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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이야기]황희 정승 이야기

작성자根熙 김창호|작성시간10.11.02|조회수1,490 목록 댓글 0
 황희 정승

 

 황희정승(1363~1452,89세)

 

 

 

■ 학상

: 학이란 새를 볼것 같으면 참 고고한 자태를 하고 있다.

  고고한 자태란 것은 학자나 선비에 맞는 것이지 무관인 군인에게는 맞지 않는 상이다.

 

▶학의형상

1.몸이 날렵하면서 키가 크다.(1~1.5m)

2.머리가 둥글고 이마가 넓다.

3. 눈이 온화하며 선하고 맑다.

4.코가 가는듯하고 길다.

5. 입이 작은 편이다.

韓國의 說話
황희 정승 설화
    조선 초기의 재상 황희에 관한 설화. 인물전설에 속한다. 그는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렇다할 정적(政敵)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
    이 하나의 특징이며, 특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정승설화는 〈황희정승 이야기〉·〈계란유골〉·〈개가법 고치고 원망 산 황희〉·〈이인 황희정승〉·〈황희정승 탄생일화〉·〈황희정승과 딸〉·〈명판결을 내린 황희〉·〈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
    〈황희정승의 판결〉 등 아주 다양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결국은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노장적(老莊的)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삽화가 많다. 또한, 그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청빈 한 생활태도가 벼슬아치로서의 한 규범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삽화가 많이 있다. 황희의 청백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설화로는 〈청백리 황희정승 과 박광대〉가 흥미롭다. 황희가 정승으로 살았으면서도 가난하게살 다 죽게 되자 여러 딸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한다. 이에 “공작이 날거미줄 먹고 사나, 남산 밑에 박광대가 하리라.”고 유 언한다. 그 뒤 중국에서 공작이 날아오자 황희의 지략이 생각나서 그 딸들에게 물으니, 그 유언을 말하므로 공작에게 날거미줄을 먹여 살찌워 중국 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로 황희의 가난한 처지가 밝혀져 어느 대감이 황희의 집에 달걀을 여러 수레 보냈다. 그런데 그 달걀에는 뼈가 있었 다는 이야기이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안기라.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안기라.

     

    황희 정승이 하루는 수하 병졸들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정중히 엎드려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온 나라에 셋 밖에 없는 정승의 한 분, 그도 그렇게 명망이 드높으신 황희 정승의 심상치 않은 거동에 일행은 눈이 둥그레 졌다.

    그래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정승님, 무엇 대문에 하필 사람도 아닌 지각없는 버드나무를 보고 이렇듯 절절히 인사를  올리는 것이옵니까?》

    그러자, 황정승이 말했다.

    《이 사람들아, 이 버드나무 지각이 없다 보지 말라. 내 아직 어렸을 때 얄궂게 놀 때마다 어머님과 아버지는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쥐고선 나의 종아리를 후려쳐서 나를 일깨워 주었고, 내 서당 글공부 다닐 때 장난이 심해 글공부 게을리 할 때마다 부모님과 서당 훈장님께서는 자식을 아끼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역시 이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쥐고선 나의 종아리를 후려쳐 주었다네.

    이렇게 이 버드나무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오늘과 같이 나라 중임을 떠 맡을 수가 있었겠나.》

    그 말에 일행은 여간 감복해 마지 않았다.
    아, 버드나무 은혜로운 버드나무.

    아, 자식 귀히 여길수록 매 한 대 더 안기라!

    이 의미심장한 일이 있은 뒤로부터 귀한 자식에게 매 한 대 더 안기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희정승

     

    조선 시대에 청렴함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황희 정승이 돌아 간뒤에 중국에서는

    조선의 조정에 새를 한마리 보내 왔더랍니다

     

    깃털이 오색으로 빛나는 이 새는

    새를 관리하는 곳에 보내어 먹이를 주는데

    고기나 곡식이나 심지어

    채소와 물조차 먹지 않아서

    관리자의 애를 태우게 됩니다

     

    마침내 왕의 귀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왕은 중국에서 보내온 새가

    갑자기 죽어 버리면

    다음 사신이 오고 갈 때에

    무슨 트집잡힐 일이 생길지 몰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새의 이름과

    식성과 먹이를 알아 보도록 하지만

    도무지 알길이 없습니다

     

    애가 탄 왕은 이렇게 어려운 때에

    황희 정승이 옆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 문득

    황희 정승의 아들을 궁으로 부릅니다

     

    왕이 그동안 적조했음을 말하고

    혹시라도 황희 정승이 돌아 가실 때에

    후손들에게 남기신 말은 없는가 물으니

    황희 정승의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님이 돌아 가시면서

    저희들을 불러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 가면서 언제나

    근검과 절약을 신조로 삼고 청렴 두글자를

    언제나 기억하도록 하여라"

     

    "만약 청렴하게 살면서

    아비처럼 비가 새도록 가난하게 살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할지 모르지만

    옛말에 일곱색깔의 봉황새도 거미를 먹고 사니

    근검 절약하고 청렴하기만 하면

    산 입에 거미줄 치지는 않는다" 하셨습니다

    라고 왕에게 고합니다

     

    이에 왕은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새를 관리하는 곳에 명하여

    거미를 잡아다 먹이도록 하니

    비로소 새는 먹이를 받아 먹고

    나라는 근심과 걱정을

    덜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할만큼

    가난하고 청렴하게 살았던

    청백리 황희 정승은 죽어서도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주었으니

     

    지금 이 나라의 고관대작들은

    국록을 톡톡히 받아 챙기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만큼

    밤 잠을 줄이면서라도

    나라 안팎의 현안들을 해결할 방책을

    매일 매일 한가지씩 생각해 내어

    국태민안의 초석을 놓아야 할것입니다

     

                                                                                                                       

     

    황희정승의 살림살이

     

    황희 정승의 집 울안에는

    밤나무가 한그루 있었답니다

     

    어느 날 바깥을 내다 보니

    아랫 사람이 울밖에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기에 나가 보니

    밤나무 아래에

    아직 덜 여문 밤이 떨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게 소란을 피는 것이냐 묻자

    아랫 사람은 예 동네 어린 녀석들이

    익지도 않은 밤을 작대기를 이용해 털어 가려다

    제게 들키자 도망을 가서

    다시는 못하도록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래 아이들이 밤은 조금 가져 가긴 했느냐

    아닙니다 다행히도 떨어진 밤이 울안에 떨어져

    하나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냐

    그럼 울안에 떨어진 밤에다가

    잘 익은 밤을 조금 더 털어서 

    울밖에다 던져 놓거라

     

    하인은 황희 정승의 말을

    도무지 알아 들을 길이 없어

    황희 정승을 물끄러미 쳐다 보는데

    정승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아 

    동네 아이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명색이 대감집 밤을 털어 볼 생각을 했겠느냐

     

    그 어린 마음을 헤아려 밤 몇알

    나누어 먹을줄 모르는 대감이라면

    어찌 나라의 일을 하는 대감이라 하겠느냐 

     

