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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혜종(惠宗) 2년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06|조회수0 목록 댓글 0

혜종(惠宗) 2년

 

을사 2년(945). 후진(後晉) 개운(開運) 2년, 거란(契丹) 회동(會同) 8년

진(晉)이 광록경(光祿卿) 범광정(范匡政)과 태자세마(太子洗馬) 장계응(張季凝)을 보내어 왕을 지절 현토주도독 상주국 충대의군사 고려국왕(持節 玄菟州都督 上柱國 充大義軍使 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女)이 태조(太祖)의 16번째 비가 되어 아들()을 하나 낳으니 광주원군(廣州院君)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왕규(王規)가 왕의 동생()인 왕요(王堯)와 왕소(王昭)가 다른 생각이 있다고 참소하였다. 왕은 무고임을 알고 더욱 돈독하게 은혜로 대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아뢰기를, “유성(流星)이 자미궁(紫微宮)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왕규(王規)가 왕요(王堯)와 왕소(王昭)를 해치려는 징조라고 생각하였으나 또한 왕규(王規)에게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장공주(長公主)를 왕소(王昭)의 처()로 삼아 그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공주(公主)는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황보씨(皇甫氏)라고 하였다. 이후로 동성(同姓)에게 시집간 이들은 모두 〈그 본래 성을〉 피하고 외가(外家)의 성을 불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아내()를 맞아들임에 동성(同姓)을 취하지 않는 것이 예이니, 비록 100세대가 지나더라도 혼인(婚姻)을 하지 않는 것이다. 혜종(惠宗)이 공주(公主)를 아우()에게 처()로 삼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당시의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태조(太祖)는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옛 법을 본받기 시작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나, 습속에 젖어 바꾸지는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 이후로는 〈이를〉 가법(家法)으로 보아 답습하며 평온히 이상하게 여기지를 않았으니, 중엽 이후에 비록 4·6촌 사이의 〈혼인(婚姻)은〉 금지하였으나, 동성(同姓) 간의 혼인(婚姻)은 끝내 금지하지 못하였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남녀가 성이 같으면 그 후손이 번성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동성(同姓) 사이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지친(至親)임에랴. 지금 고종과 이종 자매[고자매, 姑姊妹]를 취한 자들을 보면 대체로 후손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 세대가 500년이 지나더라도 종파(宗派)와 지파(支派)가 끝내 수 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뒤에야 선왕(先王)이 예를 정한 뜻이 깊음을 알게 될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규(王規)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옹립하려고 도모하여, 일찍이 밤에 왕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당여(黨與)로 하여금 침실에 잠입하게 하여 장차 대역죄를 범하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깨닫고 한 주먹에 그들을 때려죽인 후 주위에 명하여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하루는 왕이 병기(病氣)가 있어 신덕전(神德殿)에 머물고 있었는데, 최지몽(崔知夢)이 또 아뢰기를, “가까운 시일 내에 장차 변고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기회를 보아 이어(移御)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겨갔다. 왕규(王規)가 밤에 사람을 보내어 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게 하였는데, 침상은 이미 비어있었다. 왕은 왕규(王規)가 한 짓인 줄을 알았지만 역시 그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후에 왕규(王規)가 최지몽(崔知夢)을 만나자 검을 빼어 들고 욕을 하며 말하기를, “왕이 침전을 옮긴 것은 분명히 너의 계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왕규(王規)가 반역을 꾀한 이후로 의심하고 꺼리는 바가 많아져서 항상 무장한 병사들로 자신을 호위하고, 기쁨과 성냄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여러 소인배들을 아울러 등용하고,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내림에 절도가 없었으니, 안팎이 탄식하고 원망하였다.

○가을 9월. 왕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들어가 뵐 수가 없고 간사한 소인들만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무신. 중광전(重光殿)에서 훙서하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의공대왕(義恭大王)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혜종(惠宗)이라 하였으며, 순릉(順陵)에 장사지냈다. 여러 신하들이 왕의 아우인 왕요(王堯)를 받들어 즉위하게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기를, “우보(羽父)가 환공(桓公)을 죽이라고 청한 것은 장차 태재(太宰)의 자리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은공(隱公)이 들어주지 않았지만 또한 그를 징벌하지도 않았다가 끝내 위씨(蔿氏)의 화를 입기에 이르렀다. 왕규(王規)가 왕의 두 아우를 참소한 것도 또한 우보(羽父)와 같은 의도였다. 혜종(惠宗)은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가까이에 있게 하였으니, 소매 속에 칼날을 숨기고 벽을 넘어 온 자객의 음모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하겠다. 당시는 태조(太祖)가 세상을 떠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왕규(王規)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음이 이미 후한(後漢)을 찬탈한 조비(曹丕)나 위(魏)를 찬탈한 사마염(司馬炎)과 같았는데도 그를 내치거나 죽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아, 소인(小人)을 멀리 하기가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유. 왕규(王規)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煕)를 죽였다. 박술희(朴述煕)는 성품이 용감하여 18세에 궁예(弓裔)의 위사(衛士)가 되었다. 후에 태조(太祖)를 섬기면서 여러 차례 군공(軍功)을 세우고, 유명(遺命)을 받아 혜종(惠宗)을 보좌하였다. 혜종(惠宗)이 병에 걸리자 마침내 왕규(王規)와 서로 미워하여 병사 100여 명을 직접 데리고 다녔다. 왕이 〈그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갑곶(甲串)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왕규(王規)가 거짓으로 왕명을 꾸며 그를 죽였다. 후에 시호(諡號)를 엄의(嚴毅)라고 하고 태사(太師)로 추증하였으며, 혜종(惠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왕규(王規)를 처형하였다. 처음에 왕이 왕규(王規)가 역모를 꾸민다는 것을 알고 은밀히 서경(西京)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변란에 대응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왕규(王規)가 반란을 막 일으키려고 할 때 왕식렴(王式廉)이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와 호위하니, 왕규(王規)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규(王規)를 갑곶(甲串)으로 내치고, 사람을 보내어 쫒아가서 목을 베게 하였으며, 그의 당여(黨與) 300여 명도 주살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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