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득도 합시다.
야고보 아저씨추천 0조회 726.06.13 20:24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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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 2026년 6월 14일 주일 연중 제11주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6-10,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 모두 득도합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道)라는 말을 잘합니다. 득도(得道)한다고 하기도 하고, 도통(道通)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최고의 도사(道士)라고 하기도 합니다. 도(道)라는 말은 원래는 ‘인생의 여로’라는 ‘길’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거기에 추상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 등의 의미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특히, 동양의 여러 종교에서는 이 도를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에 철학·문학·사상·예술·문화 등 동양의 여러 정신적·물질적인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고,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인물에 따라 각각 상이하게 설명되어 왔습니다. 유교에서는 특히 도의 도덕적 면을 강조하여 일종의 생활규범, 인간의 가치기준 등의 핵심 규범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하는 원시유교에서부터 주자학(朱子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이 도의 기준은 윤리적 측면에서 논구(論究)되어 왔습니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서도 도는 종교적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면서 우주만유의 본체이면서 형태 지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재(實在)로서의 도를 주창하였습니다. 인생의 모든 행위와 자연계의 섭리는 모두 도 아닌 것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얼마나 그 도에 가까운가?’로 됨됨이를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불교의 경우 진리(Dharma) 자체를 도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 등에서 설명하는 도(道, Marg)는 ‘올바름’·‘당위(當爲)’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세 종교에서 도는 각각 다른 면을 강조하지만, 공통되는 점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도에서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즉, 사람이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서 절대불변의 입장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점입니다. 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진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문화의 바탕은 이 도를 시발과 종착역으로 삼았고,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자연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인 삶을 존경했으며, 그와 같은 삶의 여로를 통한 진리를 찾아 얻는 것이 값진 일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사상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공자의 사상은 도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천도(天道)에 대해서 강력한 주장을 편 바 있습니다. 즉, 인도(人道)는 천명(天命)에 따르는 것이며, 천도는 인도를 이끄는 진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논어에서는 그 인도를 다시 세분하여 왕의 길(王之道), 군자의 길(君子之道), 아버지의 길(父之道)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여러 도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인(仁)이라는 것입니다. 인(仁)이란 개인적으로 보면 자아의 완성이지만, 외면적으로 말하면 사회 구제(社會救濟)인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도 바로 그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도를 회복함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이상적인 도의 방법은 덕(德)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덕이란 도의 현현체(顯現體)일 뿐 아니라, 가장 두드러진 작용의 하나입니다. 이 덕은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인륜(人倫)의 실천 또는 불륜(不倫)을 극복하는 행위이지만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가져다주는 실천행(實踐行)이 될 수 있으며, 앞서 말한 인격도야와 사회 구제가 가능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덕은 도의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도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실재적으로 확립시키고 있으며, 도의 개념과 여러 덕목의 본질적 의미가 일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도는 윤리적 표현이 됩니다. 모든 인간본성을 뒷받침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답다고 하는 의미는 곧 도를 얼마나 실천하느냐 하는 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발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 잃은 이스라엘 집안의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길 잃은 양들은 ‘도(道)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도’는 복음의 길입니다. 특히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일탈된 도’를 바로잡지 않으면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도를 깨우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집안 단속도 못하는 데 어떻게 다른 집안까지 단속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길 잃은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헛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악한 길을 참된 도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도를 벗어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도의 회복에 제자들을 투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도의 회복에 노력해야 합니다. 득도해야 합니다. 도의 회복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하느님나라에 정착하려고 사랑의 실천 덕목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득도(得道)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덕을 쌓는 것이 득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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