    그러니 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려므나

     

    그제서야 대감의 마음을 헤아려

    아랫 사람은 밤을 주워다가

    울밖으로 던져 놓으니

    동네 아이들은 다시 몰려와 밤을 까먹으며

    정승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동을 하였고

    평소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 정승의 살림살이가

    이와 같았다고 전합니다

     

    어느 날은 연못에 떨어진

    동전 한닢이 보여서 하인에게

    얘야 저것을 꺼내 올수 있겠느냐

     

    대감마님 연못이 저래 뵈도 깊어서

    잘못하면 사람이 상할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하다만

    네가 저 동전을 꺼내 오기만 하면

    동전 세닢을 주마 어떠냐 한번 해보겠느냐

     

    그러자 하인은 제가 위험해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허리에 끈을 묶어 밤나무에 묶고 못에 드니

    위험도 잠깐이고 동전 한닢을 꺼내옵니다

     

    정승이 약속대로 동전 세닢을 수고비로 주니

    대감께서는 한닢을 얻고 세닢을 제게 주셨으니

    손해 보시는 일이 아닙니까 하고 하인이 묻자

    동전이 연못 속에 있으면 나라에 손해지만

    그것을 꺼내어 한닢을 보태고

    세닢은 네게 남아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더냐

    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두루 뭉수리 황희 정승 - 공감의 지혜와 덕

     

    세종대왕 때 두루뭉수리 황희 정승이 계셨다.
    하루는 하인 한 사람이 들어와,

    "대감님, 제가 아무개하고 이러저러해서 말다툼을 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황희 정승은,

    "응 그래, 자네 말이 옳으네."
    하고 그 하인을 내보냈다.

    그런데 잠시후에 또 다른 하인이 들어와서
    "대감님 그게 아니구요. 그 사람이 이러저러해서 다투었습니다.

    저의 잘못이 아니지요?하고 말했다. 그런데 황희정승은 이번에도 또,
    "응 그래, 자네말도 옳으네."

    하고 그 하인을 내보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다 보고있던 황희정승의 부인이

    "아니, 대감은 두사람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잘 가려주시지 않고, 어째서, 이사람 말도 옳다.
    저사람 말도 옳다고 하시는지요?"

    하고 말하자 황희 정승은 이번에도 또
    "응, 듣고보니 부인의 말도 옳구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두루뭉수리 마음으로 착한 정치를 가장 오랫동안 하였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 황희정승이 어찌 분별력이 없고 시시비비를 가릴 줄 몰랐겠는가!

    사람이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존재란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입장을 바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하면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갔던 것이라 짐작된다.


                                                                                                                       

     

    황희정승과 두문동

     

    황희정승 하면 우선 청백리 그리고 너그럽고 정치적으론 사리가 너무 분명하고 지혜로운

    정승이란 말이 떠오른다

     

    황희정승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한 분이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고려때 고위 문신들이

    두문동이란 곳으로 가서 그곳서 조선조정에 등정을 거부하고 은둔 생활하게 된 사실이 있다

    그당시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좌시하지 않았고, 계속조선조정에 출사을 종용하다가 후일에는

    그곳에 거주하던 두문동선비들 모두을 군사들로 하여금 포위하게 한후 개국한조선조정에 입조할것을 강권하고 두문동에서 나오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회유에 굴북하여 나온사람이 한분도 없다고 한다. 선비들이 모두 나오지 않으니 그대로 두문동이란곳에 불을 질러서 그분들 모두을 불태워 죽였다는 역사적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그당시 황희도 그곳에 있게 되었고 가장 나이가 어린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문동 선비들이

    모두 모여 회의한 결과 젊은 황희같은 사람은 두문동에서 죽기보다는 새로 개국한 나라에 백성을 위해서

    또한 두문동에 절개을 알리고 펴기 위해서 나가서 출사할것을 만장일치로 뜻을 모으고 두문동이란 곳서 퇴출을 하게 되었고 퇴출에 결과로 즉 젊은 인재을 죽게 할수 없어 방출결정에 따라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황희는 가치관이 크게 변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젊을때 두문동에서 생활한 것이 황희정승에 인생에

    큰 가치관을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죽을때 까지 일관되는 크나큰 짐이 되었을 것이다.  황희에 청백리에 공직관이나 백성을 위해 나라을 위해 충심과 정성을 다 기울이는 공직에 일관된 가치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황희에 인생역정이 있었기에 젊어서 출사한 이래로 욕심과 허욕에 눈을 돌린적이 있다는  글들은 황희에대하여 너무 모르는 무식에 소치라고 해야 한다. 역사사실을 고의로 왜곡하려 는 것이거나 무지한 유치한 무식한 소치 라고 해야한다 인물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황희에 모친가계나 부친가계도 고려조에 명신에 아들 따님 이었다. 황희에 모친이 천한 종이라는 말은 역사사실자체도 알지 못하는  모르는

    무식한 소치이다. 우리에 역사적인 자랑스런 선조이며 귀감인 분을 음해하는 것이다. 충직하고 청백한 곧고 지혜로운 분에 대한 시기와 질투 막말이고 일단 갯기을 부리고 깡짜을 부리는 것이라 할수있다 .

    조선에 정승은 나라에서 준 녹이 크고 상으로 받은 땅과 노비가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가난 할래야 가난할수 없는 조건인데다 또한 큰 고려조에 명신가문이니 물려받은 노비와 재산또한 많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분은 나라에서 받은 녹을 가난한 이웃에게 관직에 있는 오랜기간내내 배풀었으며  일반 가난한 백성을 늘 생각하고 배려하기 위해서 일반백성보다 못한  먹을거리로 일관되게 식사을 유지하였다는 기록은

    그분에 품성이 크고 너그럽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그분은 조정에서는 유능하여 시기에 대상이었고 관료로서 업무에서는 부정과 불의와  나라에 대한 해국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일을 한 분이기 때문에 많은 조정에 고위 관료들이 질책을 받거나 탄핵을 당하거나  파직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때문 모함을 당하거나 음해을 받은 사실또한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 음해와 모함 투서 모함상소가 모두 음해로 해명된 것도 특이한 기록이라 한다.그많큼 그분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도 바른 선비사회 기풍이 있었던 시대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그 모함상소내용이 지금까지도 황희정승을 음해하는 구실로 이용되고도 있다

