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3(元宗三) 13년 4월~6월
여름 4월 기축. 우박(雨雹)이 내렸다.
경인. 일본(日本) 사신이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장탁(張鐸)이 동행하여 와서 황제의 명령을 발표하기를,
“통역관[譯語] 별장(別將) 서칭(徐偁)과 교위(校尉) 김저(金貯)는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큰 관직을 주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칭(徐偁)을 장군(將軍)으로, 김저(金貯)를 낭장(郎將)으로 임명하였다.
갑오. 어사(御史) 강지소(康之邵)를 파견하여 일본(日本) 사신을 호송하여 그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무술. 서리(霜)가 내렸다.
계묘. 원(元)이 이익(李益)을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자, 왕이 성 밖으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경술. 왕이 본궐(本闕)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갑인.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병진. 가뭄(旱)이 들어 기우제(雩)를 지냈다.
정사. 간의대부(諫議大夫) 곽여필(郭汝弼)을 원(元)으로 파견하여 군량과 사료의 감면을 요청하며,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근래에 중서성(中書省)의 지시를 받았는데, 염주(鹽州)와 백주(白州) 등지의 주둔군의 요청에 의거하여, 군사 1명당 군량 1두(㪷)씩 가산하여 매월 4두씩을 일괄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방(小邦)은 원래 백성들의 살림이 무너져서 농업에 힘을 쓸 수도 없는 까닭에 자기 집의 끼니도 대기 어려운 데다가 더욱이 〈강화도(江華島)에서〉 나온 이후 귀국[上國] 군대의 군인과 말에 필요한 군량과 사료를 전국에서 급히 거두는 게 매우 어려웠는데, 지난 해 4월 단사관(斷事官) 심혼(沈渾)이 와서 간사한 자들의 말을 듣고는 가혹하게 질책하면서 반드시 군량이 부족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나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 군사들과 말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표문(表文)을 보내게 아뢰게 하였습니다.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 없어서 다시 온 나라에 걸쳐 바닥까지 징발하여 〈관군(官軍)에게〉 공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난해 가을까지만 공급한다고 약속한 것이고, 겨울이 되면 당연히 감면해주리라고 여겼는데 다시 10월부터 금년 가을까지 공급하라고 하니 곤란하고 궁지에 빠진 것이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경오년(庚午年, 1270)부터 금년 4월 그믐까지 이미 요구에 따라 공급한 군량이 109,199석(碩) 6두이고, 말과 소의 사료가 432,005석 6두이며, 개경[王京]의 객관(客館)에서 사신 접대용으로 쓴 쌀이 17,151석, 종자가 15,000석으로 상세한 수량의 목록은 모두 별록(別錄)으로 갖추어 도표(都表)로 첨부하여 올립니다. 백성은 진작부터 굶주리고 곤란을 겪고 있어서 이전에 할당받은 수량도 가을까지 댈 수 없을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다시 첨가해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한 달에 3두면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다만 진도(珍島)를 함락시킨 후 노획한 사람과 가축까지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이렇게 〈무리한〉 요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찍이 황제의 자비를 입어 동진(東眞)의 사료용 쌀 7,000석을 운반하여 식량과 사료를 보조하라고 하기에 깊이 감사드리고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수송로가 너무 멀고 험한데다 텅 빈 무인지경(無人之境)이라 해로와 육로 모두가 불편하며, 거기에다 소방 말과 소가 적어서 전국으로 곡식을 운반할 때는 사람이 직접 이고지고 하기 때문에 동진까지 가서 운반해 오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제 이 곤궁한 실정을 미리 아뢰지 않았다가 만일 뒤에 책망이라도 내리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사해(四海)가 이미 한 집안이 된 마당에 귀국의 군대가 이 땅에 와 있고, 백성은 모두 똑같이 황제의 백성인데 어찌 멀리 도망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가련한 실정을 참작하여서 만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인덕을 베풀어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서 양곡을 수송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럼으로써 백성의 고통이 덜어진다면 저는 남은 백성들과 함께 남은 목숨을 보전하며 길이 황제의 은덕에 감복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5월 무오. 초하루 대장군(大將軍) 조자일(曹子一)을 경상도안무사(慶尙道安撫使)로 삼아서 주열(朱悅)을 대신하게 하였다.
경신. 비(雨)가 내렸다.
신유.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삼별초(三別抄)가 대포(大浦)에 침입하여 조운선(漕運船) 13척을 약탈하여 갔다고 보고하였다.
