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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칠거지악' 형틀에 울던 그 시절 '소박데기'

작성자根熙 김창호|작성시간09.06.09|조회수510 목록 댓글 1

'칠거지악' 형틀에 울던 그 시절 '소박데기'

옛적 우리나라에는 ‘소박(疏薄)’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 소박에는 ‘내소박(內疏薄)’과 ‘외소박’이라는 것도 있었다. ‘내소박’은 부인이 남편을 소박하는 것을 말하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남편이 부인을 소박하는 ‘외소박(外疏薄)’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박’이란 말도 남편이 아내를 내치는 ‘외소박’을 말한다.

‘내소박(內疏薄)’이란 아내가 남편과의 혼인상태를 청산하는 것으로 이 경우는 남편이 의절을 범했을 때와 남편이 집을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3년 이상 계속될 때였다.


여기에서 남편이 의절을 범했다는 것은 처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처의 외조부모, 백숙부모, 형제, 고모, 자매를 죽였거나 장모(丈母)와 간통했을 경우를 말한다. 이때는 관청(官廳)에 신고하고 이혼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매우 특수(特殊)하여 일상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경우였다. 때문에 당시의 여성들은 남편의 횡포(橫暴)나 비인도적 처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경우 그 남편을 피하여 도망하는 길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에는 당연히 처벌(處罰)이 따랐다는 점이다. 남편 몰래 달아나는 것은 곤장 1백대, 달아나 재혼까지 했으면 교수형(絞首刑) 을 당했다. 태종 때 손홍종의 딸 손 씨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재가(再嫁)를 했다가 곤장 1백대를 맞았다.


전 남편이 새장가를 들기 전에 재가(再嫁)를 했으므로 부도(婦道)에 어긋났다는 죄였다. 드라마 ‘왕과 나’에 등장하는 성종 이후에는 그나마 재가(再嫁)라는 게 아예 금지됐다. 성종조 당시 ‘어우동’이 시집에서 쫓겨난 뒤 창기를 자청하고 성(性)의 자유를 구가했던 것은 그런 제도가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소박녀 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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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편이 아내를 내치는 ‘외소박’은 당시의 여성에게는 형틀이나 다름  없는 ‘칠거지악’을 범할 경우 남편이나 시집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제도였다. 칠거지악이란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부도(婦道)를 밝힌 본명해편(本命解篇)에 수록되어 있는 일곱 가지의 악행(惡行)을 말한다.


즉 시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것(不順父母),무자식(無子),부정(不貞),질투(嫉妬, 못된 병(惡疾),수다(多言),훔치는 것(竊盜)등이 칠거에 속한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비가 폐비(廢妃), 즉 ‘소박’을 당한 것은 질투, 즉 투기(妬忌)였다.

폐비, 즉 ‘소박 당하는 성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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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조선시대(朝鮮時代) 부인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이혼, 즉 ‘소박’의 사유가 되어 여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칠거(七去)’의 범위가 너무나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를 잘못 모신다는 경우 어느 정도가 불효(不孝)인지도 남편이 판단하는 것이 그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소박’의 사유가 되지 않더라도 누명을 뒤집어 씌워 ‘소박’을 놓는 경우도 많았다.


남자가 첩을 얻어 본부인(本婦人)에게 투기(妬忌)를 유발하게 하고, 이에서 투기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어 ‘소박(疏薄)’을 놓거나, 임의로 아내를 친정집으로 내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소박'을 당하는 여성은 반드시 시댁을 떠날 때 '소복'을 하고 떠났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한 죄인이라는 뜻에서다.

 

그러나 현숙한 우리들의 옛 할머니들은 그렇게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미영베 '소복'이라도 차려 입고, 돌아가신 시아버지 무덤에 들려 큰절로 하직인사를 드리고 통곡을 하다가 어둑어둑해지면 친정이든, 성황당 나무 밑이든 갈길을 찾아 갔었다. 왕비의 경우라도  폐비, 즉 '소박(疏薄)'을 당할 때는 반드시 '소복'차림으로 궁궐을 떠났다. 강상의 법도를 어긴 죄인이기 때문이다.