     황희가 좌의정으로있던 65세에 황희에 처와 식솔 노비까지 다알고 있는 사람인  70에 가까운 공신에 처인

    여인을 간통했다는 음해상소는 후에 그 음해상소한 동기와 장본인 사주한 사람까지 그 전모가 밝혀져

    오히려 상소을 사주한 조정대신이 두고 두고 오늘날까지 간신으로 역신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 음해의도는 역신인 처을 인간적인 정리때문 억울한 누명을 보호해준 것을 계기로 하여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고 또한 정치적인 챙피줄 의도가 주류였다.즉 황희정도에 사람도 유치하고 치사한 일로 사람입에 오르내리게 하려는 의도 많으로도 성공이라는 사특한 의도때문. 의도한바을 극대화 시키고자 간통이라는 허무맹랑한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있을수 없는 사안을 집어 넣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당시나 지금이나 역신으로 몰린 가족은 무조건 음해해도 상관없다는 인식들이 이었던듯 하다. 누가 말할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니 인간으로 해서는 안되는 사특한 일임에도 이을 정치적인 술수로 악용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황희라는 분이 행실에 흠을 잡을 구실이 없고 평판이 너무 방정하다는 것을 흠집내야 하니 부득불 말도 안되는 사실을 사주케하여서라도 공론을 만들었고 후세에 이용되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오늘날 말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으니 사실 그 사특한 의도가 어는정도 성공한 셈이다. 오늘날까지 무지한 사람들이 앞뒤 없이 희자되어 이용되고 있으니 너무 성공한 사특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청백리라거나 품성이 좋았다는 역사적인 인물이 희자되는 것은 그많큼 그 인물에 덕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적으로 음해하려는 의도는 황희정승 또한 역사적인 인물이고

    그당시 황희정승때문 당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황희정승같은 분을 음해하여야 오늘날 정당한 자신들에 처지을 변명할 구실로 삼기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조건 좋은분은 깍아내리려는 사람들이 많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선에 재상으로 공직자로 황희정승 많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오늘날 까지도 귀감으로 여길분으로 알고 귀하게 대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날에도 사회생활이나 공직생활이나 어느정도 남에게 귀감이 되게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한지 알고는 있다.

      그것도 대단한 부와 직위에 있는 분이 수도자나 성직자 비슷한 절제와 생활을 하면서 그것도

     얽힌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 정치정국을 국정을 풀어가는 지혜을 혜안을 가지고 품행까지 방정맞게 하면서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거의 불가한지 안다면 그래도 역사적인 귀감이 되는  선조들에 선비들에 그 삶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지... 고의적인 무식한 음해없이 알아줘야 할것이다

     

                                                                                                                       

     

    황희정승을 발탁한 태종 세종

     

    인물 황희정승 이해

      황희가 부패하고 망나니인데 세종이 그의 능력이 많음을 보고 발탁했다고 하는 사람은 무식한 무지을제고해야...   상식적으로 물의가 있는 부적격한 파렴치한 인물은 오랜시대 귀감으로 회자 될수 없다는것은 상식이다...

      황희에 대한 음해는 황희의 철저한 자기절제와 사람다운 인격 지혜롭고 냉철한 일처리 때문생긴 질시가 많다.  이는 황희에 관심과 인물됨을 말해주는 관심에 일면이기도 하다.

     

      1. 황희는 태종이나 세종에 정적이 아니었다. 태종이나 세종과는 군신관계가 최고에 믿음과 신뢰을 가진   철저한 동지관계요 인간의리로 맺어진 인간관계였다.

         정적이란 말은 말도 안된다..

         태종이방원은 세종에게 황희을 천거할 당시 태종이 황희에 인품과 인간적인 신뢰관계을 세종에 알려주기 위해 황희을 거론하며 황희는 무고한 사람이며 정치적 잘못으로 무고한 인재을 고생시킬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인간적인 신뢰와 정리 믿음을 바탕으로한 군신관계에 있었다.   이는 세종이 후에 황희의 탄핵이 극에 달하자 황희에 대한 믿음을 신하들에게 말하는 대목에서 확인되고 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태종이 황희을 천거하며 당부할때 대목을 직접신하들에게 말하며 황희의 탄핵과 음해받고 있는 상황에 부당함을 미리 지적한 일례가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대왕세종에 믿음에 황희는 한치도 소홀함이 없이 보답한 명신이라고 할수 있다..

     

     2. 양녕에 적자을 임금으로 밀은 정치적인 성향은 그냥 정치적인 계산이 아닌 유교적인 적자 서열 중시의시대상황과  양녕의 사부로서 스승관계하에 있었던 인연이 있었으며 또한 조서초 건국에서 벌어진 선례가 골육간 권력다툼으로 형제간 죽고 죽었던 정쟁을 피하고 혹시 모를 미래에 국가 불안 골육정쟁을 막고자 했던 지혜로운 우국충정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이권에 따른 이득에 따른 정치성향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태종이 황희는 이기적인사심때문이 양녕을 지지한 사람이 아니라고 직접언급 했을 정도로 황희에 인품은 뛰어났다고 본다.

       사실 이때에 양녕은 그의 부실한 행동으로 인해 태종에 눈밖에 나서 세자자리을 보전할 입장이 아니었다.  때문에 문무대신 누구나 양녕에 편들기는 사실 정치적 자살행위 였다..

      양녕은 문무대신 누구한사람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외로운 처지였었다...

     

    3. 황희는 재임기간내내 탄핵을 무수히 받은 일이 많았다..그많큼 중요한 국가일에 관여한 정도가 크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런 탄핵상소사건은 모두 황희에 강직하고 업무처리가 정확하여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사람과 황희에 출세을 견제하고 시기하려는 사람들에 무고가 주요 원인이었다.무고을 한 주요내용이 다 밝혀진 것도 특이한 일화이기도 하다..

      후일에 황희을 무고 음해하려는 사람들은 탄핵후에 조사되어 밝혀진 내용을 보면 업무을 담당한 고위관리가 고의로 안 알리거나 무지로 알지 못하여 탄핵된 적시된 허위사실을 가지고 황희을 말하는 왜곡된 내용들이 사례들이 흔히 돌아다니고있었다..

      형사사건청탁도 아래사람들이 황희와 관련된 친족이라 하니 그들에 사건해결을 위한 로비와 황희이름을 빌린 일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황희는 청탁  한 사실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관련   되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봐준내용까지 다 황희에 청탁으로 인해 불공정한 죄을 주었다고 탄핵상소하는 사태가 있었고 이때도 황 희는 내가 사안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임을 인정했다..그리고 그런자라면 내가 사안을 미리 알아다면 어떻게 했을지, 청탁했을지도 모른다고, 청탁할 정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인정을 보이는 조사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탄핵한 사람들에 사정까지 위로해주는 것을 보아서 오늘날에 사람들이 말하는 청탁과는 거리가 멀은 고위직에 바른처신을 알려주는 일화가 너무 많다..

       일례로 박용이라는 하급관리의 아내가 황희집에 인사청탁으로 뇌물을 집요하게 갗다 놓으려 했으나 황희   도 아닌 황희의 처 정경부인에게 거절당하고 무한당한 사실이 있었는데 박용에 처가 요로에 소문으로 거짓말을 퍼트려서 이 소문으로 삼사에 탄핵상소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세종은 황희에 대한 전반적인 개인생활을 조사하게 된다.. 이때 밝혀진 내용이 황희가 청백함이 유달랐다는 사실과 황희에 대한 일반적인 모든 청렴함과 자기관리에 엄격함이 밝혀지게 되고.. 이런 조사을 담당한 신하는 세상에 황희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자랑스런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세종에게 조사보고 복명을 하게 되고 이러한일이 있게 되고 나서 무고한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에 황희에 사람됨과 청렴함이 모두 밝혀지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청백리로 자타가 공인하는 계기가 되고 더욱 중용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탄핵했던 인사들이 세종에게서 본받고 행실에 조심하라는 어명에 질책을 받게 된다..