을축. 왕이 본궐(本闕)에서 금경도량(金經道場)을 열어 성변(星變)을 없애달라고 기원하였다.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탐라(耽羅) 적도(賊徒)의 첩자 2인을 잡아서 보냈다.
병인. 금훈(琴熏)이 제주(濟州)에서 돌아왔다. 금훈(琴熏)이 처음에 추자도(楸子島)를 지나갈 때 〈탐라(耽羅)〉 적도(賊徒)가 금훈(琴熏)의 종자(從者)를 죽이고 또 전리(電吏)를 구류하자, 제주(濟州)의 적도(賊徒)가 금훈(琴熏)이 탄 큰 배를 빼앗고 작은 배를 주어 돌려보냈는데 전혀 항복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경오. 세자(世子)가 각 도(道)에 각각 3인씩 사신을 파견하여 군량이 생산되는 밭을 살피게 하였다.
갑술. 왕이 본궐(本闕)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정축. 삼별초(三別抄)가 탐진현(耽津縣)을 불 지르고 약탈하였다.
갑신. 합문부사(閤門副使) 금훈(琴熏)을 원(元)으로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지극한 인자함으로 죄를 용서해주어 다행히 적도(賊徒)들이 개과천선하여 스스로 새롭게 될까 하였는데, 도망간 적도(賊徒)는 어리석은 데 빠져 오히려 방자하게 굴며 항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도성(都省)에서 상주하고 내려주신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제주초유사(濟州招諭使)로 합문부사(閤門副使) 금훈(琴熏)과 산원(散員) 이정(李貞)을 파견하였습니다. 4월 15일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가 역풍(逆風)을 만나 보마도(甫麻島)로 돌아와 정박하고 있었는데, 역적(逆賊) 김희취(金希就)와 오인봉(吳仁鳳), 전우(田祐) 등이 탄 배 4척이 와서 그 배를 빼앗고 사람들을 모두 사로잡아 자기들의 배로 옮겨 싣고, 우리 정부에서 보낸 초유문(招諭文)을 탈취하여 제주(濟州)로 가서 김통정(金通精)에게 알렸습니다. 이어 김희취(金希就) 등은 금훈(琴熏) 등을 데리고 추자도(楸子島)로 가서 그곳에 일행을 억류하고 감시하였으며, 뒤에 김통정(金通精)의 회보를 받자 김희취(金希就) 등이 금훈(琴熏) 등에게 다음과 같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너희는 지난번에 진도(珍島)에 사람을 보내 우리를 꾀어 안심시키고는 대군을 끌고 와서 격파하였다. 부모와 처자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애지중지하는데, 모두 잡아서 끌고 갔으니 이것 때문에 우리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 이제 다시 우리를 모두 없애려고 와서 꾀니 너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야겠지만, 만일 그러면 지금 이 일에 대한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알리겠는가? 그래서 너를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못쓰게 된 작은 배 1척에 늙은 선원 1명과 초유문(招諭文)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일행 가운데 기관(記官)과 전리(電吏), 초공(梢工)과 뱃길안내인[引海] 등 4인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 선원 10인도 죽이려고 끌고 갔습니다. 금훈(琴熏) 등이 섬에서 헤매다가 선원 중에서 죽음을 면한 3인을 만나 지난 달 29일에 돌아왔습니다. 즉시 귀국에 보내 그간의 사정을 보고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보고를 잘 듣고 각별한 동정을 베풀어 수비군에게 지시하여 그 혁혁한 군세로 적도를 토벌하게 함으로써, 완고한 자들을 말끔히 소탕하고 우리의 남은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6월 무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보고하기를, “삼별초(三別抄)의 적선(賊船) 6척이 안행량(安行梁)을 통과하여 올라갔습니다.”라고 하므로 개경[京城]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신축. 왕이 미행(微行)하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임자. 낭장(郞將) 이유비(李有庇)를 원(元)에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힘이 부족하여 반란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직책을 수행하는 데 무능하여 부끄러우며, 인자한 마음이 두터워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니 오직 은혜를 베풀어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에 미안함을 잊고 번거롭게 말씀을 드려 감히 황제께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생각해보면 다행히도 일찍이 귀국[上國]의 문물을 두루 둘러보고[觀光] 외람되게 국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제주(濟州)의 역적(逆賊)이 올해 3월과 4월에 회령현(會寧縣)과 해제현(海際縣), 해남현(海南縣) 등 3개 현(縣)의 포구에 침입하여 여러 주현(州縣)의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하고 또 5월에는 회령현(會寧縣)과 탐진현(耽津縣)의 2개 현(縣)에서 대거 약탈하여 갔습니다. 