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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秋夕)

작성자순수나|작성시간10.09.26|조회수57 목록 댓글 0

 

세시풍속분야- 정일

계절- 가을(음력8월)

날짜- 음력 8월15일(양력 2010년9월22일)

소개- 음력 팔월 보름을 일컫는 말.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며 또한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연중 으뜸 명절이다.

풍속- 줄다리기, 반보기, 추석차례(秋夕茶禮), 추석성묘(秋夕省墓), 소싸움, 고사리꺾기, 강강술래, 씨름

음식- 토란국(土卵-), 송편(松餠), 닭찜, 누름적, 화양적(華陽炙)

속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보은 아가씨 추석비에 운다,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푼주의 송편이 주발 뚜껑 송편 맛보다 못하다

다른 이름-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가배(嘉俳), 중추(中秋), 가위, 가배일(嘉俳日), 중추가절(仲秋佳節)

[정의] 음력 팔월 보름을 일컫는 말.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며 또한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연중 으뜸 명절이다. 가배(嘉俳), 가배일(嘉俳日), 가위, 한가위,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한다. 가위나 한가위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가배는 가위를 이두식의 한자로 쓰는 말이다.[어원]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추석’이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중국인들은 추석 무렵을 중추(中秋) 또는 월석(月夕)이라 하는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석날 밤에는 달빛이 가장 좋다고 하여 월석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중엽 이후 한자가 성행하게 된 뒤 중국인이 사용하던 중추니 월석이니 하는 말을 합해서 축약하여 추석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이라 하는 것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中秋), 종추(終秋)로 나누었을 때 추석이 음력 8월 중추에 해당하므로 붙은 이름이다.

[유래] 추석의 시원(始原)이나 유래에 대한 명확한 문헌 자료는 없다. 중국의 『수서(隨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는 “8월 15일이면 왕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쏘게 하여 잘 쏜 자에게는 상으로 말이나 포목을 준다.”라고 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도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면 서로 하례하는 예식을 여는데 왕이 잔치를 베풀고 또 해와 달의 신에게 절을 한다. 팔월 보름이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쏜 자에게는 상으로 포목을 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인들은 산신(山神)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며 8월 보름날이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이 모여서 활을 잘 쏜다.”라고 하였다. 우리 문헌에는 12세기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추석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지만 그 시원을 밝히는 내용은 아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추석이 신라 초기에 이미 자리 잡았으며,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신라본기(新羅本紀)」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조에 기록된 추석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왕이 육부(六部)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편을 짜고, 7월 16일부터 날마다 육부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했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게 하고 8월 보름에 이르러 그 공(功)의 다소를 살펴 지는 편은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한다. 이때 진 편의 여자들이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 하였는데 그 소리가 구슬프면서 아름다웠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연으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특히 여자들이 패를 나누어 길쌈을 했다는 것은 두레길쌈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당시 길쌈이 이미 보편화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실 추석은 앞으로 다가올 겨울의 의복을 장만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옷감을 짜는 풍속은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는데 세시명절은 농경에 적응하여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세시명절인 한가위는 고대 농경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신라시대에는 이미 일반화된 명절로 자리 잡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추석의 관습이 가락국에서 왔다고 했다. 일본인 승려 원인(圓仁)은 그의 저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당시 산동(山東) 근방에서 살던 신라인들이 절에서 가배명절을 즐겼던 사실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신라인들이 발해와의 싸워 이긴 기념으로 추석을 명절로 즐겼다고 해석하기도 했다.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육부(六部)를 방증할 수 있는 자료가 발굴되기도 했다. 신라가 육부였음은 1988년 4월 15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竹邊面) 봉평리(鳳坪里)에서 출토된 신라 비석의 내용으로 확인이 된다. 비석은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육부 중의 하나인 탁부 출신의 박사가 건립하였다고 하여 가배풍속과 관련된 육부의 존재가 분명해졌다.이처럼 신라시대에 이미 세시명절로 자리 잡던 추석은 고려에 와서도 큰 명절로 여겨져 9대 속절(俗節)에 포함되었다. 고려 9대 속절은 원정(元正, 설날)·상원(上元, 정월대보름)·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였다. 이 명절들은 조선시대로 이어졌고 조선시대에 추석은 설날, 한식, 단오와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로 꼽혔다.우리나라에서 추석 명절을 비롯한 세시명절의 위상은 근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세시풍속이 농경의례로서 농사라는 생업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만큼 산업사회 이후 공업이 생업의 중심이 되면서 농촌사회가 변화하여 세시명절이 약화하기 시작했다. 추석 또한 전통적인 성격이 퇴색하여 차례와 성묘하는 날로 축소되었지만, 국가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큰 명절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개관]추석은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하며, 가을의 한가운데, 곧 가을 중의 가을인 명절이다. 추석 무렵은 좋은 계절이어서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5월은 농부들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하여 땀을 흘리면서 등거리가 마를 날이 없지만 8월은 한해 농사가 다 마무리된 때여서 봄철 농사일보다 힘을 덜 들이고 일을 해도 신선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니 그만큼 추석은 좋은 날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듯이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이다. 특히 농촌에서 가장 큰 명절이니 이때는 오곡이 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지내므로, 이날처럼 잘 먹고 잘 입고 놀고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새삼 간절해진다.달의 명절로도 일컬어지는 추석에는 풍요를 기리는 각종 세시풍속이 행해진다.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차례와 같이 엄숙한 세시풍속이 있는가 하면 한바탕 흐드러지게 노는 세시놀이 역시 풍성하게 행해진다.추석은 애초 농공감사일(農功感謝日)로서 이날 명절식으로 송편을 빚어 조상에게 올려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다. 추석 전에 조상의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여 여름 동안 묘소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준다. 추석날 아침에는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차례는 대체로 4대 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부터의 관행이다.