       후일에는 탄핵을 했던 인사들에 의해 오히려 청백리로 추증되고 잘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박용에 아내는 모함한 죄로 큰 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4. 박포에 아내와 간통했다는 음해는...황희가 그런일을 저질렀다고 했을때 과연 조선에 최고에 명예을 지닌 황희가 되었을지을 생각해 본다면  무모한 음해이기 까지 하다...                   ..황희는 박포집안과 잘아는 사이였다..때문 황희에 집안식구와도 잘 아는 통하는 관계였다 한다..

       박포가 왕자에 난에 주동자로 가담에 실패한후 죽임을 당하고 가족들은 멸문지화을 당하거나 흩어지는 일이 있게되자 박포에 아내가 피하여 알고있던 황희에 집에 몸을 의탁하는 구조청탁을 하게 되고 황희는 이러한 사정을 알고 인정상 뿌리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내력으로 황희에 처와 종복들은 박포에 처을 황희집 뒤쪽에 있던 사랑채에서 기거하도록 하고 일시적으로 한정적인 기간에 먹을것과 지낼것을 돌보아 주고 후에 지낼곳을 찾아 가는데에 도움을 주었다..

       옛날에 이름있는 선비에 사대부에 아내이었던 박포여인이니 그여인에 품성과 지조는 이미 상식적으로 고고하고 높았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그런 여인이 낮선 남자 그것도 아는 사이에 사내품에 몸을 맞긴다는 상식은 너무 반상에 여인들을 짐승에 비유하는 웃습게 아는 무식한 소치이다..

       황희에 처 양씨부인과 종복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음에도 와전되어 마치 황희가 파렴치한 짓을 한것으로 탄핵상소가 된 사건으로 까지 이어진다..

       참으로 비상식적인 음해이고 황희에 인간적인 과정과 양식을 너무 간과하고 모르는 무지이다. 그리고 그당시 시대상황은 정치적으로 제거된 사람은 온갖 있지도 않은 일로 음해하거나 깍아내려 정적을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세태가 만연되어 있을때다..황희가 이러한시대상황에도 박포에 처에게 인정을 베푼다는 것은 황희에 인품이 얼마나 사람됨이 뛰어났는지 의리가 있는 품성에 소유자임을 대번에 알게하고 도덕적으로 당당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세상은 오늘날까지 상소내용에 적시된 사항많을 가지고 역이용하며 자료로 제시하고 음해하는 자료로 쓰여지기도 한다 

        이사건도 후에 다 밝혀지고 오히려 황희에 인간됨을 알수 있게 하고 정적들 까지 황희에게 의탁하는 인정하는 인품으로 작용하게 된다..

     

     5. 황희에 어머니는 고려조 명문가에 따님이었으며 사망후 세종에 의해 최고관직을 추증받은 사실이있다.. 황희에 모친은 증조 조부 부친 모두 고려조에 현직문무관으로 임관 봉직한 사실이 있던 명문가에 규수였다.. 이름과 관직이 다 기록되어 있다.

     

     6. 황희가 고려조에서 조선에 신료로 입조하게 된 일화도 너무 알려진 일화이다..

       두문동에서 항거한 고려조 문무관들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또한 새로운 나라도 백성을 위해서는 동량이 인재가 필요하다는 나라을 이끌 확실한 젊는 동량을 죽게 할수 없다는 중지가 모아져서 반강제적으로 새조정신료와 협의된 결과로 출문을 했고..설득하여 천거된 몸으로 조선조정에 출세하게 되었다는사실이 있다.

      이때문 황희는 평생에 걸쳐 자신에 청렴함을 지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심을 멀리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의무감을 가난한 생활과 청빈한 생활을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태조 이방원에 절대적인 신뢰을 받던 황희는 태종 이방원에 안목에 의해 강제로 세종에게 천거 되게되고 세종은 부친으로 부터 자신에 세대을 책임질 동량을 쉽게 얻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된다..태종 이방원에 신뢰가 바탕이 되어 세종에게 천거된 황희또한 최고에 대왕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황희가 테종 이방원에게 천거는 황희에 인품과 학덕 사람됨 지혜로운 능력등이 도덕성이 다 검증된 결과이지 어떤 기준도 없는데 정치적 이해로 인해 일방적으로  맘에들어 천거된 것이 아니다.태종 이방원이 어떤 인물인가...세종조 왕권과 태평성대을 이루기 위해 모든것을 무자비하게 가차없이 떨어버린 잔인하지만 혜안을 가진 너무 안목이 큰 인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인물에 발탁이니 한치에 소홀한 안목은 없었을 것이다...황희에 사람됨이 그많큰 대단한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7. 황희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주요한 모범생의 인물됨이 남달리 일화가 많은 분이다  황희에 사람됨을 알아본 고려조나 조선조 선인 현인들이 다들 지도 편달을 했던 인물이며, 기대감을 촉망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황희는 세종이나 태종이나 황희을 중용하는 인물 천거에 어울리는 적격한 인물이었다 황희가 결격한 사람인데 인물이 유능하여 중용하게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말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웃게 된다...  ...

         오늘날 주요 보직에 무자격하고 파렴치한이 중용되는 시대에 엉뚱한 사례을 갗다 들이대는 무지 한 인물들이 있고, 이 인물들이 노리는 것은 파렴치한을 주요보직에 등용시키려는 말도 안되는

         의도을 보인다..

           사람이  만사라는 말은..

           동서고금에 진리이기도 하다....

                                                                                                                       

     

    총리 후보자의 자격과 황희 정승에 대한 기억

     

    조선시대 명정승으로 유명한 황희 정승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황희 정승하면 떠오르는 것은

    흰소와 검은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청백리'의 이미지입니다.

     

    우리 기억속의 황희 정승은

    뛰어나고, 올곧고, 물질을 탐하지 않았고,

    미물의 마음까지 배려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작된 기억이지요.

     

    실제 황희 정승은

    몹시 탐욕도 많고 부도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말년에는 소위 개과천선했기 때문에

    더욱 인간적으로 와닿고 존경받을만 한 것입니다.

     

    요즘 인사청문회 보면서

    도덕성 어쩌고 하며 한탄해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총리 후보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몹시 비현실적으로 많은 것을...바라고 있는건 아닐까요?

     

    황희정승 같은 총리를 원한다고들 하지 않나요?

    적당히 도덕적이고 적당히 부도덕한...하지만 뛰어난 명정승이었던 황희 정승

     

    아들의 버릇을 고친 황희정승

     

    황희 정승의 큰 아들이었던 호안공께서
    경기 감사와 한성판윤등 요직을 두루거친후
    이윽고 호조판서 라는 높은관직에 오르자 ..

