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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世家) 원종(元宗) 14년1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12|조회수3 목록 댓글 0

원종3(元宗三) 14년 1월~3월

 

〈계유〉 14년(1273) 봄 정월 기미. 경상도(慶尙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함(戰艦) 건조를 감독하였다.

경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방경(金方慶)을 판추토사(判追討使)로, 추밀부사(樞密副使) 변윤(邊胤)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임술. 원(元)에서 사신을 보내자 왕이 선의문(宣義門)에서 조서(詔書)를 맞이하였는데, 글이 새로 만든 몽고문자[用新制蒙古字]를 사용하여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임유간(林惟幹)이 황제께 아뢴 바에 따라 불곰가죽[火熊皮]을 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계해. 대방후(帶方侯) 왕징(王澂)과 간의대부(諫議大夫) 곽여필(郭汝弼)을 원(元)에 파견하여 세자(世子)의 혼인()을 허락한 것을 사례하였다.

갑자. 원부(元傅)와 장길(張佶)을 모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김련(金鍊)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윤군정(尹君正)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하였다.

병자. 전라도방호장군(全羅道防護將軍) 문경수(文景秀)가 보고하기를 “적선(賊船) 10척이 낙안군(樂安郡)에 침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임오. 마강(馬絳)과 대장군(大將軍) 송분(宋玢)이 가까운 지역의 전함(戰艦)을 순시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합포(合浦)에 침입하여 전함(戰艦) 32척을 불사르고 몽고(蒙古) 병사 10여 인을 잡아 죽였다.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다.

2월 을유. 황주(黃州)와 봉주(鳳州)의 경략사(經略使)가 사람을 시켜 원(元)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으므로 승도(僧徒)들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그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
“〈원(元)의〉 군사들이 사원에서 소란을 일으켜 불경과 불상을 훼손시키는 것[毁經像]을 금지하여 승려()들이 안심하고 불법(佛法)을 닦게 하겠다.”
라고 하였다.

정해. 사원조성별감(寺院造成別監)을 설치하였다.

기축. 홍차구(洪茶丘)가 원(元)에서 돌아와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이익(李益) 및 마강(馬絳) 등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군사 출동을 의논하였다.

임진. 수로감선사(水路監船使)를 파견하여 전함(戰艦)을 인솔하고 남하하게 하였다.

병신, 흔도(忻都, 힌두)와 유통령(劉統領), 만호(萬戶) 정온(鄭溫)과 박고대(朴古大) 등이 염주(鹽州) 주둔지에서 와서 〈원(元)의〉 조서(詔書) 2통을 전하였다. 1통은 흔도(忻都, 힌두)가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耽羅)를 토벌한다는 것이고, 다른 1통은 원(元)의 관군(官軍)이 양가(良家)의 여자()를 탈취하여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하며, 또 고려(高麗)가 자체적으로 무기를 제작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인데 이는 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정유. 연등회(燃燈會)가 열리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나라에 변고가 많았기 때문에 가무와 잡희는 생략하고 단지 사원 문 밖에 등불()을 달았다.

경자. 내장택(內莊宅)에서 보고하기를 창고에 남은 것이 없다고 하자, 왕이 식사 한 끼를 굶었다.

계묘. 중군행영병마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예 기병[精騎] 800명을 인솔하여 흔도(忻都, 힌두) 등을 따라 탐라(耽羅)에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러 가자 왕이 도끼(鉞)를 주어 파견하였다.

신해. 이익(李益)이 좌창(左倉)의 녹봉(祿俸) 지급을 금지시키자 왕이 말하기를, “좌창(左倉)은 나의 신하[陪臣]의 봉록(俸祿)을 관리하는 곳이므로 원[上國]의 관인(官人)이 관여할 곳은 아닙니다. 내가 장차 황제께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자, 이익(李益)이 이에 물러났다.

계축. 대장군(大將軍)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로, 판각문사(判閣門事) 이신손(李信孫)을 충청도수로방호사(忠淸道水路防護使)로 임명하였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을 울릉도작목사(蔚陵島斫木使)로 삼아 이추(李樞)를 수행하여 울릉도(蔚陵島)로 가게 하였다.

왕이 울릉도(蔚陵島)에서 벌목하는 것을 중단해줄 것, 홍차구(洪茶丘) 휘하 500인의 의복 공급을 덜어줄 것,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한 뒤 제주(濟州) 사람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지 말고 그대로 생업에 안착시켜 줄 것 등을 주청(奏請)하자, 원(元) 황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3월 신유. 이익(李益)이 서해도(西海道)의 전함(戰艦)이 많이 침몰하자, 안찰사(按察使) 우천석(禹天錫)을 수감하였다.

경오. 마강(馬絳)이 원(元)으로 돌아가므로 대장군(大將軍) 송분(宋玢)에게 동행하여 가게 하였다. 원(元)의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관음여의주(觀音如意珠)를 보고 싶어 하였으므로 송분(宋玢)을 시켜 여의주(如意珠)를 바쳤다.

계유.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보고하기를, “적이 탐라현(耽羅縣)에 들어와 방수산원(防守散員) 정국보(鄭國甫) 등 15인을 죽이고 낭장(郎將) 오단(吳旦)을 사로잡아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양필(趙良弼)이 일본(日本)에 가서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였지만, 그 나라 수도[國都]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을해. 왕이 〈조양필(趙良弼)을〉 접견하고 위로한 후 백은(白銀) 3근, 모시포[苧布] 10필을 주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이익(李益)도 역시 선물을 주었는데 조양필(趙良弼)이 말하기를, “이것은 네가 고려(高麗)를 침탈하여 얻은 것이다.”라고 하고 받지 않고 돌아갔다.

기묘. 서해도(西海道)의 전함(戰艦) 20척이 가야소도(伽耶召島)에 도착하였을 때 태풍을 만나서 침몰하여, 남경판관(南京判官) 임순(任恂)과 인주부사(仁州副使) 이석(李奭), 녹사(錄事) 배숙(裴淑) 및 뱃사공[篙工]과 선원[水手] 등 115인이 익사(溺死)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전함(戰艦) 27척 역시 침몰하였다.

임오. 원(元)의 사신이 와서 〈황제의〉 어상(御床)에 쓸 향장목(香樟木)을 요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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