의례, 절식

[의례]추석에 행하는 의례로 올베심리와 풋바심이 있다. 올베심리란 주로 호남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올벼 천신(薦新)을 말한다. 올기심리, 올계심리, 오리십리, 올비신미라고 부른다. 올벼란 ‘일찍 수확한 벼’를 일컫는 것으로, 벼가 다 여문 무렵 혹은 채 여물기 전에 여문 부분을 골라 찧은 쌀이다. 벼가 덜 여물면 미리 솥에 볶아서 말려두었다가 밥을 짓는다. 술과 조기, 햇병아리, 햇무 같은 것들을 상에 차려 조상에게 바치고 온 집안 식구가 모여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미리 베어온 벼포기는 안방 윗목 벽에 가로 묶어 두기도 한다. 호남지방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는 집에서도 벼포기를 사다 걸어둘 정도로 이 풍속은 일반화되어 있다. 올벼심리는 대개 추석 무렵에 올리지만 ‘벼가 익을 무렵’에 올리므로 그 시기는 일정치 않다.벼뿐만 아니라 다른 곡식을 함께 걸어두기도 한다.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같은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이나 문설주에 걸어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도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술과 음식을 차리고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풀기도 한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사용하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하거나 터주를 비롯한 가신(家神)에게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는 이듬해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과 풍농을 예축하는 의미가 있다.경북 안동을 비롯한 영남에서는 올베심리와 비슷한 것으로 풋바심이 전한다. 논 가운데 누렇게 잘 익은 부분을 지게로 한 짐 정도, 벼로는 두 말 정도, 쌀로는 한 말 정도 미리 베어서 탈곡한다. 이 쌀로 밥을 짓고 제물을 갖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올베심리와 같다.또다른 추석의 풍속으로 반보기와 근친(覲親)이 있다. 충남 지역에서는 추석 무렵에 반보기를 하는데 이는 반나절 동안 만나는 것을 말한다. 늦여름이 다 가도록 농사에 바빴던 일가 친척들이 추석 무렵이면 서로 약속하여, 양편의 중간 지점에서 만난다. 이것이 반보기인데 중간지점에서 만난다 하여 중로상봉(中路相逢) 또는 중로보기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특히 시집간 딸이 이 반보기를 통해 친정식구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지역에서 추석 전후가 되면 이런 반보기가 아니라 ‘온보기’로 새색시들이 근친가는 일이 많았다.[절식]설날의 명절식이 떡국인 반면 추석의 명절식은 송편이다. 명절식은 차례상에 올려 조상에게 제를 지내고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이 나누어 먹는다. 송편은 지역에 따라 음력 이월 초하루인 머슴날 또는 설날에도 만들어 먹지만 역시 가을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가을 맛은 송편에서 오고 송편 맛은 솔내에서 온다는 말도 있다.우리나라의 음식은 원래 계절에 유난히 민감하여 제철음식이란 말이 있다. 많은 떡 가운데 개피떡과 송편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아니한 봄과 가을의 음식이지만 그 중에서도 개피떡은 따뜻한 편에 가깝고 송편은 서늘한 편에 가깝다. 그래서 봄에는 송편이 먼저 나온 뒤 개피떡이 등장하며 가을에는 개피떡이 먼저 나오고 송편이 뒤에 등장한다. 봄 송편은 햇솔로 묵은 쌀의 향기를 새롭게 하지만 가을 송편은 햅쌀로 솔내를 맑게 해준다. 그래서 추석에는 올벼로 만든 오려송편이 제격이다. 웃기로 쓰는 송편은 삼각형의 작은 골무만한 것으로 이를 골무송편이라 한다.송편은 쌀가루를 익반죽하여 햇녹두, 청태콩, 동부, 깨, 밤, 대추, 고구마, 곶감, 계피가루 같은 것을 소로 넣어 둥글게 빚는다. 송편이란 이름은 송편을 찔 때에 켜마다 솔잎을 깔기 때문에 붙여졌다. 쌀가루를 익반죽할 때 쑥이나 송기를 찧어넣어 쑥송편이나 붉은 색의 송기송편을 만들기도 한다. 한가위 때 햅쌀로 빚은 송편은 각별히 오려송편이라고 한다. 오려란 올벼를 뜻하는 말이다.추석의 명절식으로 송편과 함께 토란국을 차례상에 올리기도 한다. 토란국은 다시마와 쇠고기를 섞어서 끓인다. 화양적과 누름적도 명절식인데 화양적은 햇버섯, 도라지, 쇠고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볶아 꼬챙이에 끼운 음식이다. 누름적은 화양적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밀가루나 달걀을 묻혀 지진 음식이다. 이 음식들 역시 차례상에 올린다. 또 닭이 살이 올라 가장 맛있는 계절이므로 추석의 절식으로 닭찜을 한다. 찹쌀가루를 쪄서 계란같이 둥근 떡을 만들고 삶은 밤을 꿀에 개어 붙이는 율단자도 추석의 명절식이다. 밤 대신 토란을 사용한 토란단자도 이때 먹는다.추석 무렵에는 송이버섯의 향기가 유난히 좋다. 송이회, 송이전, 송이전골이 일품이며 음식의 고명으로도 송이버섯을 많이 사용한다. 한편 추석 무렵은 앞으로 다가올 겨울의 저장용 반찬거리를 마련할 시기여서 박고지, 호박고지, 호박순, 고구마순도 거두어 말리고 산채를 말려 묵은나물을 준비한다.

[놀이방법]추석에는 강강술래, 줄다리기, 가마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소싸움, 닭싸움 같은 놀이를 한다. 특히 추석과 같은 보름 명절에는 강강술래와 같은 원무(圓舞)가 중심을 이룬다. 한가윗날 보름달 아래서 노는 원무는 한층 운치가 있다. 추석놀이들은 단순한 놀이일 뿐만 아니라 풍농을 기원하고 예축하는 신앙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①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풍요를 상징하는 달에 비유되는 놀이이다. 농경사회에서 보름달은 풍요를 상징하며 이는 여성과도 관련된다. 여성은 생산의 주체이므로 여성 자체가 풍요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정월대보름의 만월(滿月)은 만삭의 여성으로 비유된다. 따라서 대보름날의 강강술래놀이는 여성들이 풍요의 달 아래에서 논다는 의미에서 풍요의 극치를 의미한다.강강술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놀이로 이루어지지만 그 중에서도 원무는 보름달의 형상을 상징하여 한층 중요하다. 강강술래는 원무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사리껑자(꺽자), 덕석몰이, 청어영짝(엮자), 문열어라, 기와밟기, 가마등, 닭살이, 남생이놀아라 같은 여러 놀이가 있다. 이것을 모두 하는 것은 아니고 몇 개씩 어울려서 한 놀이를 이룬다. 하지만 놀이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은 역시 원무이다.노래는 목청 좋은 사람이 선소리[선창(先唱)]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뒷소리[합창(合唱)]로 받는다. 가사는 시집살이 노래건 베틀가건 전해 내려오는 민요나 즉흥적인 작사를 하면 후렴을 ‘강강술래’라는 합창으로 받는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의 진양조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점점 빠른 가락인 중머리, 중중머리, 잦은머리로 바뀌어가고 동작도 빨라진다. 이것을 ‘뛴다’라고 한다. 이렇게 뛰다가 지치면 쉬고, 쉬었다가 뛰고 하며 즐긴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뛰고 노는 늦은 강강술래가 잦은 강강술래로 바뀌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고사리꺾기가 시작된다.고사리꺾기는 손을 맞잡고 일렬로 서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이 다음 사람의 오른손과 맞잡은 왼손 밑으로 차례차례 꿰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덕석몰이는 일렬로 서서 가장 끝에 선 사람이,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도는 놀이다. 이렇게 몇 번이고 계속하면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는데 이때 “몰이몰이 덕석몰이 늦인늦인 뱅애몰이”라며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되풀이해서 덕석을 다 몰면 반대로 해서 풀기 시작한다. 이때에는 “벗겨라 덕석몰이 늦인늦인 뱅애몰이”라며 노래를 부른다. 덕석이 다 풀리면 다시 일렬로 서게 된다.청어엮기의 놀이방법은 고사리꺾기와 거의 같고 노래만 다를 뿐이다. 문열기놀이(문열어라)는 우선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손을 맞잡고 서 있으면, 다른 일렬로 선 사람들이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약간 구부린다. 그리고 일렬로 문을 꿰어간다. 문지기인 두 사람은 맨 끝 사람이 문 속을 꿰어 가려는 순간 손을 내민다. 그때 잡히면 문지기가 되고 문지기였던 한 사람은 맨 앞에 가서 선다. 그러나 끝 사람이 날쌔게 뛰어 나가면 다시 문지기를 해야 한다. 이때에는 “문지기야 문지기야 문열어라(여러 사람) 열쇠없어 못열겠네(문지기).”라며 노래를 부른다.기와밟기는 놀이꾼들이 허리를 굽혀 앞 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기와처럼 엮으면 맨 끝 사람이 엎드린 사람들의 등 위를 밟고 가는 놀이이다. 이렇게 하여 앞 사람들이 다 지나가면 다시 맨 끝의 사람이 올라가 밟고 지나간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놀이가 이어진다. 가마등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양팔로 가마를 만들고 그 위에 한 사람을 올려 앉히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다. 남생아 놀아라는 남생이의 흉내를 내며 노는 놀이다. 놀이꾼 중에서 춤을 잘 추고 사람들을 웃기는 몸짓을 잘 하는 두세 사람이 원 안으로 들어가서 온갖 몸짓을 하며 논다. 이때 몸짓은 곱사춤, 궁둥이춤, 아장거리는 춤 등 다양하다.닭살이는 살쾡이가 닭을 잡아가는 시늉을 하는 놀이다. 가위바위보를 하여 꼴찌가 된 사람이 살쾡이가 되고 그 다음 사람이 닭이 된다. 나머지 놀이꾼들은 손과 손을 잡고 원을 그린다. 이때 닭은 원 안에 있고 살쾡이는 원 밖에 서성이면서 닭을 잡는 것이다.강강술래가 주로 전라도에서 즐기는 놀이인 반면, 경상도에서는 이와 같은 맥락의 놀이로 월월이청청, 놋다리밟기가 있다. 또 이 놀이들이 여성원무 중심의 놀이인 반면 남자들이 원무를 중심으로 노는 놀이로 쾌지나칭칭이 있다.② 소놀이와 거북놀이: 소놀이는 멍석을 쓰고 소 모양으로 가장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즐겁게 놀아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년 기원 놀이이다.두 사람이 서로 궁둥이를 맞대고 엎드린 후 그 위에 멍석을 씌운다. 앞사람은 멍석 밑에서 잘 깎은 막대기 두 개를 내밀어 마치 뿔처럼 보이게 하고 뒷사람은 동아줄을 한 가닥 늘어뜨려 마치 쇠꼬리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 농부 한 사람이 앞에서 소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간다. 소 뒤에는 풍물패가 따르며 흥을 돋운다. 소를 앞세운 일행은 부자집을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쇠고삐를 잡은 사람이 “소가 배가 고파서 왔습니다. 여물과 뜨물을 주시오.”라고 소리치면 주인은 음식을 차려 대접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마을 사람 모두가 즐겁게 보낸다. 거북놀이는 소 대신 거북으로 가장하여 노는 것이다.소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을 하는 존재로서 생구(生口)라 할 정도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겼다. 거북은 십장생에도 등장하는 영물로서 수신(水神)과 농경신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이 놀이들은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닌다.③ 가마싸움과 원놀이: 가마싸움은 1900년대 초까지 경북 의성 지역에서 전해오던 서당 학동들의 놀이다. 추석 때 훈장이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을 비우면 놀이가 시작된다. 모처럼 글공부에서 해방된 학동들이 모여서 나무로 가마를 만들며 놀이를 만끽하는 것이다.옛날 의성에는 남부에 넷, 북부에 하나로 모두 다섯 곳의 서당이 있었다. 이 서당의 학생들이 남북으로 편을 가른 후 가마를 제작한다. 가마는 나무로 높이 1미터, 길이 1.7미터, 가로 1.2미터의 크기이며 바퀴 4개가 달려 있다. 가마 안에는 애호박을 따서 먹으로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원님이라 불렀다. 각각 선두에 사령기를 비롯한 깃발들을 선두에 세우고 공격대와 수비대의 순서로 서서 싸움을 벌인다. 힘센 공격대원들이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기를 뺏고, 가마를 발길로 차고 혼전을 벌여 가마와 가마끼리 부딪쳐 부서지는 쪽이 지는 것으로 한다. 이긴 편의 서당에서 과거 급제자가 많이 나온다고 여긴다.④ 씨름: 추석날 남자들이 힘을 자랑하는 놀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씨름이다. 씨름은 5월 단오, 음력 7월 백중에도 하지만 추석놀이로도 많이 즐긴다. 한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씨름꾼들이 체급과 나이에 상관없이 모여들면 이들을 마을의 대표 선수로 삼아 다른 마을 사람들과 겨루게 된다. 진짜 장사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도전자가 없을 때까지 겨루어 뽑는데, 이기게 되면 ‘판막음했다’고 한다. 마을과 마을의 대항인지라 그 치열함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힘겨루기는 추석 무렵 알찬 수확을 과시하는 놀이임에 틀림없다. 겨루기 싸움에서 이기는 편은 그해 혹은 이듬해의 풍년을 보장받기 때문에 씨름판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진다.⑤ 소싸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힘겨...더보기