    그동안 좁고 누추한 초가집에서 여러식구가
    지냈던게 너무 지겨웠던지 그럴 듯한 집부터
    먼저 장만하여 이사를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운 주위사람들을 초대하여
    집들이를 하고있을때 황희 정승께서 찾아 오셨다.
    그런데 집인에 곧바로 들어오질않고 대문에서
    집주인 을찾으시는데 그 태도가 무척 공손했다.

    호안공이 놀라 황급하게 뛰여가 아버님이신
    황정승을 맞아드리려 하는데 더욱 공손하게
    머리를 숙일뿐 황정승은 주인께 꼭 한가지
    배우고자 하는게 있다면서
    좀처럼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할수없이 호안공께서 그 부탁을 여쭙자
    황정승깨서 소인은 70 년간 벼슬살이를 하였고
    그중에는 6조 판서와 일인지하 만인 지상의
    영의정 자리만 20 여년을 하였는데도
    아직도 오막살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주인장께서는 무슨재주로 짧은기간 벼슬을
    하였데도 이처럼 좋은집을 장만하였는지 그 비법을
    저에게도 좀 가르쳐주시오 .

    소문난 효자 이기도 했던 호조판서 호안공께서는
    이 말을듣고 혼비백산하여
    즉시 그집을 처분하고 전에 살던 작은집으로
    다시 이사와 주위의 보통백성들과 한치의 차이도 없이
    티나지않게 여생을 보냈다 한다.

    지금 이나라에는 황희 정승같은 분이
    정녕 한분도 없을가요 아니면 지금 옆에있어도
    눈이 어두워 모르고 있을가요 .

     

    조선 초기의 명 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은 18년 간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불렸습니다.

    황희 정승의 아들 중에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황희 정승에게 그 아들은 근심거리였습니다.
    여러 번 훈계도 하고 때로는 매도 들었지만
    아들의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황희 정승은 무언가 방법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황희 정승은 술을 마시러 나간 아들을
    밤늦게까지 마당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희 정승의 어깨에 밤이슬이 내려
    옷이 축축해질 무렵, 술에 취한 아들이 비틀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이것을 본 황희 정승은 아들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술에 취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보던 아들이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순간 술이 확 깼습니다.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황희는 여전히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무릇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지금 저는 손님을 맞고 있을 뿐입니다.”

    이말을 듣고부터는 황희 정승의 아들은 옳지 못한 버릇을
    고치고 아버지 못지 않은 훌륭한 청백리 선비의 자세로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황희정승의 자녀 교육은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보기드문 황희정승의 정직한 정신
    그의 정신은 후세에도 많은 교훈을 남깁니다.


     마음은 너그럽게, 행동은 엄격하게 - 황희 정승

     

    고려 말엽에 태어나 조선 건국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지고 세종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꽃피운 청백리 황희. 그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살고자 했기에 사소한 일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고, 웬만한 남의 흉허물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 대범한 성품과 넓은 도량을 갖춘 큰 인격자였다.

     

    하루는 황희 정승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소란스럽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일을 하는 머슴 둘이서 서로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하면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었다. 황희 정승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자 머슴들이 다가와 둘의 잘잘못을 가려 줄 것을 청하였다.

    먼저 한 머슴이 다른 머슴의 잘못을 헐뜯으며 자기가 잘했노라고 하소연하자 황희 정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머슴 역시 자기는 억울하다며 상대 머슴의 잘못을 늘어 놓았다. 황희 정승은 그 머슴의 말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였다.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너도 옳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부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희 정승에게 말하였다.

    "모든 일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린 것들의 잘잘못을 가려주지는 못할망정 다 옳다고 하시니 무슨 대답이 그리 싱겁습니까?"

    황희 정승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빙그레 웃었다.

    "듣고 보니 그렇구려. 부인의 말도 옳소."

    그렇다면 모두가 옳다고 한 황희의 말에 담긴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황희로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머슴들의 싸움에 대하여 그들의 잘잘못을 가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제 잘못을 깨닫도록 마음의 길을 터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인간세상의 시비는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갑이라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긍정적이고 잘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을이라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부정적이고 잘못된 일로 비쳐지기도 한다.

     

    사실 황희가 대했던 세 사람은 각각 개인으로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주장한 것이고, 이는 그들에게는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나 그들 세 사람의 사소한 시비를 떠난 황희에게는 그러한 각각의 주장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의 시비는 엄정하게 가려야 할 것이 있는 반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사소한 시비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가려야 할 시비는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가려야 한다는 것 하나와, 편협한 이기심으로 생기는 관점의 차이는 떠나야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이다. 항상 시비를 가리려는 태도보다는 가려야 할 시비와 떠나야 할 시비가 무엇인가를 가릴 줄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황희가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간 데에는 젊은 시절의 뼈저린 경험 하나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시골길을 가던 황희는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누렁소와 검정소를 번갈아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 보였다. 심심하던 터이라서 지나가는 소리로 농부를 향해 한 마디 물었다.

    "여보시오. 그 두 마리 중에서 어느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런데 갑자기 농부가 일손을 멈추더니 황희에게도 가까이 와서는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기 저 누렁소는 일도 잘 하고 말도 잘 듣지만, 저쪽 검정소는 일도 잘 안 하고 꾀만 부리면서 말도 잘 안 듣는다우."

    황희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였다.

    "여보시오. 그런 걸 가르쳐주는 데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을 할 것까지는 뭐가 있소? 그냥 거기서 이야기해도 잘 들릴 텐데."

    그러자 농부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허어. 모르시는 말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제 잘못을 이야기하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 그건 선비가 아직 젊어서 모르시는 말씀같소이다."

    황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짐승조차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황희는 이후로 더욱 과묵하고 침착하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비록 한 순간의 이상한 체험으로 돌리고 잊어도 좋을 일이었지만 그것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실천하엿으니 오늘에 전하는 황희의 모습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황희는 종들을 대하는 데도 사랑으로 대하여 "노비 또한 하느님께서 내리신 백성인데어찌 포악하게 부리겠느냐."하면서 항상 너그럽게 대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손님을 맞이하여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노비의 어린 자식들이 때묻은 손과 발로 달려들어 어떤 아이는 수염을 잡아당기고, 어떤 아이는 옷자각을 밟으면서 차려 놓은 음식을 집어먹으며 또한 때리기까지 하였는데도 황희 정승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아프다. 아프다."

    라고만 하였다니 그 너그러움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사람을 바로볼 줄 아고 남의 허물을 감싸주어 그 인격을 존중한 인본주의자였다.

    하루는 친구중 한 사람이 어린 사내종을 데려와 맡겼다. 그런데 이 아이는 황희의 자제들이 글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서는 바로 글자를 알고 뜻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황희는 그 어린 종을 조용히 불러서 돈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니 이 돈을 가지고 멀리 네 근본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서 살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여라."

