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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충렬왕(忠烈王) 즉위년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22|조회수1 목록 댓글 0

세가(世家) 권제28(卷第二十八) 고려사28(高麗史二十八)

 

충렬왕1(忠烈王一) 즉위년

 

충렬왕(忠烈王)의 휘()는 거(昛)이며 옛 휘(古諱)는 심(諶) 또는 춘(賰)이다. 원종(元宗)의 맏아들[長子]이고,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이며 고종(高宗) 23년(1236) 병신 2월 계축일에 태어났다. 〈고종(高宗)〉 46년(1259) 6월에 고종(高宗)이 훙서()하였는데, 당시 원종 (元宗) 은 태자(太子)로서 원(元)에 입조하였기 때문에, 왕은 그 때 태손(太孫)으로서 〈조부인 고종(高宗)의〉 유명(遺命)을 받아 국사(國事)를 임시로 책임졌다. 원종(元宗) 원년(1260) 8월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원종(元宗)〉 13년(1272)에 원()에 갔다. 〈원종(元宗)〉 15년(1274)에 원(元) 세조(世祖)의 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쿠투루칼리미시)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원종(元宗) 15년〉 6월 계해일에 원종(元宗)이 훙서()하자 갑자일에 백관이 본궐(本闕)에 모여서 멀리 있는 〈태자(太子)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월 무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곽희빈(郭希份)과 낭장(郞將) 조정통(曺精通)이 바둑()을 잘 두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름을 받고 원(元)으로 갔다.

가을 7월. 원(元)에서 동지상도유수사(同知上都留守事) 장환(張煥)을 파견하여 왕을 책봉(冊封)하였다.

병술.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정벌하는[征東]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임진. 추밀원사(樞密院使) 박구(朴璆)를 원(元)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8월 기유. 원(元)에서 일본정토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홀돈(忽敦, 쿠둔)을 보내어 와서 경군(京軍) 458인을 추가로 동원하라고 하였다.

무진. 왕이 원(元)에서 돌아오니 백관이 마천정(馬川亭)에서 영접하였다. 〈왕을〉 따라온 원(元)의 사신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먼저 개경(開京)으로 들어왔다. 왕은 장전(帳殿)에 거둥하여 백관의 배례(拜禮)를 받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먼저 제상궁(堤上宮)으로 나아가서 빈전(殯殿)에 배알하였다.

기사. 왕이 편복(便服)에 검은 가죽 띠를 두르고 본궐(本闕)에 행차하여 다시 도포와 홀[袍笏]을 갖추고 강안전(康安殿)에서 조서(詔書)를 받았다. 그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국왕[元宗]이 살아 있을 때 세자(世子)가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고 여러 번 말하였다. 이제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왕위를 하도록 하니 무릇 소속된 자들은 모두 왕의 통제를 따르라.”
라고 하였다. 왕이 조서(詔書)를 받은 뒤에 경령전(景靈殿)에 배알하고 강안전(康安殿)으로 돌아와 황포(黃袍)를 입고 즉위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나서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詔使]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은 왕이 부마(駙馬)였기 때문에 왕을 남면(南面)하게 하고, 자신은 동향으로 앉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는 서향으로 앉게 하였다. 왕이 술을 따라주니 사신이 절하고 받았고, 술을 마신 뒤에 다시 절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서서 술을 마시고 절하지 않자 사신이 말하기를, “왕은 천자(天子)의 부마(駙馬)이시다. 그대가 어찌 감히 이같이 하는가? 우리가 돌아가서 〈황제께〉 보고하면 그대의 죄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대답하기를, “〈이 자리에〉 공주(公主)가 계시지 않고, 또 이것은 선왕(先王) 때부터의 예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오. 소경(少卿) 조유(趙愉)를 동녕부(東寧府)에 보내어 〈고려(高麗)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추쇄(推刷)하였다.

여러 도(道)에서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올리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계유. 동정부원수(東征副元帥) 홍차구(洪茶丘)가 충청도(忠淸道)의 초공(梢工)과 뱃사공[水手]들이 기한 안에 도착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부부사(部夫使)인 대장군(大將軍) 최면(崔沔)을 장형(杖刑)에 처하고 대부경(大府卿) 박휘(朴暉)가 그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분성(李汾成)을 추밀원집주(樞密院執奏)로 삼았다.

9월 을해. 김련(金鍊)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분희(李汾禧)와 김신(金侁)을 모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였다.

병자. 원(元)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임오. 왕이 대행왕(大行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비로소 참최마질복(斬衰麻絰服)을 입고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곡(哭)을 하였다.