인접국가사례, 의의

[인접국가사례]중국에서는 중추를 한식이나 단오에 비하여 그렇게 중요한 명절로 여기지는 않았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추석은 축일이 아니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세시기로 알려진 종름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도 중추나 월석이란 말은 없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중추의 행사에 대하여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월석에 대한 기록은 없다. 월병(月餠)이 중추 명절식이 된 시기가 명나라대이니 중국에서 중추를 오늘날과 같은 명절로 여긴 것은 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중국인들은 팔월 보름을 월석이라 하여 달구경을 하는 절일(節日)로 삼고 달과 관련된 시와 노래를 짓곤 했다. 그날 시식하는 절식(節食)이 중추월병(中秋月餠)인데 월병은 이름도 달떡인데다 모양 역시 달처럼 동그랗게 만든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금두꺼비와 옥토끼 무늬를 넣는다. 중국인들은 예부터 두꺼비가 달의 정령으로 토끼와 함께 달에 사는 동물로 믿어왔다. 이러한 영향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달 속에 토끼가 있다고 한다.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공유하는 문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중국의 월병은 그 맛이 달고 기름진데 특히 중추월병은 단원(團圓) 또는 원만(圓滿)의 뜻을 지닌다고 하며, 추석날 저녁에는 월병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사하는 배월랑(拜月娘)을 하고 달을 감상한다. 우리의 송편은 반달 모양으로 계속 증장(增長)과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중국인들은 월병을 각별히 좋아하는데 주나라 때 이미 병식(餠食)이 있었으며 한대(漢代)에 들어 증병, 호병(胡餠)이 보이고 원대(元代)에 월병이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중추 명절식이 된 시기는 명대(明代)로 보고 있다.[의의]추석은 정월대보름, 6월 유두, 7월 백중과 함께 보름명절이다. 보름 명절 가운데서도 정월대보름과 추석은 가장 큰 명절이다. 대보름은 신년에 처음 맞는 명절이어서 중시되는 반면 추석은 수확기가 시작되는 시기의 보름명절이어서 중시된다. 추석은 그동안 농사를 잘 하게 해준 것을 감사하는 농공감사일(農功感謝日)이며 농사의 결실을 보는 절일이다. 아울러 한해 농사의 마무리를 하는 시기로서, 또 이듬해의 풍농을 기리는 시기로서 깊은 의미가 있다.농경사회에서 보름의 만월은 농사의 풍작을 비롯하여 풍요다산을 상징하여 대단히 중시된다. 추석은 만월이 뜨는 보름날이다. 만월인 보름달은 곡물로 치면 수확 직전의 알이 꽉 찬 모습이다. 그래서 추석을 달의 명절이라 한다.곡물 농사는 싹이 돋아 만개하여 열매를 맺으면 거두어들인다. 이는 한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 순환한다. 말하자면 재생을 하는 것인데 이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달의 속성과도 같다. 초승에 소생한 달은 보름에 생명력의 극치를 보여주다가 그믐 무렵이면 소멸하고 이어서 다시 초승에 소생하여 ‘차고 기움’이라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는 죽음과 삶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곧 재생하는 속성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러한 달의 재생과 농사의 재생적인 속성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달의 형상 가운데서도 풍요를 상징하는 만월은 중요하며 만월명절은 당연히 중시된다.

추석 풍습

줄다리기

세시풍속분야- 놀이

계절- (음력1월)

날짜- 음력 1월15일(양력 2010년2월28일)

소개- 정월 대보름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던 대동놀이

다른 이름- 조리희(照里戱)줄땡기기, 줄당기기, 갈전(葛戰), 도삭(綯索), 동줄다리기, 귀줄싸움, 게줄쌈, 줄쌈, 줄싸움, 조리지희(照理之戱)

관련 정일- 대보름

[정의]정월 대보름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던 대동놀이. 줄다리기는 지역에 따라 줄당기기·줄땡기기·줄싸움·줄쌈·게줄쌈·귀줄싸움·동줄다리기와 같은 여러 이름이 존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도의 줄다리기를 조리희(照理戱)라 하였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도삭(綯索)·갈전(葛戰)·조리지희(照理之戱)와 같이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리 기록되었다. 특이한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울산 읍지인 『학성지(鶴城誌)』에는 마두희(馬頭戱)라 하여 중국 당나라의 발하희(拔河戱)를 본뜬 것이라 밝히고 있다. 요약하면 줄다리기가 전국적 용어라는 설도 있으나 서울·경기 지역의 언어가 표준어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경기 지역 방언이었던 줄다리기가 현재의 보통명사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유래]민속의 구전적(口傳的) 특성상 이러한 관습 시행의 정확한 연대 추정은 가능하지 않다. 단지 그 관행이 고서에 기록된 시점과는 무관하게 지역에 따라서는 신라(경북 자인) 혹은 백제(김제 입석) 때부터라는 구전이 존재하여 고래로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 400여 년 전(충남 기지시), 약 300여 년 전(포항·광명), 약 200년 전부터 해왔다(청도 화양)는 등 다양한 구전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 기능