    하고는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후 황희가 과거시험의 시험관으로 있는데 시험에서 뽑힌 선비 가운데 자신이 전에 내보냈던 그 어린 종이 훌륭한 선비가 되어 끼여 있었다. 그러나 황희는 전혀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 선비가 오히려 여러 사람 있는데서 옛일을 꺼내어 밝히고자 하였다. 황희는 얼른 다른 말을 꺼내어 큰소리로 이를 가로막아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선비를 조용히 불러서 타이르기를,

    "그 때의 일은 너와 나만이 알 뿐이니 만일 입 밖에 내었다가는 너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 것임을 명심하여 평생토록 말을 하지 마라."고 하였다.

     

    황희정승의 일화

    <<역 사  모>>

     

    오늘의 역사기행 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정승은 1363년 (공민왕12)에 개성에서  태어나 1389년(창왕1)에 문과에 급제했다.

    황희정승은 조선초의 문신이다.

    고려가 망하지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황희같이 젊고 유능한 사람은백성을 위해서 나가서 벼슬해야 한다고

    주청해 태종때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양령대군을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교하(交河)-남원(南原)으로 귀양갔다.

    그 후 61세에 세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65세에 영의정이 된 후 18년간 그자리를 지켰다.

    그가 행정의 달인이요,덕치의 명수엿다.

    그가 덕이 높았음은 그에 관한 여러 일화가 말해준다.

     

    <일화--1>

    송와잡설'에는 선생의 인품을잘 보여 주는 유명한 얘기가 적혀 있다.
     하루는 계집종이 서로 싸워 집안이 떠들썩 했는데 한 계집종이 공의 앞에 와서 “아무 계집이 나와 서로 겨루어 범한 것이 이와같이 간악 합니다”하고 아뢰니 공은 “네말이 옳다”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른 게집종이 와서 똑같이 호소하자 공은 또 “네 말이 옳다”하였다.
     공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성을 내어 나서며 “아저씨는 몹시 흐리멍텅합니다. 한쪽이 옳으면 한쪽은 그르고 한쪽이 그르면 한쪽은 옳은 법이지,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고 하시면 도대체 어느 쪽이 틀렸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황정승은 “네 말도 옳다”하고 읽던 책만 계속해서 읽을 뿐이었다.
     성품이 이토록 너그러워 하인과 그 자식들도 어려운 줄 모르고 스스럼없이 대하여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였으나 한번도 성내 꾸짖거나 매질하는 적이 없었다.
     보다 못한 부인이 “아유! 집에서 저런분이 어떻게 정승 노릇을 하며 막중한 나라 일을 보실 수 있을까”하고 핀잔하자, “비복(婢僕)도 다 하늘이 내려준 이 땅의 백성인데 어찌 가혹하게 부리겠소”했다고 하니, 그이 따뜻한 애민정신(愛民精神)과 투철한 인본사상(人本思想)은 시대를 훨씬 앞서 갔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문산읍에 있는  

    황희정승의 유적지입구

     

     

     

     

     

    <일화--2>
     선생에 관한 일화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데 선생이 아직 젊었을 때 적성에서 송경(宋京) 으로 가다가 밭을 가는 노인을 만난 이야기는 선생에게 큰 가르침을 준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 노인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끌고 밭을 갈다가 방금 쟁기를 벗기고 숲에서 쉬던 참이었다. 황희가 노인 곁에서 쉬면서 “노인의 두 마리 소가 모두 살찌고 크며 건강한데 누가 밭을 잘 갑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인이 귀에다 입을 대고 “아무 빛깔인 소가 낫고 아무 빛깔인 소가 못하오”하고 말하였다. 황희가 왜 귀엣말로 얘기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을 통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말의 좋고 나쁜 것은 모두 알아듣는다”며 꾸짓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깨달은 황희는 이후에는 더욱 과묵하고 침착하여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

     

     



    <일화--3>
      선생은 공사에 있어서나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시비가 분명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생동안 10여차례 관직에서 쫓겨났고 귀향살이도 여러번 했다.
     반구정에서 갈매기를 벗삼아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세종 12년 68세때 사소한 죄로 중형을 받게 된 태석균(太石鈞)을 변호해준 것이 빌미가 되어 벌떼같은 탄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방촌이 언제까지나 유유자적 강호의 풍류를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다시 선생을 불러들인 것이다.
     종복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밥을 빼앗아 먹고 떠들어대며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까지 때려도 그저 `아프다 아파'할 뿐 노여워하지 않는 호호야-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자상하면서도 엄해 말을 건네거나 웃는 적이 드물었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위치하고 있다.

     

     반구정은  원래이름은 낙하정落河亭임.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기암절벽위에 위치하는데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는 뜻에서 이름지었다.



    <일화--4>
     선생의 3남 수신(守身)이 기생과 사귀어 관계를 끊지 못하자 어느날 선생이 관복을 갖춰 입고 문밖까지 나와 아들을 맞이했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손님으로 알고 이렇게 맞이하는 것이다”하였다. 수신은 이로부터 기생을 만나지 않았다.

     

    <일화--5>김종서 길들이기


     한번은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고 나서 병조판서를 제수받아 임금의 대우가 융숭하자 너무 거만스러워 병약무인했다. 어느날 공회(公會)때 종서가 술이 거나하여 비스듬히 앉았는데 수상으로 있던 선생이 이를 보고 소리(小史)에게 “지금 병판의 앉은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의자의 다리를 고치도록 하라”고 일렀다. 종서가 듣고 너무도 황공하여 머리끝이 저절로 쭈뼛해짐을 느끼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육진을 개척할 당시 밤중에 적의 화살이 날아들어 책상머리에 꽂혔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 땀이 적시려는구려”


     

     

     

    황희 정승의 동상 4월에가면

    주위에 목련꽃이 많이 피어있음

     

     

     

     

     

     


    <일화--6>
     천성이 검소하여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늘 가난하여 방바닥에 멍석을 깔고 지내며 “이 자리가 참 좋구나. 까실까실하여 가려운데를 저절로 긁을 수 있으니”하던 방촌.
     87세에 조정을 물러난 그는 조용히 만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뜰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창밖에 복숭아가 익자 동네 개구장이들이 이 녀석 저녀석 다 몰려들어 마구 따먹었다. 방안에서 책을 보던 황정승은 벙긋 웃으며 내다보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일렀다.
     “얘 이놈들아, 다 따먹지는 말아. 이 할래비도 맛 좀 봐야지” 잠시후 나가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고 빈 나무 뿐이었다.
     황정승은 아마 또 한번 허허'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빈 나뭇가지처럼 이 지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끝났음을 알고 편안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지송!~

     

    위는 앙지대.

     

     

    1392년 정몽주 등의 반대에도 공양왕을 몰아내고

    이성계가 조선의태조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유신들과 황희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지만

     그들은 외부와 완전히 연락을 끈고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은거하며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두문 불출"

    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황의정승의 감성 리더십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명재상을 한 명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황희(黃喜, 1363~1452)를 떠올릴 것이다. 황희는 조선조의 최장수 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며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면서도 따뜻한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현대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감성 리더십의 대가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황희의 절반이라도 따라갈 만한 인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원칙과 소신 없이 이합집산을 일삼는 정치꾼들이 난무하고,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마치 자신의 사적도구인양 마음대로 휘두르며 군림하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문지면을 보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에 관련한 기사가 끊이질 않는다. 요즘의 세태를 보면 황희와 같은 위인이 더욱 절실히 그리워진다.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면서도 따뜻한 인간미와 배려심을 잃지 않았던 황희의 감성 리더십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아니 오히려 더욱 빛날 것이라 여겨진다.