전후 약탈당한 것은 선박 20척과 양곡 3,200여 석(碩)이며, 12인이 살해되고 24인이 납치되어 갔습니다. 노효제(盧孝悌)란 자가 있는데 일찍이 역적(逆賊)에 붙은 자로 이달 14일에 도망쳐와서 보고하기를, ‘역적(逆賊)이 배 11척에 군사 390인을 나누어 태워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의 조운선(漕運船)을 탈취하려고 하며, 또 연해(沿海)의 주현(州縣)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연해(沿海)의 주현(州縣)에서 소동이 일어나서 안정되기 어려우며, 지난번에 보고한 바와 같이 그들이 장차 전주(全州)와 나주(羅州) 방면의 전함(戰艦) 건조 공사까지 교란시키지 않을까 염려되므로, 김주(金州)에 주둔하고 있는 귀국의 군마(軍馬)를 나누어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나라의 병졸은 활과 화살, 갑옷과 창을 일찍이 회수 당하는 바람에 군사들은 맨손과 맨몸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불편합니다.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도한 자를 쳐야 하며 덕화()를 펴기 위해서는 현재 있는 나라를 굳건히 해야 하는 법이니, 바라건대 경상도(慶尙道)에 있는 귀국의 군대 2,000명을 감축하여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에 기병 수백 명을 분산 배치하면 조선소(造船所)의 경비는 물론 여러 연해(沿海) 지방을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정예병을 우리 군대에 배치시켜서 마침내 저 도둑들을 말끔히 소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또 별지(別紙)에 올린 글에서 말하기를,
“신은 황공함을 무릅쓰고 삼가 거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사안별로 적어서 〈표문(表文)〉 뒤에 첨부하여 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의 자비로움으로 모두 허락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동녕부(東寧府)에 관한 일입니다. 앞서 경략사(經略司)에서 많지 않은 군마(軍馬)를 파견하였기에 거기에 소요되는 군량과 사료를 금년 정월부터 3월 17일까지 공급하고 그쳤습니다. 황제의 지시를 받아서 계속하여 일체의 군량과 사료를 공급하라고 하기에, 봉주(鳳州)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 500여 인분의 군량과 사료를 동녕부(東寧府)에서 공급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개경[王京]에서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개경[王京]에서는〉 능히 공급하기가 매우 불편하니,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끝까지 동녕부(東寧府)에서 보조하도록 해주십시오.
둘째는 염주(鹽州)와 해주(海州) 등지의 종전군(種田軍)에 관한 일입니다. 그들이 작년에 백성들의 집으로 들어와서 거처하며 겨울을 났는데, 봄에는 모두 그곳을 떠나 농사짓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도 집을 떠나지 않는 자가 많아서 우리 백성들이 민망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농사 짓는 곳으로 나가서 가옥을 짓고 거주하게 함으로써 번잡스런 소동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셋째는 제주(濟州)에서 나온 고윤대(高允大) 등 6인에 관한 일입니다. 작년 9월 초에 이들은 추토사(追討使) 김방경(金方慶)의 휘하(麾下)로 귀부하였는데, 흔도[忻都, 힌두(欣篤)] 관인(官人)이 여러 차례 요구하므로 그들을 주둔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창 제주(濟州) 사람들에게 귀부(歸附)를 권하고 있는 중인데, 명령에 순종하여 섬에서 나온 자마다 귀국[上國] 군대에 억류하니 그들이 이 소식을 들어 알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부디 금지하여 주십시오.
넷째는, 일찍이 황제의 명령을 들어서 귀국의 군대에 군량을 공급하는 것은 가을까지 하는 것으로 한정하였으며, 농우·농기구·종자 등은 일찍이 다 마련하여 종전사(種田司)로 보내서 때에 맞추어 파종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보리와 밀은 수확을 마쳤고 벼는 익는 중이며 늦게 심은 벼도 8월을 넘기지 않아 익을 것입니다. 가을까지 양곡을 공급하라는 지시가 정확히 어느 달까지 말하는 것인지 다시 지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을묘. 장군 나유(羅裕)를 파견하여 모병한 1,550여 인을 거느리고 삼별초(三別抄)를 전라도(全羅道)에서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적도(賊)들은 이미 제주(濟州)에 들어가 내·외성을 쌓은 다음 험준한 지세를 믿고 날로 더욱 창궐하였는데, 수시로 육지로 나와서 노략질을 하므로 해안지역이 텅 비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