광화방의 관상감은 1688년(숙종 14) 당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 밖의 이전 관상감 자리터에 건물을 확장해 다시 지어졌다. 밤새 하늘에서 일어난 일들을 관찰하여 이른 아침 왕에게 보고해야 했던 관상감 관원들은 수시로 창덕궁을 드나들었다. 이들은 주로 관상감에서 가까운 금호문을 이용했는데, 금호문 앞의 대루원(待漏院)은 이들이 궁안에 들어가기 전 대기 장소였다. 앞서 살핀 〈도성도〉에서 남쪽 정문인 돈화문과 그 왼쪽 모퉁이를 돌아 창덕궁 서쪽의 금호문, 금호문 밖의 관상감의 위치가 확인된다.
18세기 조선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천문, 역법, 지도 등 새로운 과학기술 도입에 큰 관심을 보였고, 관상감이 그 선두에 있었다. 강희언은 1754년 17세에 운과(雲科) 천문학에 합격하여 1759년에는 역(曆) 계산과 역서 편찬을 맡는 핵심 관원인 삼력관(三曆官)이 되었다. 그는 선진 과학기술을 쉽게 접하고 하늘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북궐조무도〉는 어느 이른 새벽 관상감으로 출근하던 강희언이 보았던 안개 자욱한 창덕궁의 경관을 운치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원근법이 적용된 대로는 화면을 크게 구획하여 안개에 잠긴 북궐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나무와 건물, 인물은 채도와 먹의 농담으로 거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옅은 녹색과 먹으로 어우러진 습윤한 안개는 대로의 북적거림까지 덮어 적막감마저 자아낸다. 하늘의 뜻을 임금께 전하는 천문관인 그는 현실의 창덕궁을 탈속의 공간처럼 표현하였다. 김홍도, 신한평 등 화원들과 가깝게 지냈던 그는 이 작품을 조지서 별제와 의령고 주부 등을 지냈던 1774년 이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북궐조무도〉는 창덕궁과 그 앞 대로의 일상까지 품고 있는 감상 목적으로 제작된 조선시대 유일한 창덕궁의 실경도다. 임금 곁에서 나라의 중요 업무를 담당했던 강희언에게 창덕궁은 특별한 장소였다. 그는 천문관이면서 그림을 잘 그렸던 자긍심을 이 작품에 담아 창덕궁을 현실이 아닌 탈속의 공간으로 웅장하고 신비롭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글 이순미(국가유산청 인천항 문화유산감정위원) 출처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