 

왕비의 폐서인(소박)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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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는 강제로 '소복'을 입히는 경우다. 죄인이라는 뜻이다) 

 

 

여성이 ‘소박(疏薄)’을 당하면 그 형편이 참담해진다. 자식은 부계(父系)에 속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모두 뺏기고, 보퉁이 하나 달랑 들고,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 평생 ‘소박데기’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니면 성황당(城隍堂) 길에 나아가 주어지는 운명(運命)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습첩(拾妾)’이라는 풍속이 있었다. ‘소박(疏薄)’ 당한 여자가 새벽에 성황당(城隍堂) 길에 서있으면, 그녀를 처음 발견한 남성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제도였다. 남자가 기혼(旣婚)이건 미혼이건, 나그네건 거지건 여자에게는 따질 권리가 없었다. 만난 남자가 기혼인 경우는 이번에는 그녀가 첩(妾)이 된다.

 

노총각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배필로 주워 가는 예가 제일 많았지만, 재수가 좋을 때는 낙향(落鄕)하는 귀인이나 어사(御使)를 만나 귀첩(貴妾)으로 팔자를 고치는 경우도 없잖아 있었다.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 이것이 조선시대의 여인의 삶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참고로 ‘서낭당’과 ‘성황당(城隍堂)’의 차이를 잠시 살펴본다. 어떤 곳에서는 '서낭당'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성황당’이라고 하는데 이 둘이 같은 뜻의 말인지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 외동(外東) 향우님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서낭당’ 처마 밑에 한자로 ‘성황당(城隍堂)’이라고 써놓고,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성황’과 ‘서낭’의 차이는 무엇일까. ‘선왕’에서 유래했다는 ‘서낭’도 ‘선왕(船王)’ ‘산왕(山王)’ 즉, ‘배’와 ‘산’으로 극과 극이다. 하지만 ‘성황’은 국가 정책에 따라서 분명히 중국에서 왔다. ‘성’을 지키는 신으로 경배의 대상은 관운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서낭’은 너무 다양하다.

 

같은 마을에 있는 ‘서낭당’도 신위가 다르다. 어떤 곳에는 ‘국사성황당’이 있고, 어떤 곳에는 ‘소서낭’과 ‘약국서낭’, ‘육서낭’이 있었다. ‘소서낭’은 김시습을 모시고 채소로 제사를 올렸고, ‘육서낭’은 창해역사를 모시고, 육류로 제례를 올렸다. 바닷가 ‘서낭당’에는 대체로 여신이 모셔져 있고, 농경지는 토지·성황·여역신이, 깊은 골 ‘서낭당’에는 토마·철마 등 말(馬)을 모시는 곳이 많다.

 

신앙의 대상이 다채롭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둘은 이름은 같고 의미가 다른 것으로 보거나, 이름은 다른데 의미는 같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층민들에게는 ‘성황’과 ‘서낭’은 하나이다. 애써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서낭’일 뿐이다. ‘서낭당’은 민초와 기층민들의 신앙지이고 ‘서낭신’은 가까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낭당’은 원래 당집이 없었다. 돌이나 나무 등 자연물을 섬겼고, 전설이나 괴이한 상황으로 인격신이 자리한다. 경제적으로 잉여물이 생산되자 돈을 모아 당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커다란 나무나 돌무덤을 ‘서낭’으로 하는 곳이 있다. 당집과 돌탑, 돌무더기, 나무 등 갖가지 형태가 나타난다. 마을을 지키고 질병을 막고 가정의 행복과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다. 필자는 기독교 신도로서 이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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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소박(疏薄)’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소박데기’란 남편에게 소박을 당한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앞서 기술한 대로 ‘소박’은 남성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취하여 첩으로 둘 수 있는 것을 용인(容認)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소박(疏薄)’ 맞은 부인들은 오갈 데 없이 친정(親庭)으로 가지만 친정 역시 ‘소박데기’로 홀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일단 시집을 갔으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기 때문에 일부종사하면서 그 집에 뼈를 묻는 것이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취할 최대의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소박맞고 서낭당을 향해 울면서 떠나가는 그 시절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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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딸을 업은 비정의 시어머니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될 부득이한 처지에 놓였을 때는 부부가 합의하여 이혼하는 사정파의(事情罷議)도 있었다. 이때는 대개 남자 쪽에서 ‘할급휴서(割給休書)’라는 증서를 주게 되는데 이것은 ‘자유부인’으로서의 징표(徵標)가 된다.


이 ‘휴서(休書)’는 무슨 문서가 아니고, 여자의 옷섶을 자른 세모꼴의 ‘깃저고리’인데 흔히 ‘나비’라고 불렀다. 이 물증(物證)을 가진 여인들은 개가(改嫁)가 묵인되었던 것이다. ‘휴서’를 받은 소박(疏薄) 맞은 부인이 갈 곳이 없거나,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나비’를 손에 쥐고 등에는 이불보를 진 채 이른 새벽 성황당(城隍堂 ; 서낭당)에서 자신을 책임질 남자를 만나기 위해 서성거려야 했다.


