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표암(豹菴) 강세황의 작품세계

작성자根熙 김창호|작성시간11.09.30|조회수440 목록 댓글 0

표암(豹菴) 강세황의 작품세계

(1713-1791)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

 


자화상

 

 

자화상 2

 

강세황(1713-1791)은 호 표암 판중추 강현의 아들로 늙어서 벼슬길에 올라 정조 2년에 문신 정시에 장원하여 한성 판윤 호조 병조 참판을 지냈다 예서를 비롯하여 각 서체에 증하고 산수 사군자에 뛰어났다 특히 사경에서 산수화는 채색의 농담으로 암석의 입채감을 표현하는 화법을 썼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이며 평론가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또는 첨재이다. 60세가 넘어서야 벼슬을 살기 시작하였고, 72세 때인 1784년에는 천추부사로 연경에 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세황은 특히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생 동안 습기(習氣)나 속기(俗氣)가 없는 문인화의 경지를 추구하여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통해 그의 그림에 대한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현존 작품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많아 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여러 산수화첩 외에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 폭의 초상화도 남기고 있는데, 자화상은 그가 묘사력도 뛰어난 화가임을 보여준다. 진경의 표현에도 관심을 두어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과 같은 독특한 느낌의 진경 산수 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벽오청서도〉와 〈피금정도〉 등이 유명하다.

 

 

 

니금산수(泥金山水) 선면 비단에 니금 23.6*67.3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양식으로 보아 청초 정통파 산수화법을 받아들인 우리 나라 문인화의 대표적 예로 원경(遠景)의 산과 바위 표면의 묘사에 있어서 그 질감과 양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마피준(麻皮 )에 속하는 일련(一連)의 부드러운 필선을 사용하였다. 근경(近景)과 원경을 채우고 있는 호수인 듯한 잔잔한 물 위로 떠 오른 조그만 배 위에는 낯익은 어부의 모양 대신 여인 인 듯 날씬한 모습이 보여 무슨 사연이라도 말해 줄 듯 하다.

 

'모든 나무는 울긋불긋 가을 바람에 물들이고 금빛과 푸른빛의 여러 봉우리에는 낙조가 비친다' 라는 두 구절의 칠언시는 선면(扇面) 형태 때문에 넓게 퍼진 화면의 오른쪽 윗 부분을 메우고 있다. 이 그림은 표암의 부드러운 행초서(行草書)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자극이 없고 담담한 가운데 시원하고 평화로운 맛을 자아내어 문인화의 정신이 잘 투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송도기행첩 청청담(松都紀行帖 淸淸潭) 화첩 종이 수묵담채 32.8*53.4 국립중앙박물관

 

<송도기행첩>의 한 작품으로 선과 색감은 모두 맑고 명랑하며 구도(構圖)도 매우 참신한 시각을 잡고 있다. 바윗더미의 묘사에서는 대담하게 준법(浚法)에서 벗어나서 색채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했으니 이런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백석담(白石潭) 종이에 수묵 담채 32.8*54cm 국립중앙박물관 (東항 기증)소장

 

강세황의 〈백석담도〉는 강세황이 개성 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송도기행첩》에 있는 그림 중의 하나로 미법(米法)을 토대로 하여 대담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적하고 각진 계곡 바위들이 강세황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바위를 크게 부각시켜 표현하였다. 뒤의 낮은 산은 붓을 뉘어 점을 찍듯 미점으로 표현하고 바위는 윤곽을 그리고 엷게 음영을 주었다. 야산과 바위가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형태에 시선이 끌리는 작품이다.

 

<송도기행첩>에 실려 있는데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 화첩 중에도 <백석담>은 <영통동구>, <청석담>과 더불어 백미로 꼽히는 수작(秀作)이다.

 

강세황의 실경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개성과 특성을 갖추고 있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 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 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渲染)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될 수 있다.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족자 종이 담채 36*73.7cm 토쿄 국립박물관 (小倉 기증) 소장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고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안개 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널찍한 강심(江心) 에는 고깃배 하나. 애써 삿대질하는 어부가 강을 건넌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 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화면 왼쪽 위 공간에 표암(豹菴) 이라 쓰고. 그 아래 광지(光之) 라고 새긴 주문인(朱文印) 하나가. 고깃배와 대칭을 이루면서 그림에 산뜻한 생기를 북돋게 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좀 치우쳐, 여름비가 그친 뒤 안개 자욱한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 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영통동구 종이에 담채 32.8cm x 53.4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의 〈영통동구〉는 강세황이 지금의 개성인 송도 지방의 여러 명승을 두루 여행하고 엮은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17면 중의 하나이다. 화첩의 발문에 가을에 여행하지 못함이 아쉽다고 밝히고 있다시피 모두 여름 풍경이다.

 

이 기행첩은 날카로운 대상 포착과 대담한 구도,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참신하고 개성 있는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중량감 넘치는 바위의 처리는 서양의 입체 화법(立體畵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여 이채로운 분위기를 띤다.