    황희에 관련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배움을 얻어 보도록 하자.

     

    첫째는, 겸허한 배움의 자세다.

    황희가 젊은 시절 고려 말기에 관직에 있을 때였다. 도성에서 일을 보고 잠시 쉬기 위해 도성을 빠져나와 논길을 걷는데 어떤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이끌며 밭을 갈고 있었다. 황희가 다가가서 농부에게 물어보았다.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황희를 데리고 멀리 가더니 거기에서 황희에게 귓속말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그런 농부를 보고 황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하찮은 소를 보고 물어보는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와서 귀에까지 대고 속삭일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농부는 노기를 띠며 황희에게 말했다.

    "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가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

    그 말을 듣고 황희는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며, 농부에게 사과와 함께 가르침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어떤 사람의 말이든지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며 배울 줄 아는 황희의 겸허한 자세를 현대의 리더들은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다.

    황희가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들이 서로 시끄럽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황희가 물어보자 한 여종이 싸운 연유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아뢴다. 끝까지 듣고 난 황희는 “네 말이 옳다.”라고 말했다. 다음에는 싸움의 상대편 여종이 싸운 연유와 자신 입장에 대해 말하자 이번에도 황희는 “네 말이 옳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당신은 이 사람도 옳다고 하고 저 사람도 옳다고 하니 너무 줏대가 없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자 황희는 또다시 말했다. “당신 말이 옳구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세상사 시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한쪽의 입장에서만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편견에 치우치게 되고 끊임없는 갈등이 연속되게 된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헤아려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를 보여야만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갈등도 풀어나갈 수 있다. 자기 정당의 입장에서 언성을 높이며 몸싸움까지 벌이는 정치인들은 역지사지의 태도를 익혀야 할 것이다.

     

    셋째는 청백리의 실천적 모범이다.

    황희가 정승임에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담장도 없이 살아 마당이 더럽다는 얘기를 들은 세종은 황희를 위해서 비밀리에 공조판서를 불러들여 황희의 집 주변에 몰래 담장을 쌓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공조판서는 건축업자 여러 명을 모아 비가 오는 밤을 택해 황희의 집으로 가서 몰래 집 둘레에 담장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기척에 바깥으로 나온 황희에게 들키고 말았다.

    다음 날 공조판서는 황희에게 불려 가서 꾸중을 듣게 된다. 실은 어명이었음을 알게 된 황희는 세종을 알현해서 가난하게 담장이 없이 사는 백성이 너무나 많다며 담장을 쌓으라고 했던 세종의 명을 거두어달라고 주청하였다. 세종은 물론 주변의 신하들은 황희의 청렴함에 마음으로 큰 감동을 하였다.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람을 누가 따르려고 하겠는가? 따라서 깨끗하지 못한 리더일수록 강압적인 리더십을 보이게 된다. 감성 리더십은 스스로 떳떳하고 깨끗한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으며, 조직원을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리더십인 것이다.

     

    넷째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황희는 언제나 부드럽고 배려심이 깊었지만, 부하의 잘못을 제대로 짚어줄 줄도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지적이나 질책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꾸짖었는데 부하들은 오히려 더욱 반성하고 존경의 마음으로 황희를 따랐다.

    언젠가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김종서는 북방의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되어 6조에 들어와 거만함을 떨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의정 황희가 정승과 판서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 미리 와서 있었는데 잠시 후, 김종서가 들어왔다. 그런데 무례하게도 김종서는 영상대감이 앞에 있는데도 거드름을 피우며 삐딱하게 앉았다.

    그러자 황희는 바깥의 시종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병조판서께서 의자의 다리 한쪽이 짧으신가 보다. 어서 와서 의자 다리 한쪽을 손질해 드려라!!!"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종서는 놀라며 자신의 무례함을 빌고 용서를 구했다. 이날 이후 장안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사나운 호랑이와 여진족이 공격하는데도 두 눈 깜빡 하지 않던 호랑이 장군이 황희의 한마디에 놀라며 빌었다'

     

    현대사회는 물질적인 발전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할수록 우리 인간은 마음의 공허를 느낀다. 따라서 현대는 ‘감성’이 주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기업경영에서도 감성 마케팅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리더십에서도 감성 리더십이 필요시 되고 있다.

    따라서 원칙과 소신에 충실하면서 스스로 실천적 모범이 되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가득한 인간미 넘치는 리더십을 펼친 황희의 감성 리더십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지침과 본보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황희정승의 일화가 생각나네요

     

    집의 하녀 둘이 싸우다가 황희 정승에게 와서 하소연하였다. 한 하녀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 정승이 말하였다.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네 말도 옳다." 황희 정승이 들은 후, 말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
    그러자 황희 정승은 말했다.
    "당신의 말도 옳소."

     

    이 모순 해법의 지혜는 어떤것인가?
    황희정승은 공사가 분명하여 시비를 가려야할일과 덮어두어야할일을 분명히 가려 처신한것 입니다.집안의 여자 종들이 일하다가 일어난 싸움은 시비를 가리면 한쪽을 나쁘게 만들어서 오히려 반목이 생겨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잘잘못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수하 사람들을 두루두루 보듬어 가는지혜. 황희정승 하녀이야기 일화는 "중도의 지혜"를 가르침이며 대립관계의 양쪽을 조정하여 화합을 추구하고자 함일것 입니다.

    # 황희정승이 어찌 분별력이 없고 시시비비를 가릴 줄 몰랐겠는가!

    사람이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존재란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입장을 바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하면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갔던 것이라 짐작된다.


     

     

     황희 정승의 미소

     

    세종대왕의 마음이 한때 불교 쪽으로 기울어진 적이 있었다. 
    조선 통치 사상은 유교였는데, 왕이 불교에 마음이
    기울었음을 알고 유생들이 항의했다고 한다.

    먼저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시위했고 간언하던

    집현전 학사들도 이에 호응하여 집현전을 비우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 임금은 황희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나를 버리고 갔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그 후에 황희 정승은 몸소 여러 학사의 집을 찾아가서
    집현전에 나오기를 간청하며 돌아다니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젊은 학사를 만나 설득하다가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고
    크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희 정승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고한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의아하여 그 뜻을 묻자,

    황정승은 "저 젊은이의 곧은 기개가 장차 조선의 빛이 될 것이요."
    라고 말했다고한다.

    우리는 흔히 세대차이를 말하며 걱정을 많이 한다.
    원칙과 명분을 지키고자 정승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젊은 학사의 기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또한, 그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황희 정승과 같은
    포용력을 가진 어른이 그립기도 하다.