그토록 믿고 찾아온 친정아버지와 어머니조차 외면(外面)을 하고, 그렇게 다정(多情)하게 자랐던 오라비나 남동생마저 다시 ‘소박’을 하다시피 하니, 대들보나 문고리에 목을 매거나, 치마를 뒤집어쓰고 방죽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어디든 누구든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옛적의 소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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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녀들은 물색 옷을 입지 못하고, 소복을 했다. 가슴에는 언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수절용(守節用) '은장도'를 달고 있다)

 

 

 앞서 기술한 대로 ‘소박’ 맞은 부인을 처음 만난 남정네는 신분(身分)이나 지위고하를 가릴 것 없이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慣習的)인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소박(疏薄)’ 맞은 부인이 ‘나비’를 보이면 남자는 여자가 짊어진 이불보로 ‘보쌈’을 해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런 ‘보쌈’은 주로 중류 이하 특히 하류사회(下流社會)에서 성행한 풍속인데, 가난한 홀아비에게 있어 이 이상 간단하고, 돈 안 드는 결혼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에 드는 일체의 비용(費用)이 필요 없고, 약간의 술값과 여자의 의복 한 벌 값만 있으면 아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황당에서 돈많은 멋쟁이 소박녀를 만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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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있고 돈도 많은 소박녀를 만나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다)

 

 지난 1950년대 필자의 향리 이웃에는 ‘순덕이’라는 또래 아이가 잠시 동안 살고 있었다. 김 첨지라는 부농(富農)의 집 머슴살이를 했던 덕배(이하에서는 ‘김덕배씨’라고 한다. 필자보다 스무 살 정도 많았다)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 아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과부(寡婦)가 된 그 아이 어머니 길례(이하에서는 ‘최길례씨’라고 한다. 필자보다 열 세 살쯤 많았다)라는 사람과 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순덕이’ 어머니는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당시의 할아버지 집에서 얄궂은 누명(陋名)을 쓰고 ‘소박(疏薄)’을 당했고, ‘순덕이’가 태어나기 전 괘릉리 ‘동산재’ 정상에 있는 ‘서낭당(성황당)에 가서 첫새벽에 만난 남자를 따라가 살다가 그 남자가 죽자 갈 곳이 없어 할아버지 댁으로 다시 들어 왔다는 것이다. 늙은 영감을 만났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순덕이’ 어머니가 김 첨지의 꼴머슴 김덕배씨에게 시집 온 것은 해방되고 얼마 후인 1949년경이었다. 필자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 입학하던 때였다. 거듭되던 흉년(凶年)으로 먹을 것이 동이 나던 그 시기에 ‘순덕이’의 어머니, 그러니까 최길례씨는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필자들은 ‘순덕이’ 어머니 이름을 알고부터는 ‘걸레’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덕배씨는 김 첨지네 머슴 중에서도 가장 힘세고 일 잘하고 주인에게 신명(身命)을 다 바치는 충직한 머슴이었다. 김덕배씨가 나이가 차 혼인(婚姻)할 때가 되자 김 첨지는 마땅한 색시를 찾아 수소문을 하게 됐고, 마침 최길례씨와 혼담(婚談)이 오가 결국 짝을 지워주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꿈같은 신혼(新婚)에 접어든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게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서로를 배려(配慮)해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은근히 시샘하면서도 결코 미워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행복을 마감하는 커다란 사건(事件)이 생기고 말았다. 결혼 생활 두 달째에 접어든 최길례씨는 어느 날 동네 아낙들과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다 남편 김덕배씨가 죽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던 도중 아무 이유도 없이 쓰러져 친구들의 도움으로 급히 의원(醫院)을 찾았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평소 황소같이 뚝심 세기로 소문난 김덕배씨가 누구와 다투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나무를 하다 돌연히 죽었다는 것에서 당사자인 최길례씨와 마을 사람들은 의문점(疑問點)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혼의 단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남편의 비명횡사(非命橫死)를 겪게 된 최길례씨는 넋이 나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망연자실한 '길례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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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장례(葬禮)는 무사히 치렀지만 최길례씨는 남편이 그리워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남편의 두꺼비같이 투박한 손이 그리웠고, 황소같이 우람한 가슴이 그리웠다. 게다가 이유도 모른 채 떠나보낸 남편이 불쌍하고 가여워서 최길례씨는 잠을 자다가도 문득문득 깨어 베갯잇을 적시며 슬피 울곤 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슬픔 속에서도 최길례씨가 그런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시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이 여러모로 도와준 덕분이었다. 시부모님들은 며느리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항상 마음 씀을 조심히 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최길례씨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최길례씨가 마을을 떠나야만 하게 될 이상한 소문(所聞)이 돌기 시작했다.