을유. 〈원종(元宗)을〉 소릉(昭陵)에 장사지냈다. 왕이 상복(喪服)을 벗고 사판궁(沙坂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자(戊子) 왕이 재추(宰樞)들을 접견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현명한 임금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좋은 신하들에 힘입어 나라를 편히 다스렸다. 우리나라의 안위(安危)는 오직 경들에게 달려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지 말라.”라고 하였다.

기축.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온(奇蘊)을 파견하여 공주(公主)를 원(元)에서 맞아오게 하였다.

임진(壬辰) 〈왕이〉 원(元)에 입조(入朝)했을 때 시종했던 신료(臣僚)들에게 모두 상을 더하여 하사하고, 관직 승진에 제한이 있는 자[限品者]들은 승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갑오. 왕이 본궐(本闕)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친히 열었다.

무술.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정자여(鄭子璵)를 원(元)에 파견하여 황제의 공주(公主)를 고려(高麗)로 하가(下嫁)시킨 것[釐降]과 국왕의 작위[습작, 襲爵]를 이어받게 한 것을 사례하였다.

제상궁(堤上宮)의 중서성(中書省)을 사관(史館)으로 삼았다.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이래로 사관(史館)을 세우지 못하여서 실록(實錄)을 본궐(本闕)의 불당고(佛堂庫)에 임시로 보관해 왔다.

겨울 10월 을사.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忻)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를 부사(副使)로 삼았고,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事)로 삼고,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삼고, 나유(羅裕)와 박보(朴保)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반부(潘阜)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이라 불렀다. 원(元)의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쿠둔)과 우부원수(右副元帥) 홍차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한군(蒙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인해(引海)·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日本)을 정벌하게 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쳐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다. 왜인(倭人)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마치 삼대 같았다. 날이 저물어 이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폭풍우가 크게 불어서 전함들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金侁)은 익사(溺死)하였다.

무신. 이분성(李汾成)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신해. 본궐(本闕)에서 삼계(三界)에 몸소 제사를 지냈다.

대부(大府)의 주부(注簿)인 탁지기(卓之琪)가 대부(大府)의 물품은 고갈되었는데 지출 비용은 너무 많아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무오. 흰 기운이 태양()을 관통하였다.

신유. 왕이 서북면(西北面)으로 행차하여 공주(公主)를 맞이하는데, 순안공(順安公) 왕종(王悰)과 광평공(廣平公) 왕혜(王譓), 대방공(帶方公) 왕징(王澂), 한양후(漢陽侯) 왕현(王儇), 평장사(平章事) 유천우(兪千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장일(張鎰), 지주사(知奏事) 이분희(李汾禧), 승선(承宣) 최문본(崔文本)·박항(朴恒), 상장군(上將軍) 박성대(朴成大),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분성(李汾成)이 수행하였다. 왕이 이분희(李汾禧) 등이 변발[開剃]을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였더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신 등이 변발하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직 뭇 사람들이 〈그렇게 하여〉 상례가 되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몽골 풍속에서는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머리를 깎아서 그 모양을 네모로 하는데 가운데만 머리카락을 남겨두었다. 이것을 겁구아(怯仇兒, 케쿠르)라고 하는데 왕은 입조(入朝)하였을 때에 이미 변발하였지만, 본국인들은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책망한 것이다.

갑자. 이분성(李汾成)에게 개경(開京)으로 돌아가 비빈(妃嬪) 및 모든 궁주(宮主), 재추(宰樞) 부인들로 하여금 모두 나와 공주(公主)를 영접하라고 명령하였다. 수행하던 신하들을 용천역(龍泉驛)에 머물러 남겨두고 홀로 변발[開剃]한 대장군(大將軍) 박구(朴球) 등만 데리고 행차하였다. 승선(承宣) 박항(朴恒)이 왕에게 말하기를, “사관(史官)은 임금의 모든 행동거지를 기록하는 자인데, 단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직사관(直史館) 이원(李源)에게 수행하게 하였다.

병인. 왕이 서경(西京)에 도착하였다. 그 때 서경(西京)은 동녕부(東寧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은(銀)과 저포(紵布)를 내어 식량과 사료로 바꾸어서 수행한 신하들에게 공급하였다.

정묘. 왕이 숙주(肅州)에서 공주(公主)를 만났다. 서경(西京) 대흥부(大興府)의 녹사(錄事)인 양수(楊壽) 등이 왕을 따라 가기를 청하였는데, 최탄(崔坦)이 길을 막고 있다가 그들을 붙들어 갔다.

