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몽고풍과 고려양

작성자원장|작성시간19.08.30|조회수221 목록 댓글 0

■ 몽고풍과 고려양

몽고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전에 돌입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로 옮겼던 왕실은 39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삼별초는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하여 계속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삼별초를 해산하였고, 삼별초는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제주도에서 진압되고, 고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몽고는 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꾼 뒤 고려를 지배하고 간섭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임금의 이름에 원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충’을 넣어 지을 정도로 굴욕적인 간섭을 받았다. 충렬왕 이후 고려의 왕들은 왕세자가 되면 어릴 때부터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 했다. 자연히 몽고말을 쓰고 몽고 풍습이 몸에 익게 되었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만 했다.

원이 고려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이를 통해 싫든 좋든 각종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고려에 들어온 몽고의 풍습을 ‘몽고풍’이라 한다. 처음에는 주로 상류층 귀족들 사이에 퍼졌으나 차츰 일반 백성들에게도 몽고풍이 유행했다.

우리의 전통 풍습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가운데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 꽤 많다.

여자들이 귓볼을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나 전통 혼례에서 결혼식 때 신부들이 입는 원삼과 머리에 쓰는 족두리, 그리고 얼굴에 찍는 연지·곤지가 대표적인 것이다.

족두리는 원래 몽고 여자들이 쓰는 외출용 모자였는데, 고려로 전해지면서 혼례용 모자로 사용되었다.

또, 이마와 양쪽 볼에 빨갛게 연지·곤지를 찍는 것은 몽고 여자들이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한 풍습이라고 한다.

언어에도 몽고풍이 남아 있다.

우리말의 벼슬아치, 갖바치, 장사치 등 단어에 ‘치’가 붙는 것은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치’는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 글자이다.

또,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가 자기 아내인 세자빈을 가리키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황제나 귀족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갓난애란 뜻의 높임말을 가리키는 ‘아기’, 시집 안 간 처녀에 대한 경어를 가리키는 ‘아가씨’ 등은 주로 원의 궁중에서 쓰이던 단어로 원 출신 공주들의 영향으로 고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몽고는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목장으로 운영하기 적당한 한라산 200~600m 지역에 말을 키우게 해서 제주도를 말 공급지로 삼았다.

그래서 한라산 중턱에 초지대가 발달하게 되었고, 제주도에 지금도 말이 많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몽고어의 흔적은 특히 제주 방언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고어에서 조랑말은 ‘조로’라고 하고 얼룩말을 ‘알락’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주도에서 조랑말이 되었고 얼룩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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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풍과 고려양

음식에도 몽고의 흔적은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설렁탕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몽고 사람들이 양고기를 삶아서 국물을 만들어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몽고의 주식인 만두도 고려 시대에 널리 전해졌다.

밀가루를 반죽한 것에 오이, 박, 버섯 등의 속을 넣거나 팥으로 속을 넣어 쪄먹었던 만두를 '상화'라고 불렀는데, 몽고말 ‘상화’를 한자로 적어 고려인들은 만두를 ‘쌍화’라고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만두이다.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라 고기를 잘 먹지 않았는데, 몽고의 영향을 받아 고기를 넣은 만두를 먹게 되었다.

우리에게 친근한 소주와 호떡도 몽고의 영향이라고 하니 놀랍다.

소주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술인데, 이것이 아라비아를 통해 원나라로 들어왔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고려에도 소주가 들어와 지금까지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비교적 독한 술인 소주는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즐겨 마셨고, 몽고에 의해 고려에도 소주 만드는 법이 전해졌다.

또, 몽고의 머리 모양인 변발(머리를 뒷부분만 남겨 놓고 다 깎은 뒤 남은 뒷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황비홍 스타일)과 옷이 유행했다.

이것은 원나라와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 고려 왕실이 일부러 관리와 백성들에게 권장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민왕 때부터 반원 정책을 펼치면서 몽고풍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변발’과 몽고 옷을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퍼진 풍속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와 풍습에 녹아있다.

원나라의 영향은 새로운 문물이 고려에 들어오는 기회가 되어, 천문·역법·의학·수학 등 새로운 학문이 전래되었다.

역법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절기에 따른 농사의 시기를 정확하게 알려주어 생산량 증대를 가져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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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풍과 고려양

고려의 문화가 원나라에 퍼져나간 경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주요한 경로는 수많은 공녀들과 환관들이 끌려가서 원나라 황실 내부 고위층에 고려인이 많아지다 보니 이들을 통해 저절로 고려의 풍습이 전파되고 유행하게 된 것이다.

또, 공녀로 몽고에 끌려간 여인네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고려의 음식이나 옷, 언어 등이 전해지면서 고려의 문화는 몽고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를 ‘고려양’이라고 한다. 특히, 기황후가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고려 문화의 영향은 커지게 되었다.

비록 고려가 몽고의 간섭을 받긴 했지만, 당시 고려의 문화 수준은 몽고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원피스 모양의 전통 중국식 한푸와 다른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 조합의 고려 스타일이 원대부터 명대에 이르는 중국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이 역시 고려양이었다.

이러한 여성 복식 외에도 남성 복식도 영향을 받은 것이 있는데 두루마기를 걸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고려청자와 나전칠기, 고려의 먹과 종이 같은 문물 이외에도 우리 전통 한과인 ‘유밀과’를 ‘고려병’이라 부르며 즐겨먹었다.

시루에 떡을 해먹는 것과 상추와 같은 쌈채소도 고려인들이 몽고에 전해 준 것이다.

공녀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심어 기른 것을이 몽고인들도 즐겨 먹게 된 것이다.

몽고에 끌려간 공녀들은 ‘비파’라는 악기로 고려의 음악을 연주하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고려악’이라 하여, 지금의 K-팝이 유행하듯이 고려의 음악도 인기가 많았다.

원조 한류인 셈이다.

고려양은 원나라 때의 유행
으로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명나라 시대에도 한동안 유행이 계속됐으며, 명나라 건국 후 100여년이 지난 홍치제에 들어서야 원래 중국 풍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중국의 드라마나 영화 중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보면 이러한 복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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