     

     황희 정승의 리더쉽

     

    사실 황희 정승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의 대부분은 다소 윤색이 되었을 일화들을 통해서인 것이 사실입니다. 기억도 되살릴 겸, 가장 유명한, 하지만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일화 한 개를 다시 한번 함께 보시지요.

    검은 소, 누런 소 이야기입니다.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황희는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를 데리고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희는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고 하지요.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황희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황희는 이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았고, 평생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황희 정승에 대한 역사적 사실 몇가지를 살펴보시지요.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유배를 갔던 황희는 60세인 세종 4년에 의정부 참찬으로 복귀했습니다. 어제 드라마의 장면입니다.
    그후 강원도 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쳤고 69세에 영의정에 오릅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며 '태평성대'를 만듭니다.

    황희 정승은 서출이었다고 합니다. 첩, 그것도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지요. 그리고 황희는 평소에는 너그러웠지만 큰 일에는 시시비비를 가리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김종서를 자주 야단쳤는데, 이는 성품이 너무 강한 김종서의 기운을 미리 꺾고 경계해서 훗날 중요한 자리에 올랐을 때 가볍게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특히 황희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공명정대하게 원칙을 살리면서 난립하는 의견들을 조정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설득'에도 능했습니다.
    소헌왕후 승하후 세종이 왕실가족을 위해 불당을 지으려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반대하며 동맹파업을 했을 때, 그들을 찾아 하나하나 설득해냈습니다. 여든 나이의 영의정이 직접 찾아와 설득을 했으니 젊은 유학자들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90세까지 살면서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끌어갔던 리더 황희. 그처럼 온화하고 겸손하며 남을 배려할줄 아는, 하지만 중요한 일에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원칙을 지키며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지닌 그런 리더가 아쉬운 요즘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면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
    자운서원(율곡,신사임당 안장),반구정(황희정승-갈매기벗-말년)

     

    볼거리를 찾아서 다니는데 이런 곳도 있구나
    할 정도로 좋았고. 서울 근교에 이런 장소도
    있었나 라고 감탄하게 했습니다.

    오늘 올리는 곳은 구파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장곡휴계소를 지나 공순영릉, 자운서원, 임진강 폭포어장,
    화석정, 반구정, 그리고 아쿠아랜드입니다.

    공순영릉은 예조의 원비 장순왕후와 성종의 원비와 영조의
    맏아들 진종과 효순왕후의 능이다. 두 왕후는 한명회의 딸들입니다


    자운서원은 율곡선생의 사당과 신사임당이 안장된 곳이다.
    반구정은 황희정승이 갈배기 벗삼아 노년을 보내던 곳이다.

    화석정은 율곡선생님이 정자를 지워놓고 갈매기 벗삼아
    노년을 보내던 곳이며 바로 강건너 북한의 송악산이 보인다.


    인사청문회 VS 황희정승

     

    참 요즘에 TV를 보면서 혀를 차는 일이 많아졌다.

    드라마나 쇼, 오락 프로들에 재미를 안붙이려고

    애써 외면하며 지낸지도 십여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그래도 "뉴스는 봐야 짐승이 안되지" 하며 신문이나 TV를 잠깐씩 본다.

     

    세상 돌아가는 것, 구체적으로 나라 돌아가는거 보노라면

    한숨에 자조썩인 썩소만 짓게 되어 입에 가급적 안 올리고

    "정치하는 저자리가 원래 그러니까 그렇지" 하며 먼 발치에서 본다.

     

    전철을 약1시간씩 타다보니 전철을 탈때는 지하철에 배포된 두가지의 신문은 빼놓지 않고 보고

    사무실에서 일간지 신문과 석간신문, 스포츠신문, 주말에 발행되는 시사주간 신문까지 꽤 적잖게 정보를 읽으며

    가끔 YTN뉴스와 방송3사의 뉴스와 인터넷 뉴스, 저녁 늦게 방송되는 시사관련, 또는 토론방송을 시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니 적잖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습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며

    다양한 비판을 청취하며 나름대로의 비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어느 자리에서 써먹을 지식을 습득하는게 아니다보니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할때도 있으며

    꼼꼼히 외우거나 기억하지는 못하는 면이 없잖아 많지만 그래도 얻어가는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큰 물줄기의 방향을 아는 것도 같고

    변화의 조짐을 끄집어내어 앞날에 대한 예측도 나름대로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거다.

    맞던 맞지않던 그런 예상과 관측이 생겨난다는건 좋은 의미가 아닐까?

     

    두서없이 시작하다보니 상당히 길어질수도 있겠다 생각되어 읽으시는 분이 있다면

    정신건강을 위해서 쭉 밑에 답글이나마 남겨주시면 고맙겠다고 미리 말씀 드려야할것 같다.

     

     

    ...

    개인적으로 역사를 참 좋아하고 철학도 좋아하며 지혜서들에 빠지는 것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혼자서 책을 탐독하는 정도밖에 안돼어 어느 모임에서 토론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배경과

    "나 같은 사람이 걱정할 정도의 일이라면 뭔가 큰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강조의 의미가 있겠다.

     

    "역사를 모르면 그 잘못된 일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된다."라는 말에 깊이 동감한 기억이 떠오른다.

    또한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가운데 참 미덕으로 자리잡고 있던 '청렴결백'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사실  '청렴결백'이라는 숭고한 단어가 간절히 생각나서 이 긴 서론을 이어왔다.

     

    얼마전에 장관내정자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하도 기가차고 어이가 없고 하늘이 노랗게 보여서

    "이일을 어쩐다."하며 분을 삼키지 못한 속내를 이제야 털어 놓아야겠다.

     

    "착한 사람을 장관 시켰더니 도둑놈 되었다." 도 아니고

    "도둑질 하던 놈을 장관 시켜서 사람 만들자." 고 하는 것인지?

     

    사람 눈에 들어난 티가 저 산더미만한데 모든 행위를 기록한 하나님의 책에 들어날 들보가 얼마나 많겠는가?

    도둑놈이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잘했다고 하는 놈은 도둑놈이 아니라 필경 강도나 사기꾼이 분명 할거야!

     

    오늘은 좀 한가해서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을 읽다보니 두 번째 강의 제목이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이 있었다.

    "그렇지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아니 대한민국이다."

     

    정직, 이것은 만상의 기초를 든든하게하는 첫째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법치국가에서 법을 지키는 덕목은 첫째 공무원과 정치인이 가져야만할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다스림의 자리에서 믿음을 얻고 존경을 받고 따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보다 나를 속이지 않는 정직만한게 어디 있는가? 속여 빼앗아 많은 것을 주고 또 더 많이 주겠다 하여도 나는 있는 것으로 만족할테니 당신은 당신이 갈 길을 가게나 하겠다.

     

    아랫물이 흐린것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흐린 윗물이 내려와서는 좀체 맑아지지 않는다.

      

    부싯돌이 생각난다.

    71인의 염원을 담은 황희정승 절개가 생각난다.

    이시대의 황희정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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