김덕배씨가 죽은 건 최길례씨의 센 기(氣)가 김덕배씨의 기(氣)를 눌러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색(色)을 밝힌 최길례씨가 잠자리에서 김덕배씨를 놓아주지 않아서 기가 약해진 탓에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입에선가 시작된 이 말은 삽시간에 퍼져 마을에서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부모들도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며 며느리를 감싸고돌았지만, 자신들의 의사(意思)와는 별개로 마을 사람들의 시선(視線)이 고와지지 않자 조금씩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최길례씨는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누명(陋名)을 쓰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받게 되었다.


최길례씨는 자기 자신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남편이 하자고 하니 했고,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됐다는 사람들의 말은 쉽사리 납득(納得)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최길례씨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더 이상 마을에서 살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날 최길례씨와 김덕배씨와의 혼인(婚姻)을 주선했던 김 첨지는 김덕배씨의 아버지를 불러 며느리가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소박(疏薄)’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시아버지는 김 첨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며느리를 앉혀 놓고 설득하게 되었다.


마을을 한동안 떠나 있으라는 시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최길례씨는 슬픔에 북 바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최길례씨는 시부모에게 예의(禮儀)를 갖춘 다음 간단하게 보따리를 싸서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동산재’ 꼭대기에 있는 성황당(城隍堂) 아래에 가게 되었다.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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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 그리고 옷가지 몇 벌을 챙겨 가는 최길례씨의 심사는 너무나 비통(悲痛)하기만 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앞으로의 미래(未來)에 대한 두려움이 ‘소박데기’ 최길례씨의 가는 길을 더욱더 어둡게 했다. 그 이후 최길례씨의 행적(行蹟)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최길례씨는 그로부터 5년 후인가 여자아이 하나를 업고 마을에 다시 들어왔고, 한동안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잘 사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그 여자아이는 이름을 ‘순덕’이라고 했다.


그 아이 때문에 얄궂은 소문(所聞)이 다시 퍼졌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김덕배씨의 아이라는 둥, 그때 ‘소박’맞고 ‘서낭당’아래서 거지를 따라갔다가 낳은 거지의 아이라는 둥, 불국사(佛國寺)에 적을 둔 ‘땡중’을 따라갔다가 낳은 ‘땡중’의 아이라는 둥, 아이를 둘러싸고 마을 사람들의 말이 많게 되자 최길례씨는 또 한 번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 이후로 최길례씨와 ‘순덕이’의 모습은 필자의 마을에서 영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시댁과 친정에서 모두 버림받고 혼자 살 경제력(經濟力)마저 갖지 못한 ‘소박데기’최길례씨가 걸어가야 할 험난한 인생역정(人生歷程), 이른바 ‘습첩(拾妾)’이라 불리었던 이러한 구시대의 악습이 봉건적(封建的)인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사라진 그 당시에도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보따리 하나 달랑 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성황당(城隍堂)으로 향하는 ‘소박데기’의 눈물 젖은 행보(行步), 고관대작(高官大爵)이든 장사꾼이든, 아니면 거지든 중이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맨 처음 마주치는 남자를 따라 가야 하는 불문율(不文律)에 얽매인 이들의 한 맺힌 인생역정이 ‘습첩(拾妾)’이라는 제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건 성황당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소박데기’를 거둬야 하는 의무를 강요(强要) 당한 그 시대의 남자들, 그래서 그 시대는 선택(選擇)과 자유가 용납되지 않았던 시대였으며, 마치 헌신짝 내다 버리듯이 ‘소박데기’들을 성황당으로 내 몬 통곡(痛哭)의 시대이자 유기(遺棄)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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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根熙 김창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6.20 七去之惡 1.시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것(不順父母),2.무자식(無子),3.부정(不貞),4.질투(嫉妬), 5.못된 병(惡疾),6.수다(多言),7.훔치는 것(竊盜)등이 칠거에 속한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비가 폐비(廢妃), 즉 ‘소박’을 당한 것은 질투, 즉 투기(妬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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