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진당(養眞堂) - 보물 제 306호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택으로 문경공(文敬公)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선생의 종택이기도 하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지붕 목조기와인데, 높은 축대 위에 세워져 누각과 같은 자태를 드러 낸다. 사랑채 정면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당당하게 게판되어 있는데, 입암은 겸암 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 선생을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건물은 조선 초에 축조된 것으로 당호로 쓰이는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 손인 영(泳)공의 호에서 취한 것이다. 양진당 현판은 근세 사람 최동진의 자필이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의 남향집이며 99칸으로 전해 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양진당의 사당은 크고 작은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 끼친 덕과 공이 4대만에 제사를 그만두기에는 죄송해서 국가나 사회에서 영원무궁토록 제사를 지내게 한 제도, 서애, 겸암, 입암선생 들이 불천위이다) 사당이며, 하나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이처럼 풍산 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에는 두 위(位)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겸암 선생 불천위 사당 담 너머로는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듯 수령이 800여 년 이상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이는데, 동신으로 모시는 '삼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학록정사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원래 하회마을에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외곽에 있던 나무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타고 남은 일부가 남아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 충효당(忠孝堂) - 보물 제 414호 충효당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이 삼칸 초옥(草屋)인 농환재(弄丸齋, 풍산읍 서미리)에서 별세한 뒤 일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장손인 졸재 원지(元之)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의하(宜河)공이 확장 중수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충효당 전서체(篆書體)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친필이다. 충효당 기문은 1706년 연안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지은 것을 282년 뒤인 1988년에 서하인(西河人) 임창순(任昌淳)의 글씨로 게판해 두고 있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서애 선생의 증손자인 익찬 벼슬을 역임한 우눌재(愚訥齎) 류의하(柳宜河) 대에 게판 되었으며 기문은 우눌재의 손자인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 대에 식산 이만부에게 청해 완성되었다. 모두 52칸이 남아 있다. 종택에는 가장 신성한 공간인 불천위 사당과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이 있다. 불천위 사당 앞에는 일명 만지송(萬枝松)이 있으며, 종택 행랑채 앞마당에는 다소 원형이 손상된 불탑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 탑은 원래 서애 선생의 재사(齋舍)인 상로재(霜露齋) 뒷 편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 하동고택(河東古宅) - 중요 민속자료 제 177호 하동고택은 서애파로 용궁현감을 지낸 류교목 공이 현종 2년에 창건하였다. 24칸의 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 집이다. 하회 동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하동고택이라 부른다. 이 집은 최근 '하회마을 선비의 집'으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을 찾아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의해 겸암 선생의 후손으로 신구 학문에 일가를 이룬 우천(友川) 류단하(柳端夏) 옹을 모신 것이다. (4) 하회북촌댁(河回北村宅) - 중요 민속자료 제 84호 하회북촌댁은 경상도 도사를 지낸 석호 류도성 공이 철종 13년에 창건한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앙반집이다. 대문간이 7칸으로 그 중앙에는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채와 대문간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다. 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앞 뒤로 배치되어 있으나 하나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는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납도리에 홑처마로 비교적 수식이 없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높게 건축되어 영남에서도 이렇게 웅장한 건물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현재 54칸이 남아 있다. 하회북촌댁은 웅장한 안채가 인상적이다. 화산으로 옮겨 모신 입향조의 무덤에서 마을을 바라볼 때 건물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북촌댁 안채이다. 안채에는 마을사람들이 신행 올 때 이용되었음직한 가마가 높은 시렁에 올려져 있다. 하회북촌댁은 건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0책의 방대한 문집까지 남긴 학서(鶴棲) 류이좌(柳怡佐)와 그의 손자로서 경상도 도사직에까지 이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이 공부하던 많은 도서가 소장되어 오늘에까지 전한다. 한석봉 글씨를 모각한 화경당(和敬堂)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나 사랑 별채 문틈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겨우 석호(石湖)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5) 하회남촌댁(河回南村宅) - 중요 민속자료 제 90호 하회남촌댁은 정조 21년 형조좌랑 류기영 공이 건립한 건물이다. 1954년 화재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그리고 사당만 남아 있다. 문간채는 솟을대문이며 안채와 사랑채의 굴뚝을 통로로 연결해 한 곳으로 뽑아 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당채 부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은 한낮에도 으슥한 분위기를 자아낼 정도로 우거져 있다. 사당 뜰에도 대나무가 무성하다. 이름까지 너무나 정겨운 하회남촌댁은 주인이 외지에 살아 일반인들에게는 격리되어 있다. 건물 내에는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이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하회에서 유일한 왕대나무 숲을 만날 수 있는 집이 하회남촌댁이지만 항상 문이 잠겨 있다. 