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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世家) 원종(元宗) 13년1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07|조회수3 목록 댓글 0

원종3(元宗三) 13년 1월~3월

 

〈임신〉 13년(1272) 봄 정월(正月) 경신. 초하루 백양(白羊, 바얀)이 남부 지방에서 〈개경(開京)에〉 도착하였다. 갑자 〈백양(白羊, 바얀)이〉 몽고로 돌아갔는데, 진도(珍島)의 남녀 주민 중에서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이 많았다.

정축.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서장관(書狀官) 장탁(張鐸)을 파견하여 일본(日本) 사신 12인을 데리고 원(元)으로 가게 하였다. 왕이 통역관[譯語] 낭장(郎將) 백거(白琚)를 보내며 하례하는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황제의 덕화(德化)가 널리 퍼져 멀리 해 뜨는 나라에까지 미치니, 이역(異域)에서도 모두 복종하여 다 함께 황제의 은혜를 기뻐합니다. 저 왜인(倭人)은 동해 바다에 있는데 선무사(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이 작년 9월에 금주(金州)에 도착하여 배를 마련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올해 정월 13일에 일본(日本) 사절 12인과 함께 합포현(合浦縣) 경계에 돌아왔으니 이는 진실로 황제의 은덕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저들이 황제의 풍모를 바라보고 귀순하기를 사모하여 하루아침에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그들의 직분을 지키려고 왔으니, 10,000리 밖에서도 황제를 우러르는 저의 기쁨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급히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하례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신사. 원(元)이 봉주(鳳州)의 둔전(屯田)을 염주(鹽州)와 백주(白州)로 옮겼다.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각 도(道)에 파견하였다.

갑신. 제안후(齊安侯) 왕숙(王淑)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송례(宋松禮)를 원(元)으로 파견하여 국호(國號)를 정한 것을 하례하고,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3백 수십 일이 모여서 1년을 이루는 것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되고, 60여 괘(卦)에 의하여 『주역(周易)』의 도(道)가 갖추어지는 것은 건상(乾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글자로 국호(國號)를 정하니 ‘원(元)’이 4덕(德) 중에서 으뜸인 것과 같이, 황제가 천하만국의 추대를 받아 모든 왕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아! 빛나는 시대에 그 명호(名號)를 바르게 함이 진실로 타당합니다. 밝은 조서(詔書)를 전해주니 우리가 해동(海東)에 있다고 하여도 기쁨은 예외가 아니며, 축하하는 진실한 마음은 온 천하에 앞섭니다.”
라고 하였다.

정해.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장용(李藏用)이 죽었다.

2월 기해. 세자(世子) 왕심(王諶)이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원(元) 황제가 단사관(斷事官) 불화(不花, 부카)와 마강(馬絳)을 함께 딸려 보냈다. 중서성(中書省)이 보낸 첩문(牒文)에서 말하기를,
“세자(世子) 왕심(王諶)이 말한 바에 의하면, ‘우리 부자(父子)가 서로 연이어 원(元) 조정에서 황제를 만나고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우리나라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고 감사하는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매년 입조(入朝)하여 만날 때마다 항상 황은(皇恩)을 입었으니 충심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저 일본(日本)은 성스러운 덕화(德化)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조서(詔書)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대의 위용을 떨쳐야 하기에 모름지기 전함과 군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긴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황제의 군대[王師]를 돕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성(都省)에서 상주하고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세자(世子)로 하여금 친히 가게 하고, 상서성(尙書省) 마낭중(馬郞中)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세자(世子)가 오랫동안 연경(燕京)에 머물고 있어서 수행한 자들이 모두 고국(本國)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일본 정벌[東征]을 구실로 삼아 황제에게 청하여 돌아가자고 세자(世子)에게 권하였다. 설인검(薛仁儉)과 김서(金㥠) 등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 여기에 계시는 것은 사직(社稷)을 보위하기 위해서인데, 이제 이런 일로 귀국을 요청한다면 본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세자(世子)가 그만두었다. 그런데 마침 임유간(林惟幹)이 이 소식을 듣고 이 일을 핑계로 먼저 귀국하여 몰수당한 토지와 노비[田民], 재물을 되찾으려고 하자, 세자가 그 흉계를 알고 부득이 황제에게 요청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은 세자(世子)의 변발(辮髮)과 오랑캐 옷차림[胡服]을 보고 모두 탄식하였으며 심지어 우는 자도 있었다.

임인. 불화(不花, 부카)와 마강(馬絳)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계묘. 연등회(燃燈)가 열리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큰 바람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불어 100여 호(戶)가 불에 탔다.

갑진.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고, 또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대장경(大藏經)을 보관할 함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임자. 홍문계(洪文系)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무오. 원(元)이 사신을 염주(鹽州)와 백주(白州)에 보내 둔전(屯田)을 옮길 장소를 살피게 하였다.

3월 정묘. 금훈(琴熏)을 제주역적초유사(濟州逆賊招諭使)로 삼았다.

경오. 원(元)의 중서성(中書省)이 악산(嶽山)과 이규(李珪), 이추(李樞)를 보내 큰 나무를 요구하였다.

계유. 지휘사(指揮使)를 각 도(道)에 나누어 파견하였다. 삼별초(三別抄) 잔당이 회령군(會寧郡)에 침입하여 조운선(漕運船) 4척을 약탈해갔다.

무인.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병술. 태묘(太廟)가 준공되어 9실(室)의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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