[내용]{줄다리기 준비과정}줄다리기는 촌락사회에서 전래하는 마을 단위 혹은 여러 마을 단위의 세시(歲時)행사로서 두 편으로 나뉜 집단이 줄을 당겨 승패를 가르는 집단적 놀이행사를 통하여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의례적 성격을 가진 관습이며,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분포하나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 정월 대보름에 시행된다.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 성인들의 행사에 앞서 아이들의 줄다리기가 선행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즉, 설이 지나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어른들의 줄다리기를 모방하여 편을 짜고 골목길에서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를 ‘고삿줄다리기’(장흥) 혹은 ‘골목줄당기기’(화양)라 한다. 아이들의 줄다리기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성인들의 줄다리기로 이어진다. 줄다리기의 행사는 동서로 편을 갈라 시행한다. 마을 단위의 경우 특정한 경계선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기도 하고, 여러 마을을 성내(城內)와 성밖 혹은 특정한 도로나 내[川]를 경계로 하여 동서의 편을 가른다. 동 편은 숫줄을 당기는 남성 편이 되고, 서 편은 암줄의 여성 편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줄다리기는 세시풍속으로 매년 행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윤년이나 혹은 지역에 흉사가 이어지는 시기에 행하는 위기의례의 성격도 가진다.줄다리기 행사가 결정되면 양편은 각각 조직화되는데 조직 상부는 대장(편장·줄패장)과 중장(中將), 소장(小將)으로 구성되고, 애기장군이 추가되는 경우(화양)도 다. 대장은 각 편의 총책임자로 행사의 진행을 지휘·감독할 뿐 아니라, 비용 충당에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마을의 유지가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나 자원하는 경우도 많다. 중장과 소장은 줄패장을 보위하는 임무를 가지며, 애기장군의 역할은 아이를 성인줄다리기에 동참시킴으로써 차세대로의 줄다리기 전승을 위한 사회화 과정의 의미로 이해된다.이 조직 구성이 완료되면 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며 여기에 소요되는 짚은 집집마다 추렴한다.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도구는 두 개의 줄, 즉 암줄과 숫줄 그리고 두 줄을 연결하는 나무인 목나무(비녀목·고·갯목)로 이뤄진다. 줄은 볏짚으로 만들어지며 목나무는 참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줄다리기의 줄은 규모가 큰 만큼 보통 정월 초순경부터 마을에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줄은 왼새끼 꼬는 방식의 새끼 꼬기로 시작하여 그 새끼를 다시 꼬아 점차 굵게 하여 가닥줄을 만드는데, 이때는 걸개를 만들고 그 위로 새끼를 세 가치씩 엮어 꼬는 방법을 이용한다. 그리고 가닥 줄을 겹겹이 꼬아 원줄(몸줄·용줄)을 만들 때는 골목길에서 작업을 한다.원줄의 크기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으며 암줄·숫줄의 원줄 지름은 대개 지름이 1~1.5미터 정도가 되며 길이는 50여 미터에서 200~300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이 원줄의 양 옆에는 실제 줄다리기 때 사람이 잡고 당기는 줄인, 팔뚝 굵기로 수십 미터의 ‘곁줄’(종줄·새끼줄·젖줄·지네다리)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결된다. 즉, 하나의 원줄에 수십 개의 곁줄이 달리며, 원줄의 끝에는 곁줄과 같은 크기의 ‘꽁지줄(방아까치줄)’을 여러 개 달기도 한다. 원줄의 앞부분에는 구형의 ‘목줄(줄목)’을 만드는데, 수줄의 경우는 남성 성기를, 암줄의 경우는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 암줄의 목줄 안으로 숫줄이 삽입되어 비녀목으로 고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암줄의 목줄을 크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며 양쪽 모두 타원형의 모양을 가진다. 목줄과 원줄이 접합되는 곳에는 곁줄과 동일한 크기의 수염줄(시에미줄)이 여러 개 달려있다.정월 보름날은 자시(子時)에 제례(줄제)를 올리는데, 양편이 따로 서로의 줄에서 줄다리기의 승리를 기원하는 고유(告由), 양편이 함께 줄다리기 장소(줄바탕)에서 지신(地神)에게 풍농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고사(告祀)로 구분된다. 제관(祭官)은 양편의 대장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 양편은 각기 줄을 메고 줄다리기 장소로 이동하는데 여기는 중장년의 남자들이 참여한다. 줄 위에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대장이 올라타서 진두지휘를 하고 그 뒤로 중장, 소장이 보좌한다. 이때 장군기를 앞세우고 수많은 기(旗)와 창을 든 행렬이 호위하고, 여러 풍물패가 뒤따르며 마을의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응원에 참여한다.줄다리기 장소에 도착하면 양편은 줄목을 끼우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암줄의 목줄에 숫줄의 목줄을 끼우고 목나무로 고정시키는 단계 남녀 성기 삽입을 상징하는 성행위로 보아 음란한 말들이 오가며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다. 일단 줄목이 끼워지고 신호에 따라 줄당기기가 시작되면 풍물패와 양편 주민의 응원이 어우러져 한바탕 굿이 벌어진다. 승패는 한 번 당겨서 기준점을 넘어간 것으로 가리는 것이 원칙이나 세 번 당겨서 두 번 이기는 쪽의 승리로 결정하기도 한다. 고서(古書)에는 이긴 편이 풍년이 든다는 기록이 일반적이고, 구전되는 바는 서 편(여성 편), 즉 암줄을 당기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으로 말미암아 서 편이 이기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동 편이 일부러 져주는 사례는 없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동 편, 남성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특수한 사례(나주)가 없지는 않다. 승패가 결정되면 승자 편은 대장의 집으로 몰려가 잔치를 벌이고, 다음날 상복을 차려 입고 상여를 든 장송(葬送) 행렬을 이루어 진 편의 대장 집을 방문해 위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된다. 다시 말해 승패를 넘어 행사 이후 지역 화합을 위한 잔치로 줄다리기는 완결된다.[기능]편을 갈라서 하는 줄다리기를 통하여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들고 마을이 안녕하다는 믿음은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보편적 성격이고, 이는 줄다리기 행사가 기풍(祈豊)과 벽사(辟邪)로서 액(厄)막이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줄다리기 외에 여러 지역에서 산재한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점세적 편싸움 의례인 석전(石戰)·거전(拒戰)·차전(車戰)놀이 따위의 관습에서도 이긴 편에 풍년을 기약한다는 동일한 속신이 존재한다. 암줄과 숫줄이 가지는 생식기의 상징과 그 둘을 결합하여 당기는 것이 성행위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산성의 직접적 의미를 드러내고, 나아가 암줄인 서(여성)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일반적 관념도 여성의 가임성과 직결된 풍요에 대한 기구(祈求)로 분석된다. 이러한 편싸움의 형태를 빌린 관습은 자웅(雌雄)의 결연과 암줄의 승리는 모방주술적 점세(占歲)의례로서 공통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 이면에는 줄다리기의 두 편을 동과 서, 남과 여로 구분하는 것과 같이 음양사상이 내재된 것으로 여겨진다.줄다리기의 사회적 기능은 조직의 구성과 행사 진행 과정에서 찾아진다. 농경의례의 목표는 생산과 직결되고 그것은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담보하는 관습적 행위로서 주민 참여의 강제성 부여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관념적 표상은 실제 줄다리기 행사의 전 과정에서 사회 통합의 원리를 제공하는 기초로 작용한다. 줄의 재료가 되는 짚의 추렴에서 시작하여 줄을 만드는 작업에서의 협동심과 줄을 당기는 행사에서 가지는 응집력을 통해서 양편의 주민은 결속을 다지게 된다. 이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 주민의 심리적 일체감을 자극하여 지역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비록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지만, 행사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줄다리기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어느 편이든 풍년 기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이 행사의 의의는 마을 주민의 단결심을 통한 지역정체성 고취...더보기

 

반보기

세시풍속분야 의례

계절 가을(음력8월)

날짜 음력 8월15일경(양력 2010년9월22일)

소개 8월 추석 이후 농한기에 여성들이 일가친척이나 친정집 가족들과 양쪽 집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풍속.