 

靈通洞口亂石 壯偉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眼

俗傳龍起於湫底 未必信 然然環偉之觀 亦所稀有

 

그림에는 "영통동구에 난립한 바위들이 어찌나 큰지 집채만 하며 이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끼었는데 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못의 밑바닥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 넓은 장관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영통동구의 풍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바위들은 그냥 보아서는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선비나 시동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산은 윤곽을 그리고 미점으로 산골을 표시하였고, 바위는 이끼 낀 모양인 듯 녹색을 가미해 푸른 느낌을 주면서도 음영을 넣어 바위의 괴량감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종이 담채 30cm x 35.8cm 서울 개인 소장

 

강세황의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밝혀져 있듯이 중국 남종화풍의 기본적인 화보인 《개자원화전》에 실린 심주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옆에는 형식적인 울타리가 쳐져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활달하면서도 단아한 필묵법, 그리고 먹과 조화를 이루는 담채의 적절한 사용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화보 속의 심주를 모방한 것이지만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결성범주도


난죽

 

난죽2


대흥사

 


강세황(豹菴 姜世晃) - 초옥한담도/草屋閒談圖  18세기26.6 x 26.7cm


표암 강세황(1712∼1791)은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이며 평론가·감식가로 조선 후기 화단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남종(南宗) 화풍을 정착시킨 화가로 산수화 이외에도 인물·화조·사군자·초상화 등 여러 화재를 두루 섭렵하였다. 주위에 고송과 대나무가 있는 초가지붕의 정자에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는 장면을 표암 특유의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사군자


사군자2


사군자3


사군자4


산수대련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초옥한담도<草屋閑談圖 >
산수대련2

 

단원 김홍도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대화가로 성장하는데 실질적인 뒷받침을 했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鑑識眼)으로 18세기 화단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던 서화비평가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문인화가이다.

표암은 61세가 되어서야 벼슬에 나간 사대부화가로서 맑고 깨끗한 남종화(南宗畵)의 세계를 펼쳤으며, 다양하고 파격적인 기법을 시도하여 조선 후기 남종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면 중앙에 키 큰 소나무 두 그루를 대담하게 배치하고 그 아래에는 작은 초옥을 아담하게 그려 넣은 이 작품은, 미법(米法)산수화법으로 그린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와 짝을 이루고 있다. 흐린 먹으로 세부를 채워넣어 담담하고 잔잔한 배경을 만든 후 전경(前景)에는 가지의 윤곽선이 두드러지는 소나무를 대비시켜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 姜世晃 <草屋閑談圖 >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58.0 x 34.0cm




산수도


청간정


피금정도


현정승집도

 

 



강세황  도산서원도 보물 522호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영조 bomulskmhjseoul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강세황(1712∼1791)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반타석 등을 그렸다.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애일당·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 여기에는 성호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또한 이 글의 끝 부분에는 1927년 가을 최남선이 쓴 글도 적혀 있다. 서원의 배치, 건물의 크기와 방향 등이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졌으며 건물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섬세하게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나무들은 붓을 눕혀 점을 찍듯이 나타내어 당시 유행하던 남종화풍의 초기적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청간정

 

강세황(1713 ~ 1791)  <태종대> 종이에 옅은 채색 32.8 x 54.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종대에서 더위를 식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부산에 있는 태종대가 아니고 강원도 횡성에 있는 태종대입니다....   조선 3대왕 태종이 스승 운곡(耘谷) 원천석을 만나려고 바위에 앉아 기다리다가, 스승이 만나주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되돌아 갔다고 해서 '태종대'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표암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 선생님'이었고, 이 그림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화를 본 다음, 서양화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태종대 (부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의 <송석도(松石圖)>... 
1786년, 지본담채(紙本淡彩), 91.8 x 5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에 활약했던 대표적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인 강세황(1713~1791)은 노송(老松), 난(蘭), 죽(竹) 등 다방면의 소재를 다루었으며 특히 산수(山水)에 뛰어났다. 소나무는 산수화를 구성하는 한 경물(景物)로써 그려졌지만, 이 작품은 소나무의 전체 모습을 화면 전면에 부각시켰다.

 

마른 느낌의 굴곡이 심한 가지 끝에는 반차륜(半車輪)의 솔잎을 꼼꼼하게 그려 넣었고, 속이 깊게 표현된 옹이는 윤곽선을 나무껍질과 성질이 다르게 구분되도록 줄기에서 돌출시켰다. 이처럼 가까이 주제를 확대하여 그리는 것은 화보에도 없는 독특한 것이어서 그만의 독자적 구성 감각이 뚜렷하게 확립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소나무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두루 보이는데, 작품으로는 초기첨재화보(添齋畵譜)」의 <송수도(松樹圖)>, 중기「연객평화첩(烟客評畵帖)」의 <松樹圖>, 그리고 후기 74세 때의 이 작품이 있다.

