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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世家) 원종(元宗) 15년1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18|조회수4 목록 댓글 0

원종3(元宗三) 15년 1월~3월

 

〈갑술〉 15년(1274) 봄 정월. 원(元)이 총관(摠管) 찰홀(察忽, 차쿠)을 보내 전함(戰艦) 300척의 건조를 감독하게 하고, 거기에 필요한 공장(工匠)과 일꾼 및 일체의 물자를 완전히 고려(高麗)가 부담하도록 위임하였다. 이에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임명하였다.

원(元)이 또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홍차구(洪茶丘)를 감독조선관 군민총관(監督造船官 軍民摠管)으로 임명하였다. 홍차구(洪茶丘)는 정월 15일에 건조 공사를 시작하자고 약정(約定)하고 공사를 매우 엄하게 독촉하자, 왕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우복야(右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임명하였으며, 또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전라도(全羅道)에,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慶尙道)에, 박보(朴保)를 동계(東界)에, 국자사업(國子司業) 반부(潘阜)를 서해도(西海道)에, 장군(將軍) 임개(任愷)를 교주도(交州道)에 보내 각 지역의 부부사(部夫使)로 임명하고 공장(工匠)과 일꾼 30,500여 명을 징집하여 조선소(造船所)로 보내게 하였다. 이 때 길에는 역마(驛馬)가 끊이지 않고 여러 업무가 지극히 번거로웠으며, 공사 기한을 촉박하기가 마치 번개나 우레 같았으므로 백성들이 크게 고통스러워하였다.

2월 갑자. 원(元)에 별장(別將) 이인(李仁)을 파견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상서하기를,
“금년 정월 초이튿날 배신(陪臣)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방경(金方慶)이 중서성(中書省)의 지시[省旨]를 가지고 도착하였는데 거기에서 말하기를, ‘대선(大船) 300척을 전라도(全羅道)와 탐라(耽羅) 두 곳에서 건조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정월 초 6일에 홍차구(洪茶丘)의 차자(箚子)에서는 ‘필요한 공장(工匠)과 인부(人巭) 및 재목 등의 물품은 고려(高麗)의 신하 허공(許珙)과 홍녹주(洪祿遒)에게 맡겨 각 도(道)에 가서 조달하게 하고, 뒤이어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감독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일은 크고 힘은 미약하여 능히 완수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어 모두 부역(赴役)시키니 몇 십 일, 몇 달 동안 끌게 되면 농사는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나 힘닿는 데까지 어찌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정월 15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장과 인부가 모두 30,500명이므로 1인당 1일 3식으로 3개월간을 계산하면 34,312석(碩) 5두(豆)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정월 19일에 받은 중서성(中書省)의 지시에서는, ‘흔도(忻都, 힌두) 관인(官人)이 관할하는 군사 4,500인이 김주(金州)까지 도착하는 군량 1,570석과 주둔지에서 필요한 군량과 사료 및 조선감독(造船監督) 홍총관(洪摠管)의 군사 500인의 행군에 필요한 군량 85석도 역시 공급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제주(濟州)에 남아서 지키고 있는 상국(上國)의 군사와 우리나라의 사졸 1,400인의 7개월 분 군량과 사료는 이미 지급을 완료하였는데 모두 2,904석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주(羅州)에 뒤처져있는 월로(粤魯, 우루)·활단적(闊端赤, 쿠테치)의 군량 8,000석과 말 사료 1,325석도 모두 우리나라가 지급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지원(至元) 10년(1273) 12월에 받은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에는 제주(濟州) 백성 10,223인에게 식량을 모두 공급하라고 하였고, 또 최근에는 군량과 사료를 도저히 마련할 수 없어서 관리와 일반 백성들에게서 수도 없이 거두어들였습니다. 또 지난해에는 전함을 건조하였고 4월에는 대군(大軍)이 탐라(耽羅)에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5월 그믐에야 돌아왔으므로, 백성들이 제때에 농사를 짓지 못하여 가을에 수확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관리와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여서 배를 건조하는 인부와 공장, 주둔군, 행군하는 군인과 군마(軍馬), 제주(濟州) 백성들의 식량과 사료로 공급한 것이 40,000여 석입니다. 이어서 김주(金州)·전주(全州)·나주(羅州)의 주둔군 및 제주(濟州)의 군인과 일반 백성의 군량과 사료를 공급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중서성(中書省)은 문서를 보내 우리나라에게 봉주둔전군(鳳州屯田軍)에게 매달 부족한 군량 2,047석과 소 사료 1,001석 7두를 부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농우(農牛)와 농기구, 종자와 첫 해 가을까지의 식량을 지급하였으며, 또한 지원 9년(1272)의 부족한 식량까지도 이미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작년에는 농사가 전혀 수재나 병충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구실로 내세워 중서성(中書省)의 지시를 받아 우리나라가 공급하게끔 만드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없는 말을 꾸며 보고함으로써 해마다 공급하게 하고 공급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정말로 민망한 일이니 바라건대 이 부담들을 모두 면제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3월 병술. 원(元)이 경략사(經略司) 왕총관(王摠管)을 보내 군사 5,000명을 동원하여 일본(日本) 정벌을 도우라고 하였는데, 당시 전주도(全州道)와 나주도(羅州道)에서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꾼 30,500여 명과 홍차구(洪茶丘)가 거느리는 공사 감독군[監造軍]에 대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동경(東京)과 진주도(晋州道) 지역의 계유년(癸酉年, 1273)분의 녹봉을 운반하여 주었다. 왕은 요역(徭役)이 번거롭고 군량을 운반할 때의 폐단으로 농사일을 그르칠까 우려하여 상장군(上將軍) 이분희(李汾禧)를 홍차구(洪茶丘)에게 보내 전체 인원의 절반씩을 귀농시키자고 설득하자, 홍차구(洪茶丘)가 그 제안을 수긍하고 배 1척당 쌍정(雙丁) 50인을 머물게 하고 그 나머지 단정(單丁)은 모두 귀농시켰다.

임인. 원(元)이 만자(蠻子) 매빙사(媒聘使) 초욱(梢郁)을 보내 중서성(中書省)의 첩문(牒文)을 전하였는데 말하기를,
“남송(南宋) 양양부(襄陽府)에 새로 편성된 군인들이 처를 구하기 때문에, 선사(宣使) 초욱(梢郁)을 파견하여 관청 소유의 견(絹) 1,640단(段)을 가지고 고려국(高麗國)에 가게 하니 유사(有司)는 관원을 파견하여 함께 처가 될 여자들을 구하도록 시행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초욱(梢郁)이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뽑으라고 급하게 독촉하므로, 결혼도감(結昏都監)을 설치하고 이때부터 가을까지 민간에서 홀어미(獨女), 역적의 처(逆賊之妻), 승려의 딸(僧人之女)을 샅샅이 찾아내어 겨우 그 수를 채우자 원성이 크게 일어났다. 여자 1명당 치장하는 비용으로 비단 12필을 지급한 후 만자(蠻子)들에게 나누어주자 만자()들이 즉시 데리고 북쪽 원(元)으로 돌아갔다. 통곡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고, 보는 사람도 슬퍼서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병오.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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