속담 처가와 변소는 멀어야 좋다

다른 이름 중로보기(中路-)근친(覲親), 중로상봉(中路相逢)

관련 정일 추석(秋夕)

[정의]8월 추석 이후 농한기에 여성들이 일가친척이나 친정집 가족들과 양쪽 집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풍속. 원래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만남이 기원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반보기가 있다. 지역에 따라 중로보기(中路-), 중로상봉(中路相逢) 같은 한자식 용어를 사용한다. 용어에서 짐작되듯 당일치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 경우 부득이 양쪽 집의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가 다시 그날 안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애틋한 풍속이다.[내용]“처가와 변소는 멀어야 좋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녀를 불문하고 사돈 간의 교류가 거의 없던 전통사회에서 상호 방문 혹은 왕래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또한 여성의 외출이 금기시되었던 전통사회에서 며느리의 외출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전통사회에서 가사와 농업 노동을 병행했던 며느리들이 며칠씩 집을 비우기는 쉽지 않았다. 농번기의 외출은 더더욱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남자들은 다양한 외부 일로 사돈 간의 상호 교류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여자들은 한 번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했을 정도로 평상시 친정과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번기를 벗어나는 추석 무렵이 되면 하루 정도 짬을 내어 외출하는 것이 묵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룻밤 묵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가 멀 경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반보기로 보인다. 약속한 날짜에 양쪽 집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그날 돌아오는 당일치기의 만남이었던 것이다.반보기를 할 때는 특별한 음식을 가지고 가서 회식하고 환담하며 하루를 즐긴다. 사돈 간의 관계가 돈독한 집안에서는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뿐만 아니라 사돈 부인들이 함께 만나는 경우도 많았고, 동년배들이 함께 참석하여 흥을 돋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보기는 딸과 친정어머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돈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모녀 간의 상봉과 회포풀기가 사돈 간의 교류, 동년배 간의 교류, 지역 간의 공동체 교류로까지 이어지는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보기는 그리움의 해소라는 측면을 넘어서서 공동체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기능과 특성이 있었다.반보기는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비밀스런 만남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안사돈 간의 교류를 돈독히 하는 기제로 발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연비연사(聯臂聯査)’, ‘사돈관계가 연 걸리듯 한다.’, ‘겹사돈’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같은 지역에서 시집온 여자들이 많아 서로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반보기를 할 때면 이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단체 유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즉 좋은 날과 장소를 택하여 서로 음식을 장만하여 각종 놀이를 하면서 야외에서 하루를 보내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 것이다. 전남 강진이나 송덕에서 매년 추석 무렵 이웃 마을과 함께 큰 방죽가에서 회식을 하고 강강술래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는 야유회로 발전된 것이 좋은 예다.최근에는 사돈 간의 왕래가 자유로워지고 며느리의 친정 나들이가 용인되는 데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더 이상 반보기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아울러 추석이 사흘 간의 연휴로 정착됨에 따라 추석 차례라든가 시댁의 중요한 일을 마치면 친정에 다니러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자리 잡으면서 며느리의 친정나들이가 반보기를 대신하게 되었다.또한 일가친척의 동년배나 같은 지역을 친정으로 하는 부인들의 모임으로서 반보기의 기능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른바 같은 지역과 집안을 친정으로 하는 부인들이 만든 ‘딸네들 모임’이 그것이다. 이는 친정과 시댁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년 일회의 모임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모임은 성별(性別)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향우회의 형태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같은 지역을 친정으로 하는 딸네들’이라는 구분이 있기 때문에 반보기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에서 자랐거나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혼인으로 인해 타지로 흩어진 동창생들의 모임을 위한 반보기가 있다. 혼인으로 인한 거주지 이동으로 쉽게 만나지 못하게 되자 서로의 중간 지점이나 교통의 요지를 택하여 만나는 반보기 형태도 등장하였는데, 이른바 동년배 모임이 그러한 것들이다. 동년배 모임은 중간 지점이라는 측면도 강하지만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를 만남의 장소로 하는 경우도 있어 동창회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반보기의 변형으로 봐야 할 것이다.이렇듯 모임화된 반보기는 교통의 발달로 인해 만나는 장소가 굳이 양가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경치 좋은 야외나 유원지로 변화하였고, 심지어는 관광으로 발달하기도 하였다. 시기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반보기는 친구들의 모임을 위한 하나의 구실이 되었고 공동체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소싸움

세시풍속분야- 놀이

계절- 가을(음력8월)

소개- 두 마리 황소를 맞붙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관련 정일- 추석(秋夕)

[정의]두 마리 황소를 맞붙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소를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에서 소싸움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임시로 벌이는 소싸움이 아니라 두 마을 또는 여러 마을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소를 끌고 나와 연례적으로 벌인 소싸움은 경상남도 일원과 경상북도 청도 지역 등 이른바 가야문화권에서만 전승되어 있다.[내용]연례적으로 벌어진 놀이로서 소싸움은 주로 추석(秋夕) 무렵에 행해졌다. “정월 씨름, 팔월 소싸움”이라는 경북 청도 지역의 향언(鄕言)은 이를 말해준다. 이 시기는 수도재배의 힘든 노동이 일단락되는 농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한 일꾼들이 주도한 놀이가 바로 소싸움이었다. 현재까지도 소싸움이 강성한 경남 진주 지역에서 “소싸움 날은 상머슴의 날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추석이 되면 인접한 두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소싸움 이야기가 나오고 각 마을에서는 싸움에 나설 소를 가린다. 싸움소는 평소 초동(樵童)들의 소싸움 등을 통해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소로서, 싸움에 대비하여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 장소는 통상 두 마을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개천이나 논밭이다. 개천에서 싸울 경우,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개천 둑에서 응원한다. 소싸움에 참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 싸움을 자기 마을의 위신이 걸린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소싸움의 사례이다.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대 현리의 소싸움을 보면, 인접한 두 마을인 봉기리와 현리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매년 추석 뒷날이나 그 다음 날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싸움을 벌였다. 각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황소 한 마리씩 출전하는데 소의 목에는 적·청·황의 세 천을 엮은 ‘이남기(끈)’를 둘러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싸움터에 나가며 이때 풍물패를 꾸려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였다. 워낙 싸움이 거칠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망라한 마을사람들은 개울의 둑 위에서 열렬히 응원하였고,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소를 몰고 나온 머슴이나 소 주인은 싸움소를 따라 움직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승부는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먼저 도망가는 쪽이 패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대개 단판으로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패한 마을에서 다른 소를 끌고 나와서 이긴 마을의 소와 한 번 더 싸움을 붙인 적도 있다. 이 싸움에는 어떤 상품도 걸려 있지 않으며, ‘싱벽[勝負慾]’과 마을의 ‘세도’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머슴이 소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며 소의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인접한 두 마을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근동(近洞), 혹은 관내의 다수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역시 추석 무렵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경남 의령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적어도 수십 개 마을의 소들이 출전하고 난장이 서는 대규모 소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09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晉陽雜詠) 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을 평하기를 “당지(當地)의 투우(鬪牛)가 심히 성하여 천백(千百)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라고 한 것도, ‘수무바다’라고 일컫던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소싸움을 본 소감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마을의 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싸움의 사례이다.경북 의령의 소싸움을 보면, 소싸움은 바쁜 논농사일이 한풀 끝난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행해졌다. 싸움은 넓은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이루어졌는데, 의령읍의 남산천과 정암진의 모래사장, 가례면의 한내변, 유곡면의 세간천변, 부림천변 등이 소싸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싸움의 장소가 정해지면 음식장사들이 미리 몰려들어 일대 난장을 이룬다. 고삐와 코뚜레를 푼 싸움소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머슴이나 주인에게 이끌려 싸움터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자기편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격려와 쓰다듬을 받는다. 싸움터에 나간 싸움소가 잠깐 동안 상대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급소를 공격해 들어가면 모래사장, 혹은 풀밭은 격투장으로 변한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소들은 ‘뿔걸이’, ‘옆목치기’, ‘들치기’ 등의 공격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밀어붙인다. 이때 주인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받아라’, ‘찍어라’, ‘이러이러’ 하고 외치면서 소를 독려한다. 약한 쪽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날 때까지는 보통 몇 분이 소요되지만 길게는 수십 분이 소요될 경우도 있다. 싸움의 결과는 소의 동작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달아날 방향을 찾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거나 꼬리를 흔들고, 뒷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싸거나 입에 흰 거품을 내뿜으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표시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목과 뿔을 비단과 들꽃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소등에는 상머슴이나 주인이 올라타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풍물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들어오면 소의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를 즐긴다.이와 같이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즉 청도의 풍각면이나 이서면처럼 이름난 우시장을 중심으로 면 관내의 각 마을들이 참여하던 소싸움이나 의령, 진주, 김해 등지에서 행해진 고을 규모의 초대형 소싸움이 역사상 어떠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퍼짐으로써 집약적인 노동력 투입이 요청되고 그에 따라 두레 등의 협업관행이 활성화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집락(集落)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축력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조선 후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처럼 범공동체적인 소싸움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다음은 소싸움의 주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마을 간의 소싸움일 경우, 싸움에 참여하는 각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공인된 소를 싸움소로 내세운 점, 그 소가 지게 되면 마을의 다른 소를 데리고 와서라도 이기려고 했다는 점, 풍물패가 함께 했다는 점, 소싸움을 마을 간의 ‘세도(세력)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기 마을 소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소싸움이 단순히 소 주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소가 속해 있는 마을 간의 싸움이었음을 말해 준다.이와 같은 성격은 여러 마을들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싸움에 참여하는 소가 있으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그 소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서 열렬히 응원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싸움에 참여한다. 마을 사람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접적이다. 자기 마을의 소가 불리하면 상대편 소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소싸움판은 난장판이 되게 마련이다. “센 소도 그 마을의 세력이 없으면 진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싸움이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소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며 함께 돌아온다. 승리하였을 경우 마을은 온통 잔치판이 되고 대개 부농인 소 주인은 음주가무가 따르는 뒤풀이를 주선하게 마련이다.이처럼 각 수준의 소싸움이 공동체의 참여와 후원 아래 행해졌고, 그 승패를 마을의...더보기

