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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정종(定宗) 4년

작성자나정 최종돌|작성시간26.06.13|조회수3 목록 댓글 0

정종(定宗) 4년

 

기유 4년(949). 후한(後漢) 건우(乾祐) 2년, 요() 천록(天祿) 3년

봄 정월.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이 죽었다. 왕식렴(王式廉)은 태조(太祖)의 사촌동생이다. 부지런함과 신중함으로써 오랫동안 서경(西京)을 지켰다. 왕규(王規)의 반란을 평정하자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고 대승(大丞)으로 올려주었다. 사망하자 시호(諡號)를 위정(威靜)이라고 하고 태사(太師)로 추증하였으며, 후에 왕의 묘에 배향하였다.

○3월 병진. 왕의 병세가 위독하여지자 동모제[母弟]인 왕소(王昭)를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內禪] 제석원(帝釋院)으로 이어하였다. 훙서()하니, 시호(諡號)를 올려 문명(文明)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고 하였으며, 안릉(安陵)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왕이〉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장차 서경(西京)으로 천도를 하고자 장정들을 징발하고 시중(侍中) 권직(權直)으로 하여금 궁궐을 짓게 하니, 노역이 그치지를 않았으며, 또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 옮겨서 서경을 채웠다. 민심이 복종하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함께 일어났다. 〈왕이〉 훙서()하자 노역하던 장정들이 듣고 기뻐 날뛰었다.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기를, “정종(定宗)은 왕의 존귀한 몸으로 10리나 떨어진 부처의 집에 걸어가서 사리(舍利)를 안치하였고, 또 70,000석이나 되는 곡식을 하루 만에 여러 승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번 하늘의 꾸짖음[天譴]을 받자 상심하여 병이 생겼으니, 이른바 ‘군자(君子)는 복을 구하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求福不回]’라는 말을 또한 일찍이 들어보았던가. 병이 이미 매우 위독하였는데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그의 친동생에게 부촉함으로써 왕규(王規)와 같은 자들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게 한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가을 8월.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 등에게 명하여 나라를 평정하던 초기에 공로가 있는 자들을 헤아려서 차등 있게 쌀을 내려주고, 예식(例食)으로 삼게 하였다.

○원보(元甫) 식회(式會)와 원윤(元尹) 신강(信康) 등에게 명하여 각 주현(州縣)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의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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