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작성자원장|작성시간20.04.02|조회수214 목록 댓글 0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인 신씨 1편

거창군부인 신씨의 아버지는 두 번에 걸쳐 장원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이고, 어머니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딸 전주 이씨로, 종친세력
이었다.

워낙 연산군의 악명(?)이 높다
보니 왕비에 대해서는 별로 알
려진 바도 없고, 남편을 잘못 만나 우리 역사에서 거의 존재감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왕실 유례 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
다.

13세가 되는 1487년 3월 신씨
를 세자빈으로 삼으라는 성종
의 교지가 내려진 뒤 이듬해 2월 14세에 두 살 어린 세자 이융(연산군)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날 몹시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이 날의 비바람은 앞으로 순탄
하지 못한 그녀의 인생을 예고
한 것은 아닐까. 왕세자(王世子
)로 있던 융(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
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
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졌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
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
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
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폐비 (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왕이므로 죽
은 뒤 시호를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신씨 부인도 역시 시호(〇
〇왕후)를 받지 못하고 그냥 ‘거창군 부인 신씨’라 불리우고 종묘에도 위패가 모셔지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
씨(愼氏)는 온순하고 근면하
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지는 훌륭하고 덕이 있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왕은 비록 미치고 폭정을 일삼
았지만,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
게 대해주어, 연산군마저도 그
녀의 덕을 높이 사고 매우 소중
히 여겼다고 한다.

신씨는 내명부를 이끄는 왕비
였으면서도 궁녀와 후궁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을 정도로 순
진한 성격이었다.

오죽했으면 사관들마저 "중전
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내지을 정도였다.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
란하고 방종의 극치를 이루는 것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
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곡하고 절실하게 간하였다.

연산군도 그녀가 '궐내 야당'으
로 직언을 해도 듣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칭찬 했다.

중종반정 당시 울부짖으며 왕
(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남편인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지만, 별다른 죄가 없는 신씨는 폐비로 강등되기
만 했을 뿐, 별다른 처벌없이 외가에서 지낼 수 있었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에서 31세
(1506년)로 곧 죽은 반면, 폐비 신씨는 30여년을 더 살다가 1537년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5남 1녀를 낳았는데, 이 중 폐세자 이황, 창녕 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 휘순 공주
(徽順公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두 아들마저 중종반정 때 폐서인-위리안치 과정을 거쳐 모두 사약을 받아 죽고, 휘순공주만 남았다.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도 비명
횡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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