 

고사리꺾기

세시풍속분야- 놀이

계절- 가을(음력8월)

소개- 고사리를 꺾는 행위를 모사(模寫)하여 만든 놀이. 고사리꺾기는 여흥놀이로 노는 가무놀이의 일종으로, 강강술래에 포함된다

풍속- 강강술래

다른 이름- 고사리껑기, 고사리따기, 달넘기, 담넘는놀이, 고사리껑자

관련 정일- 추석(秋夕)

[정의]고사리를 꺾는 행위를 모사(模寫)하여 만든 놀이. 고사리꺾기는 여흥놀이로 노는 가무놀이의 일종으로, 강강술래에 포함된다. 유사한 명칭으로는 고사리껑기, 고사리따기, 달넘기, 담넘는놀이, 고사리껑자, 고사리꺾자 등이 있다.[유래]고사리꺾기 놀이는 산에서 고사리를 꺾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꿇어 앉아 선두가 일어나서 각 사람들의 팔 위를 넘어가면, 차례대로 손을 놓으면서 원무(圓舞)를 진행시키는 놀이다. 꿇어앉은 모습은 고사리를 흉내낸 것이며, 차례로 팔 위를 넘어가는 것은 고사리를 하나씩 꺾어가는 모양을 흉내낸 것이다. 넘을 때는 실수한 척 옆 사람을 건드리기도 한다.강강술래 속에 포함되어 연행되기 때문에 강강술래의 일부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강술래 자체가 여러 가지 놀이들을 모아서 구성한 놀이인 까닭에, 원무라는 광의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면과 놀이의 유형이라는 협의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면이 다르다고 하겠다.사실 고대의 강강술래가 복합적 기능을 가진 종합적 놀이임에는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유형의 놀이들을 통해서 연행되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대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와 『양서(梁書)』 「열전(列傳)」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이 기록들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뒤를 따르며 높이 뛴다는 점, 손을 잡고 높이 뛴다는 점, 원무 형식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점, 남녀가 서로 유인할 수 있는 일정한 놀이 형태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나 이 놀이의 형태를 오늘의 고사리꺾기 같은 놀이에 직접 대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현 상황에 맞춘 확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고대의 강강술래 형태가 원무 형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녀가 유인하는 어떤 형태의 놀이가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점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따라서 고사리꺾기가 강강술래의 여흥놀이라는 점 때문에 강강술래의 유래설에 빗대어 얘기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며, 다만 고사리꺾기를 비롯한 강강술래의 여흥놀이들이 일정한 시점 이후부터 행해져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조선의 향토오락(朝鮮의 鄕土娛樂)』에 따르면, 충북 음성에서는 강강술래가 따로 있고 고개 넘기, 동아따기, 고사리따기, 닭잡이, 덕석말이, 남대문 같은 놀이가 연행되고 있고, 전남 해남의 경우도 강강술래 외에, 기와밟기, 고사리따기, 덕석말이, 청어영기 같은 놀이가 연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노래는 자진모리 또는 빠른 중중모리 장단으로 부른다. ‘남생아 놀아라’를 부르며 놀다가 설소리꾼이 “고사리 대사리 껑자 나무 대사리 껑자”를 부르면 다른 놀이꾼들은 “유자콩콩 재미나 넘자 아장 장장 벌이요.”로 받아 부르면서 원무 형태 그대로 앉아 어깨만 들썩 움직인다. 그러면 선두가 일어서서 노랫가락에 맞추어 왼쪽으로 돌아 다음 사람과 맞잡은 팔 위를 넘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계속 넘어간다. 인원이 많을 때는 군데군데 끊어서 동시에 넘을 수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한 사람씩 끝까지 넘고 나면 다시 둥근 원(圓)이 된다.[지역사례]고사리꺾기는 광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든 협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든 강강술래의 여흥놀이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이 놀이는 강강술래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므로, 강강술래가 연행되는 모든 지역에서 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의 향토오락』의 기록에 의하면, 강강술래와 꼭 연관 짓지 않더라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물론 동일한 놀이의 명칭이라고 하더라도 놀이 형태가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원무형이라는 광의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에도, 이름이 강강술래라고 해서 동일한 강강술래인 것은 아니다. 『조선의 향토오락』에서 전북 정읍의 강강술래는 강강술래와 제목은 같지만, 세 사람이 한편이 되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한 사람이 그 위에 타고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때 탄 사람은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강강술래 놀이와 차이가 있다.유형별 놀이라는 협의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에도, 전북 남원의 고사리따기는 고사리꺾기와 제목은 유사하지만, 두 사람이 양손을 잡고 양쪽 발끝을 축으로 해서 “고사리 캐자 끽끽 여기도 저기도 많이 있구나”라고 노래 부르며 빙빙 도는 놀이이므로 오히려 오늘의 ‘남생아 놀아라’ 놀이의 한 부분과 흡사하다. 경북 선산의 고사리따기는 고사리꺾기와 이름이 유사하지만, 산놀이를 한 후 고사리를 뜯는 것으로 일종의 화전놀이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강강술래하고는 상관이 없다. 경남의 의령, 함안, 밀양, 함양, 거창과 황해도 평산의 고사리따기도 대개 봄과 여름철에 여자와 농부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봐서 경북 선산의 경우처럼 화전놀이형 고사리따기로 판단된다. 서남해 도서 지역에서 불리는 고사리꺾기의 대표적인 가사는 다음과 같다.고사리 대사리 껑자 나무 대사리 껑자유자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장장 벌이요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한라산 고사리 껑꺼다가 우리 아배 반찬하세껑자 껑자 망부 대사리 껑자고사리 껑꺼 바구리 담고 아산이나 넘자껑자 껑자 망부 대사리 껑자송쿠 껑꺼 웃짐 영고 태산이나 넘자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수양산 고사리 껑꺼다가 선영봉대를 하여 보세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수양산 고사리 껑꺼다가 우리아베 반찬하세

 

강강술래

세시풍속분야- 놀이

계절- 가을(음력8월)

날짜 음력 8월15일(양력 2010년9월22일)

문화재 중요무형 문화재 8(1966)

소개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호남 지역에서 널리 놀았던 여성 집단놀이.

