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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世家) 원종(元宗) 14년2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14|조회수5 목록 댓글 0

원종3(元宗三) 14년 4월~6월

 

여름 4월 계미. 초하루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忻都, 힌두)가 명령하기를, ‘탐라(耽羅) 토벌군의 군량은 반드시 3개월 분량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수량을 채우려면 반드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녹전(祿轉)으로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재추(宰樞)에게 대책을 묻자, 모두 말하기를, “〈강화도(江華島)에서〉 수도로 나온 이래 각 도(道)에서 조운(漕運)으로 운송한 곡식은 모두 사용하여 창고는 비고, 경략사(經略司)와 기타 제반 공급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慶尙道)의 경오년(庚午年, 1270)과 신미년(辛未年, 1271)의 2년간의 조세를 운송하여 군량을 도와주고,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임신년(壬申年, 1272) 녹전(祿轉)을 전부 우리에게 납부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무자. 서리()가 내렸다.

갑오. 왕이 본궐(本闕)에서 친히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신. 왕이 천문(天文)에 자주 재변(災變)이 일어나자 본궐(本闕)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고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무술. 우박(雨雹)이 내렸다.

병오. 왕이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여 5교(五敎)와 양종(兩宗)의 승려(僧徒)를 모아 남산궁(男山宮)에서 도량(道場)을 열어 적을 평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경술. 김방경(金方慶)이 흔도(忻都, 힌두), 홍차구(洪茶丘)와 함께 전라도(全羅道)의 배 160척과 수군 및 육군(水陸兵) 10,000여 인을 지휘하여 탐라(耽羅)에 도착하였고, 적과 싸워서 죽이거나 노획한 자가 매우 많아서 적의 무리가 크게 궤멸되었다. 김원윤(金元允) 등 6인을 참수하고 항복한 적군 1,300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태워서 육지로 옮겼으며, 원래 탐라(耽羅)에 거주하던 사람은 예전처럼 편하게 살도록 하였다. 이에 적이 완전히 평정되자 장군(將軍) 송보연(宋甫演) 등을 그대로 머물러 주둔하게 하고 귀환하였다.

5월 무오. 왕이 본궐(本闕)에서 친히 십일요(十一曜)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오. 왕이 친히 3일 동안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임신. 원(元)이 황후(皇后)와 태자(太子)를 책봉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을해. 김방경(金方慶)이 아들 김수(金綬)와 지후(祗侯) 김감(金瑊), 별장(別將)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전을 보고하자, 여러 신하들이 표문(表文)을 올려 적의 평정을 하례하였다.

기묘. 판사(判事) 주열(朱悅)에게 원(元)의 사신을 수행하여 남쪽 지방에서 금( )을 캐라고 명령하였다.

경진. 광주(光州) 무등산신(無等山神)이 역적 토벌을 은밀하게 도왔다고 하여, 예사(禮司)에 명하여 봉작호(封爵號)를 더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6월 임오. 초하루 대장군(大將軍) 김수(金綬)를 원(元)에 파견하여 탐라(耽羅)의 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였는데,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바다의 역적의 기세가 한창 치열하여 온 나라에 오랫동안 병이 되던 중에 황제의 군대[王師]가 도착하는 곳마다 하늘같은 위세에 의지하여 다 섬멸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오로지 황제의 지극한 인덕 덕분에 섬을 나와 옛 도읍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는데, 반역의 종자들이 오만방자하게도 일찍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여서 황제에게 우리의 실정을 호소하고 망한 것을 흥하게 하고 죄인들을 토벌하라고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의 괴수는 진도(珍島)에서 패전하여 해산하였지만 나머지 잔당이 탁라(乇羅, 耽羅)로 도주하였는데, 어찌 황제께서 불쌍하게 여겨 살펴보고 다시 관군(官軍)을 파견하여 적을 섬멸할 줄 기대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10,000리의 바닷길이 험하고 어려워서 가벼이 건너가기 어려웠으므로, 3군(三軍)이 뱃길로 원정하는 데에 어떻게 하나 우려도 있었습니다. 5월 24일 김방경(金方慶)이 첩문(牒文)으로 보고하기를, ‘4월 28일 대군(大軍)이 이미 제주(濟州)에 들어가 역적 무리를 처치하였으므로 전 지역이 평정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이는 황제의 신령에 의지하고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입니다. 전함이 순풍을 타고 가서 적을 제압하자 완악한 백성은 마른 나뭇잎처럼 완전히 소탕되었고, 승전보가 전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이 기쁨에 넘쳤습니다. 나는 흉악한 무리를 능히 숙청하고 먼 나라까지 미친 황제의 성덕(聖德)에 감격을 느끼며, 길이 이 나라와 백성을 보전하여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제후(諸侯)의 직분을 다하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계미.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갑신. 안남부사(安南副使) 공유(孔愉)와 홍주부사(洪州副使) 이행검(李行儉)이 적들 속에 있다가 살아서 돌아오자 왕이 접견하고 위로하였다.

정유.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개선하자 왕이 온갖 성의를 다하여 위로하고 손수 홍정(紅鞓) 1벌을 하사하고 장병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무술. 흔도(忻都, 힌두)가 장차 개경(開京)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왕이 대장군(大將軍) 박성대(朴成大)를 시켜 교외에서 영접하고 위로하게 하였다. 흔도(忻都, 힌두)가 술대접이 박하다고 화를 내며 박성대(朴成大)에게 곤욕을 주고는 개경(開京)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원(元)으로 돌아갔다.

윤6월 병진. 탐라유진장군(耽羅留鎭將軍) 송보연(宋甫演)이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의 시신을 찾았다고 보고하였다. 또 수색하여 적장(賊將) 김혁정(金革正)과 이기(李奇) 등 70여 인을 체포하여 홍차구(洪茶丘)에게 보냈는데, 홍차구(洪茶丘)가 모두 죽였다. 원(元)이 탐라(耽羅)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을 설치하였다.

기미. 원(元)에 순안후(順安侯) 왕종(王悰)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송송례(宋松禮)를 파견하여 〈황후(皇后)와 태자(太子)〉 책봉을 하례하였다.

경신. 큰 비(大雨)가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계해 왕이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중군원수(中軍元帥) 김방경(金方慶)과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능히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죽여 없앴으니 공적이 특별하므로 그들을 포상할 방법을 속히 의논하여 보고하고, 그 외의 장사(將士)와 군졸(軍卒)들도 등급[科]에 따른 포상 조건을 역시 의논하여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이 날에 김방경(金方慶)을 시중(侍中)으로, 변윤(邊胤)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上將軍 知御史臺事)로, 나유(羅裕)와 송보연(宋甫演)을 각각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무진. 홍차구(洪茶丘)가 남쪽 지방에서 돌아왔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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