 

이들 세 폭을 중심으로 그의 소나무 그림의 대체적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데, 초・중・후기를 통하여 눈에 띄는 변화는 초기에는 굵은 줄기와 솔잎가지를 아주 가까이 확대하여 표현하였고, 중기는 역시 소나무의 중간 부분만을 그렸으나 초점이 좀더 멀어져서 줄기와 거기서 나온 가지의 관계가 드러나도록 하였으며, 후기의 경우는 노송의 전체 모습이 그려진 점이다.

 

필치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활달하지만 부드럽고 무른 필법을 쓰고, 중기에는 그것보다는 좀더 담백하고 간결하며, 후기에는 노련하고 익숙한 필치로 마른 느낌의 굴곡이 심한 가지 등의 형태감에 의탁하여 고상하고 기백있는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1. 豹菴 姜世晃의 傳記的 考察 

 

  그는 어릴 때부터 등에 하얀 반점문이 있었는데 그 반점문의 생김이 마치 표범과 같아 그의 호를 豹菴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본관은 晋州이고 名은 世晃이며 字는 光之이다. 숙종 癸巳年(1713년) 閏五月二十一日 9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정조 15년(1791년)에 세상을 하직하니 표암의 나이 79세였다.

 

그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지성화가였고 서예 또한 조선조 4대가에 속한 자였다. 시재도 뛰어나 8세 때부터 시를 짓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許(  )・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 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 위 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北京使行, 76세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畵評 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習氣도 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만년에 스스로를 칭하기를 '五之'라고 하였으니 글씨의 경지는 王羲之의 筆, 그림의 경지는 顧愷之의 畵, 文의 경지는 韓退之의 文, 詩의 경지는 杜之의 詩에다가 자신의 자인 光之까지 합하여 '五之'라고 일컬었다. 이같은 그의 자긍은 詩・書・畵・文을 모두 겸비했다고 보는 것이다.

 

  작품으로는「添齋畵譜」<벽오청서도>「표현연화첩」「송도기행첩」<삼청도><난죽도> <피금정도>「臨王書帖」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2. 단원 김홍도 합작 <猛虎圖>에서의 소나무 問題


  강세황의 花卉 작품, 특히 소나무의 표현 양식과 관련하여 검토를 필요로 하는 작품으로서 <猛虎圖>가 있다.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지금까지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리고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호랑이 부분은 작가의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 부분이 강세황의 필치인가 하는 것은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강세황의 필치로 인정한다면 그의 다른 소나무 작품들과 화풍을 비교 확인해 보아야 하고, 또 모호한 점이 있다면 어떤 점인가를 찾아보는 일이다. 따라서 <猛虎圖>와 그의 소나무 작품과의 비교에서 화풍상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비교적 세부 표현의 변화는 가능하며,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었을 경우 예측할 수가 없고, 더구나 파격적인 화풍을 창출하는 그로서는 전혀 예상 밖의 작품을 그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다. 다만 <猛虎圖>와 그의 작품은 구도와 가지의 형태, 잎의 배치 등 기본적인 형식은 유사하다.

 

  그러나 실제 표현상의 필치나 개성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특히 줄기에서 가지가 연결되어 나오는 부분의 구성은 도저히 그의 솜씨라고 수긍할 수 없는 부분으로 의문의 여지를 크게 남긴다.

 

이와 같은 화풍상의 문제 외에 화면 위쪽에 쓰여진 '豹菴畵松'이라는 글씨도 의문이 간다. 우선 '豹菴'이라고 사용한 것은 대개 70세 이전까지이다. 그러니까 51세 絶筆 후 70세 경까지는 화평을 쓰는 외에는 그림 제작 활동은 하지 않은 것으로 믿어지는 시기이다. 더구나 합작과 같은 공개적인 형태로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豹菴'시절 중에 그의 생애 사정 문제로 강세황 51세 이전, 김홍도 19세 이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서명을 그의 것으로 볼 경우 합작의 시기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긴가. 반면 글씨는 후에 썼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썼을 경우에도 소나무 작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씨의 먹빛과 필치가 크게 의심된다. 즉, 힘있고 능숙한 '士能' 서명에 비하면 강세황의 글씨라고 하기에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부분이며. 오히려 이 글씨 때문에 은연중 그의 소나무 그림으로 인식되어지는 점이 있다고 간주되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합작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볼 때 이미 그의 생애에서 본 바와 같이 그와 김홍도와의 각별한 관계는 재론할 필요도 없다. 또 그가 김홍도 그림에 평을 써 준 예는 허다하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이 <猛虎圖> 외에 두 사람의 합작의 예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그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고 생각되는데, 막연하지만 신분상의 이유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猛虎圖>의 소나무는 강세황의 필치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럴 경우 오히려 김홍도의 소나무에 강세황의 요소가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결과가 되며, 이는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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