관련 정일 추석(秋夕)대보름

[정의]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호남 지역에서 널리 놀았던 여성 집단놀이. 현재는 전국적으로 이 놀이가 확산되어 굳이 호남 지역의 민속놀이라기보다는 전국화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강술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놀이로서 가장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율동미가 넘치는 민속놀이요 민속춤이요 또한 민요이다. 가무악(歌舞樂)이 일체화된 강강술래는 주로 추석날 밤에 행해지며,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대보름 밤에 하기도 한다. 1966년 2월 15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유래]강강술래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이 전술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구전이 있는가 하면 민간어원적으로 해석해서 오랑캐 또는 왜구의 내침(來侵)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강강술래는 전승 현장에 따라 강강수월래, 광광술래, 광광수월래로도 부르는데, 그 중 강강수월래라고 부르는 것을 취해서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으로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라고 풀이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한문의 기본적인 문법마저도 어기는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강강월수래(强羌越水來)가 아닌 다음에는 믿을 바가 못 되는 것이다. 또는 고대의 국중대회나 마한의 농공시필기에 집단적으로 추었던 원시가무(原始歌舞, allad dance)와 연계시키기도 하고, 생성과 번식을 위한 짝짓기의 구혼 행위로서 남녀가 공동으로 연희하는 공동의례의 굿판에서 추는 춤이라는 사람도 있다.대개 민속은 자연발생적이거나 또는 문화 전파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연대기적 편년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오랜 전승 과정을 겪는 사이, 기능이나 성격의 복합 또는 굴절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발생론적 기원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내용]강강술래는 전승 지역으로 보면 호남 일원이요, 연행 시기로 보면 8월 한가위가 일반적이며, 연행 주체는 주로 마을의 여자들이다. 호남 일원에서 줄다리기가 주로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것에 반해 강강술래는 추석의 대표적인 놀이인 셈이다. 때로는 정월대보름에 강강술래를 하기도 하지만, 한가위만큼은 아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남자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춤은 노래에 맞춰 율동적으로 추는데 늦은강강술래, 중강강술래, 잦은강강술래로 나뉜다. 이는 노래나 춤의 빠르기에 따른 분류이기도 하지만, 한편 진행의 순서로 볼 수도 있다. 동산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마을의 넓은 마당으로 모인 여자들이 느린 가락에 맞춰 늦은강강술래를 추다가 흥이 점점 더해감에 따라 속도가 빨라져서 마침내 잦은강강술래로 이어진다.그러나 강강술래는 윤무(輪舞) 형태 말고도 많은 부수적인 놀이와 노래가 있다. 따라서 강강술래는 협의와 광의의 강강술래로 나눌 수 있다. 강강술래라는 무요(舞謠)에 맞춰 여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려 돌며 추는 춤은 협의의 강강술래요, 여기에 부수된 여러 가지 놀이가 첨가되어 광의의 강강술래가 된다. 원래의 강강술래는 구성진 가락의 노래와 손과 손을 잡고 뛰고 춤추며 판을 빙빙 도는 원무였다.강강술래는 1961년, 1964년, 1965년, 1966년에 연이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했으나 큰 상을 받지 못하였다. 1966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고 그 후 1975년에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1976년에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1966년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당시에는 원무가 기본이고 구성진 노래를 몇 시간을 불러도 흥이 나서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였다. 추수도 거의 끝이 나고 춥지도 덥지도 아니하며 달이 휘영청 밝았으니, 저절로 흥이 솟고 신바람이 나서 밤이 깊어가는 것을 잊고 순수하고 소박하게 놀 수 있었다.1975년과 1976년에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면서부터 강강술래 놀이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경연대회는 입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수식하고 과장하게 된다. 강강술래도 연출을 맡은 유능한 지도자에 의해서 첨가 과장하여 화려하게 꾸며졌다. 원래는 원무가 주이던 것이 남생이놀이,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지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쥐새끼놀이, 가마등,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수건돌리기, 발치기, 외따기, 춘향각시놀이 같은 여성들이 하는 놀이를 모두 참여시켜 놀이의 종합체를 만들었다.지금까지 강강술래의 많은 사례가 보고되었다. 가락과 놀이도 그렇지만, 강강술래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불렀던 노래인 만큼 민중의 애창시로서 그 가사 속에는 민중의 삶에서 빚어질 수 있는 온갖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용해되어 있다. 그 노래 가사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님성님 사촌성님, 강강술래, 시집살이 어떱디까, 강강술래, 고초장초 맵다해도, 강강술래, 시집살이 더맵더라, 강강술래.” 이처럼 선후창의 형태로 한 사람이 설소리(앞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이 매김소리(뒷소리)를 받는 형식으로 춤과 더불어 불리게 된다.전승되어온 일정한 가사도 있지만, 놀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지어 불리는 가사도 있다. 곡의 빠르고 늦음이 있을 수 있지만, 시적 형식은 이것만이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지만 가사는 계속 바꿔 부르기 때문에 단조로움에서 벗어난다. 곡과 그 형식은 고정적인 데 반해서 가사는 가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고정소와 가변소가 한 틀을 이루면서 강강술래를 지탱하는 문예적 형식미를 완성하고 있다.한편 강강술래는 여성의 민속놀이나 단순한 민요의 차원에서만 놀고 불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넓은 지역에 걸쳐서 정기적으로 연행되었던 것은 나름대로 심층적 의미와 기능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강강술래를 지탱해온 그 원형적 심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강강술래를 구성하고 있는 내외적인 상황적 문맥과 요소들을 분석적으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강강술래와 관련되는 제반 요소를 추출하면 추석, 보름달, 밤, 부녀자, 윤무, 집단 등이 있다.첫째, 추석의 세시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풍년감사절이라는 것이다. 정월대보름이 농경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추석은 수확의 시작이라 하겠다. 농사가 시작되는 정월대보름에 농경과 밀접한 놀이로 줄다리기를 한 것과 대칭선상에서 8월 한가윗날 밤에는 강강술래를 한다. 대보름에 하는 줄다리기가 기풍(祈豊)을 목적으로 한다면, 추석에 하는 강강술래는 분명 기풍(祈豊)을 위한 것으로 보겠다. 추석을 즈음하여 수확되는 것은 주곡(主穀)인 쌀이다. 따라서 벼농사가 많은 호남 지역에서 추석은 가장 큰 명절이며 추석 행사로 노는 강강술래는 벼농사와 관련된 세시놀이임을 알 수 있다.둘째, 달은 생성력을 상징하는 구상물이며, 신화 원형의 하나이다. 더구나 보름달은 가장 왕성한 기운을 가졌다. 특히 태음력을 농사력으로 사용해온 우리 민족은 농사와 관련된 명절로 보름을 중시하였다. 정월대보름은 말할 것도 없고, 6월 보름인 유두와 7월 보름인 백중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8월 보름인 추석이 역시 농사와 직결된다.셋째, 밤은 낮과 구별되는 시간대이다. 낮이 세속적인 시간대라면 밤은 성스러운 시간대요, 낮이 남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여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낮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밤은 신들의 시간이다. 보름달이 훤히 밝은 가을밤, 밤하늘에 울려퍼지는 강강술래 소리가 맑고 곱다. 밤은 추(醜)를 감추고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신들이 나와 활동하고 세속보다는 성스럽고 신비감 넘치는 밤무대에서 추는 강강술래는 여성적 아름다움을 극치로 몰고 가는 한편 금빛 달을 닮아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저 들녘의 나락을 한껏 영글게 할 수 있는 주문과도 같다.넷째, 부녀자는 생산의 기능을 가졌다. 여자와 생산의 관계는 특히 농경민족에게는 절대적이다. 세속적으로는 재수가 없고, 부정을 탈 수 있어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농경문화의 종교주술적 믿음 체계 속에서 여성은 생산성을 가진 존재로 우대된다. 아기를 낳는다는 생산성이 농경의 생산성과 유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음력 8월 한가위가 절일로 이야기된 것은 신라에 와서부터이다. 신라 3대 유리이사금 때 궁성의 여자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한 달간 길쌈을 해서 한가위 때 승패를 가리는 행사가 있었다. 여성 위주의 놀이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추석과 여성의 상관성이 이미 신라시대의 한 세시풍속에서 찾아지는 예다.다섯째, 윤무(輪舞)는 원형을 그리며 춤추는 것으로, 달을 모방한 주술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유감주술의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모방적이거나 유사해야 한다. 알곡은 크고 둥글수록 알찬 것이며 풍요다산으로 이어진다. 추석과 알곡 그리고 풍요다산을 이어주는 기하학적 원리는 원형이다. 알곡과 같은 구체물이든, 추석의 밤하늘에 뜬 둥근 보름달이든, 소망을 담은 풍요다산이든 모두 둥근 원으로 관통된다.여섯째, 집단은 개별자의 집합이지만, 전체가 하나이기도 하다. 마치 구슬이 하나하나 따로 있지만 꿰어놓으면 하나의 목걸이인 것과 같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하여 “여러 사람의 한 목소리는 쇠도 녹인다.”라는 말이 있다. 강력한 에너지를 뜻하는 것이다.