11월 정축. 왕이 공주(公主)와 함께 개경(開京)에 도착하여 죽판궁(竹坂宮)에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유천우(兪千遇)가 장일(張鎰)에게 말하기를, “왕이 만약 오랑캐의 옷[戎服]을 입고 서울로 들어오시면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문본(崔文本)과 박항(朴恒)으로 하여금 왕에게 예복(禮服)을 입고 들어올 것을 청하고, 또 강윤소(康允紹)와 간유지(簡有之)가 재차 청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간유지(簡有之)  천한 노비였지만 배우(俳優)로서 왕의 사랑을 받아서 낭장(郞將)에 임명되었다. 재상(宰相)과 백관(百官)들이 국청사(國淸寺) 문 앞에서 〈왕과 공주(公主)를〉 맞이하였는데, 강윤소(康允紹)와 송분(宋汾)이 윤수(尹秀)·원경(元卿)·정손기(鄭孫琦) 등을 부추겨서 말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예복(禮服)을 입은 자들을 때려서 내쫓았으므로 왕을 시종하던 자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왕이 공주(公主)와 함께 수레를 같이 타고 개성(開城)으로 들어오니 부로(父老)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백년 전쟁[鋒鏑] 끝에 다시 태평한 때를 만나게 될 줄 몰랐다.”라고 하였다.

갑신. 강수형(康守衡)을 추밀원부사 판위위시사 상장군(樞密院副使 判衛尉寺事 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을유. 왕이 본궐(本闕)로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다음날 대회(大會)에서는 공주(公主)가 의봉루(儀鳳樓) 옆에 장막(帳幕)을 치고 관람하였다.

정해. 변윤(邊胤)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박구(朴璆)를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임명하였다.

신묘. 홀적(忽赤, 코르치) 강윤소(康允紹) 등이 왕과 공주(公主)를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

정유. 왕씨(王氏)를 책봉하여 정화궁주(貞和宮主)로 삼고, 왕녀(王女)를 정녕궁주(靖寧宮主)로 삼았다.

기해. 동정(東征) 갔던 군사들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위로하였는데,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무려 13,500여 인이었다.

12월 을사.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 장군(將軍) 고천백(高天伯)을 원(元)에 파견하여 신년(新年)을 하례하였다. 또 따로 전문(箋文)을 보내어서 아뢰기를,
“소방(小邦)은 옛날부터 주(州)와 군(郡)에 수령(守令)을 파견하여 농사와 양잠(養蠶)을 권장하였습니다. 또 여러 도(道)의 안찰사(按察使)로 하여금 파종하고 추수하는 일을 독려하고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해마다 〈상국(上國)의〉 관군(官軍)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느라 백성들이 많이 피폐해졌습니다. 지금 만약 상국(上國)에서 다시 여러 도에 권농사(勸農使)를 파견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백성들 중에서 원래의 세금[貢賦]을 공급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으며, 권농사(勸農使)의 명령에 부응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직 나라의 명색(名色)이 남아있으니 폐하의 생각에는 그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신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황제께서〉 삼한(三韓)의 땅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강직하고 성실한 신하를 파견하시어 그 허실을 살피셔서 권농하는 일만은 모두 신에게 위임하여 주십시오. 신이 장차 백성들을 이끌고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살펴서 폐하께서 백성들을 걱정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오. 왕의 죽은 어머니 정순왕후(靜順王后)를 추존하여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삼았다.

갑인. 원(元)이 흑적(黑的)을 파견하여 와서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으로 삼았다.

을묘. 왕이 사판궁(沙坂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 재추(宰樞)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김시중(金侍中, 김방경)이 만약 돌아오면 반드시 바로 변발[開剃]할 것입니다. 어차피 변발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찌 〈우리가〉 먼저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송송례(宋松禮)와 정자여(鄭子璵)가 변발하고 조회에 참석하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랐다. 오직 〈잡류(雜類) 중에서〉 초노(抄奴)·소유(所由)·전리(電吏)들은 모두 그전대로였다. 처음에 인공수(印公秀)가 항상 원종(元宗)에게 원(元)의 풍속을 따라서 머리 모양을 고치고 의복도 바꾸기를 권하였는데, 원종(元宗)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하루아침에 조상 대대로의 가풍(家風)을 갑자기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죽은 후에 경들은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였었다.
라고 하였다.

경신. 원종(元宗)의 혼침전(魂寢殿)에 속한 요속(僚屬)과 국자감(國子監) 관원 등에게 옛날 복장을 그대로 입도록 명령하였다.

경오.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홀돈(忽敦, 쿠둔)은 포로로 잡은 동남(童男)·동녀(童女) 200인을 왕과 공주(公主)에게 바쳤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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