그러나 왕대나무 숲이 울창한 모습을 바라보며 돌담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하회남촌댁이다. (6) 하회주일재(河回主一齋) - 중요 민속자료 제 91호 하회주일재는 서애 선생의 증손 류만하 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 주일재 류후장 공이 증축한 것이다. 주일재 공은 퇴계 선생의 도학을 사숙(私淑)하여 일찌기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벼슬에 나아가 자의에 이르렀다. 一자형의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와 사당을 갖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이 집은 항상 문이 잠겨 있다. (7) 하회류시주가옥(河回柳時柱家屋) - 중요 민속자료 제 87호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류도관 공의 호를 따서 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렀으나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당초에는 두 동으로 구성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유실되고 지금은 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우측 끝의 사랑방으로 쓰는 것과 안쪽의 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들이 서로 볼 수 없게 배려한 특징을 갖고 있다. (8) 겸암정사(謙菴精舍) - 중요 민속자료 제 89호 겸암정사는 하회마을 맞은편 부용대의 상류 쪽 언덕 위 숲 속에 있다. 맞은편에 있지만 마을 쪽에서는 낙엽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강을 사이에 두고 겸암 선생의 정자인 겸암정과 빈연정사가 마주하고 있다. 명종 22년(1567) 봄 겸암 선생이 건립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중층 누각식의 팔작지붕으로 '겸암정(謙菴亭)'이란 현판은 스승인 퇴계 선생의 친필이며, 뒷편 '겸암정사(謙菴精舍)'라는 현판은 원진해(元振海)가 9세에 쓴 것이라 전한다. 퇴계는 현판을 써주며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聞君講得新齋好), 가서 같이 앉고 싶지만 그러질 못해 아쉽네(欲去同牀恨未如)'라고 했다. 창건 유래는 정사 안에 게판되어 있는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기문(記文)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9) 빈연정사(賓淵精舍) - 중요 민속자료 제 86호 빈연정사는 겸암 류운룡 선생이 45세 때인 선조 16년(1583)에 진보 현감으로 있다가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사퇴하고 돌아왔는데, 이 해 4월에 빈연정사가 완성되었고 선생은 이곳을 서재로 사용했다. 조그만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하는데 마을 북쪽 부용대 맞은편 물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 역시 화천의 물길과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동향으로 지어 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집이다. 빈연이란 정사 정면의 부용대 밑을 흐르는 깊고 맑은 연못을 말한다. 빈연정사란 현판은 조윤형(趙允衡) 글씨로 알려져 있다. 완송문(玩松門)이란 현판은 외정(畏庭) 류장하(柳長夏) 글씨이다. (10) 옥연정사(玉淵精舍) - 중요 민속자료 제 88호 옥연정사는 부용대 동쪽에 있다. 선조 19년(1586)에 서애 선생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 향리로 은퇴한 선생께서, 임진왜란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징비록'을 구상하고 지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당초 이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탄흔이란 중이 자청하여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할 수 있었다 한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고 했다. 서당은 대청과 좌우에 방을 두었는데 방은 완적재(玩寂齋), 마루는 원락재(遠樂齋)이며 정문은 간죽문(看竹門)이라 했다. 원락재 현판은 지금도 볼 수 있으며 논어 귀절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아'에서 따온 이름이다. 옥연정사는 울창한 숲을 끼고 있어 그 경치는 하회마을 안에서도 손꼽히는 곳인데, 이 정자 옆에는 선생이 직접 이름지은 능허대(凌虛臺)와 보허대(步虛臺)가 있다. 배에서 내려 옥연(玉淵) 바위 계단으로 올라 간죽문을 통해 정사로 들어가는데, 간죽문 주변의 대나무(烏竹) 숲은 더욱 아름답다. 간죽문을 나서면 천혜의 절벽인 부용대 벼랑 3부 능선으로 겸암정까지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층길'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다소 위험하지만 마을 사람들 말로는 나무지게를 지고도 내왕했을 정도였다 하니 당시 두 형제분께서 즐겨 이 길로 오갔음이 분명하다. 절벽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며 이곳을 오가며 바위에 새겨진 암각서를 통해 선생의 발자취도 더듬을 수 있다. (11) 만송정(萬松亭) 만송정은 겸암 선생의 정자로 지금은 손수 심은 소나무 숲만 남아 있다. 1983년 4월 청명일에 14대 손인 우천(友川) 류단하(柳端夏) 옹의 기문이 적힌 '만송정비(萬松亭碑)'가 16대 종손 류상붕(柳相鵬)씨 명의로 세워져 있다. 현재 만송정에는 한 기의 비석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정자가 있었는지 아니면 소나무를 심고 그 곳을 정자로 삼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최근 겸암 선생의 둘째 사위인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 선조 2년, 1569∼광해군 12년, 1620)의 문집에서 '하상송정기(河上松亭記)를 발견하여 정자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경암은 안강(安康) 노씨의 대표적 인물로 1591년(선조 2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주목사를 지낸 사람이다. 경암은 어려서는 여헌 장현광에게 배웠고 성장해서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침잠했다. 서애 선생은 임종 때에 셋째 아들 수암 류진을 보고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중후하고 침정(沈靜)함이 이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너희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라 했다. 훗날 수암은 경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12) 상봉정(翔鳳亭) 상봉정은 겸암 선생의 증손자로 현감을 지낸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공이 도학(道學)을 강론하기 위해 임인년(현종 3년, 1662년)에 세운 정자로 하회 서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봉황새가 날아 오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정자 이름은 힘찬 글씨로 인해 더욱 정겹다. 회당은 마을 건너편인 이 정자에 내왕하기 위해 정자 밑 강가에다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상봉정이란 정자 명칭은 서애 선생께서 이곳 절벽을 '상봉대(翔鳳臺)'라 부른데서 따온 것이다. 상봉정은 다시 회당의 증손자인 양진당(養眞堂) 류영(柳泳)에 의해 중수되었다. '서애집'에 보면 '서애는 지금 상봉대로 이름이 바뀌었다(西厓 今改名 翔鳳臺)'라는 기록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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