 

 

씨름

세시풍속분야- 놀이

계절- 여름(음력5월5일)

소개- 두 사람이 맞잡고 힘과 기술을 부리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

다른 이름- 력(角力), 각저(角觝, 角抵), 각희(角戱), 상박(相撲)

[정의] 두 사람이 맞잡고 힘과 기술을 부리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 경기 방식에 따라 선씨름, 띠씨름, 바씨름, 왼씨름, 오른씨름이 있다. 선씨름은 서서 하는 씨름이며, 띠씨름은 허리에 두른 띠를 두 손으로 잡고 하는 씨름이고, 바씨름은 오른팔과 다리에 샅바를 감고 겨루는 씨름이다. 왼씨름은 샅바를 오른쪽 넓적다리에 매고 상대방이 이를 왼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고, 오른씨름은 왼다리에 맨 샅바를 상대가 오른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다. 씨름의 주체에 따라 구분하면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이 있는데, 애기씨름은 어린이들의 씨름이고, 중씨름은 젊은이들의 씨름이며, 상씨름은 어른들의 씨름이다. 씨름은 주로 남자들끼리 벌이는 경기지만, 여자들끼리 벌이는 경우도 있다.[어원] 씨름은 각력(角力), 각저(角觝, 角抵), 각희(角戱), 상박(相撲)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한자 용어가 반드시 한국의 씨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문헌에 따라서 중국의 씨름 혹은 씨름과 유사한 경기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특히 상박(相撲)은 일본의 스모[相撲]와 표기가 같다.씨름의 어원은 ‘서로 버티어 겨루다’의 뜻을 가진 경상도 방언 ‘씨루다’가 명사화하여 ‘씨름’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씨름 경기는 일상적으로 벌이기도 하고, 명절에 벌이기도 한다. 명절 중에서는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추석에 씨름 경기를 벌인다.

[내용] {씨름의 역사} 우리나라 씨름의 기원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는 아직 없다. 원시사회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짐승들과 혹은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맨몸으로 싸워야 했다. 맨몸으로 싸워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또 패권을 잡을 수 있었기에 원시사회 사람들은 적대자와 맨몸으로 싸우는 기술을 익혔을 것이고, 그 기술을 점차 발달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맨몸으로 싸워서 이기려는 소망은 자연스럽게 원시종교에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제의(祭儀)에 맨몸으로 싸우는 행위가 포함되었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놀이로 변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리가 타당하다면 이것은 온 인류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상황이라 하겠다. 오늘날 비록 경기 방법은 다르지만, 씨름과 비슷한 경기는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각 민족과 국가 나름대로 고유한 양식의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씨름은 널리 분포되어 있고, 그 기원은 인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씨름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기는 어렵다. 유물 자료에 따르면,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씨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 유적에서 씨름 장면이 새겨진 청동 제품이 나왔는데, 이 청동 제품의 제작 연대가 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이집트의 씨름 장면 벽화는 기원전 500년 무렵에 제작된 것이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그리스 최고(最古)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에 씨름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동양의 경우,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씨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송(宋)나라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紀原)』 9권에 씨름은 육국시대(전국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기록(角抵昔六 國時所造)이 있다. 우리나라 씨름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고구려 고분 벽화이다. 4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의 씨름무덤[角抵塚]에 씨름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안칸[玄室] 오른쪽 벽에 있는 이 그림은 큰 나무 오른쪽 밑에서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씨름을 하고 있고, 그 옆에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하게 서서 심판을 보고 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네 마리의 까치(혹은 까마귀)는 씨름 경기를 주시하듯 목을 길게 뽑고 있다. 두 사람은 웃통을 벗고 몽골식 짧은 바지만 입고 있으며, 상대방의 허리를 서로 잡고 있다. 나무 왼쪽에는 부엌과 여인이 있다. 여인은 상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다. 안칸 왼쪽 벽에는 나무, 수레, 말, 마부가 그려져 있으며, 천장에는 해, 달, 별, 불꽃무늬, 초롱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서 고구려시대에 이미 씨름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씨름의 기원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이 벽화에서 심판, 씨름하는 자세, 나무,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씨름에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시대에 이미 씨름은 정밀한 규칙을 가진 경기였음을 알 수 있다. 씨름하는 자세로 보아 두 사람은 띠씨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샅바를 매지도 않았고, 상대방의 넓적다리를 잡고 있지도 않으며,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있다. 샅바씨름은 후세에 발달한 경기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나무를 특히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이 나무는 신목(神木)이다. 이들은 신성한 장소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씨름은 제의 성격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 신목 왼쪽에 있는 부엌도 제의를 준비하는 부엌이고, 신목 오른쪽 아래에 놓인 그릇도 제의에서 사용하는 그릇일 수 있다. 그런데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은 서로 다르다. 코가 동그랗고 턱이 짧은 오른쪽 사람은 낯설게 보이지 않는데,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나 왼쪽 사람은 눈이 깊고 크며 코가 유난히 큰데, 심목고비(深目高鼻)로 표현되는 서역인의 모습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무덤 속에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죽은 사람을 서왕모(西王母)의 세계로 보내려는 염원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서역인과 씨름해서 이겨야 불사(不死)의 세계인 서왕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그림 맞은편 벽에 그려져 있는 말, 수레, 마부는 그를 태우고 서왕모가 있는 서역으로 가기 위한 것이고, 천장에 그려져 있는 해, 달, 별, 불꽃무늬, 초롱무늬는 이상세계로서의 서왕모 세계의 모습이다. 고구려의 씨름무덤과 관련해서 중국 섬서성 서안시 장안현의 객성장(客省庄) 4호 무덤에서 출토된 장방형 동패(銅牌)가 있다. 전국시대(기원전 476~221)의 유물이라는 이것은 죽은 사람의 허리띠에 박힌 장식품인데, 여기에 씨름하는 장면이 투각(透刻)되어 있다. 양쪽에 나무가 대칭으로 서 있고, 그 나무 아래에 안장이 달린 말이 각각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두 남자가 맞붙어 씨름을 하고 있다. 나무, 말, 씨름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맞잡고 씨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씨름무덤의 벽화와 같다. 고구려 씨름무덤(4세기초)보다 5세기 내지 7세기 이전이다. 그런데 이 동패에 묘사되어 있는 씨름 모습은 중국 전역에 통용된 모습이 아니라, 중국 북방 지역의 흉노족 사이에서 성행하던 씨름 모습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 방법으로 보아 한국의 씨름은 흉노족의 각저와 유사하고, 일본의 스모는 중국의 각저와 유사하다. 한국의 씨름은 흉노족의 각저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5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장천(長川) 제1호 무덤에도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실 왼쪽 벽에 야외 놀이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 씨름이 포함되어 있다. 박쥐양산을 받쳐 든 시중꾼, 마부와 말, 개, 하인을 거느린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큰 나무 아래에 서 있고, 그 주위에 교예를 노는 사람, 씨름을 하는 사람, 북을 치는 사람, 현금을 타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고구려시대에 씨름이 기악백희(伎樂百戱)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씨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高麗史)』(1454)부터이다. 충숙왕(忠肅王)은 국사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매일 아랫사람들과 씨름에 열중하여 위아래 예절이 없었다. 충혜왕(忠惠王)은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구경하였고, 공주가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주연을 베풀어 위로해 주고, 밤에는 씨름놀이를 함께 구경하였으며, 고용보(高龍普)와 함께 시가지의 누(樓)에 가서 격구(擊毬)와 씨름놀이를 구경하고, 용사들에게 많은 베를 상으로 주었다. 고려시대에 씨름은 상류계층에서 즐기는 큰 구경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서민들도 씨름을 즐겼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씨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세종(世宗)은 상왕(上王)과 함께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뱃놀이를 하고, 강변에서 씨름 구경을 하기도 하였고, 경회루 북쪽에 좌정하여 종친들의 활쏘기를 구경하고, 안사의(安思義) 같은 역사(力士)들에게 씨름을 하도록 하고, 차등을 두어 상을 주기도 하였다. 안사의는 역사로서 갑사(甲士)에 뽑혀 부사직(副司直)에 오른 사람이다. 김이(金彛) 또한 이름난 역사였는데, 그는 정원서리(政院書吏)였다. 왕이 강원도 철원에 사냥갔다가 안사의와 김이를 불러서 씨름을 하게 하고, 김이가 이기자 곧 갑사로 삼고 궁중에서 쓰는 말을 상으로 준 일도 있다. 또한 외국에서 온 사신...더보기

 

송편(松餠)

세시풍속분야- 절식

계절- 가을(음력8월)

날짜- 음력 8월15일(양력 2010년9월22일)

소개- 멥쌀가루를 익반죽하고 풋콩, 깨, 밤 같은 소를 넣어 반달 모양으로 빚어서 시루에 솔잎을 켜켜로 놓고 찐 떡

다른 이름- 송병(松餠), 송엽병(松葉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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