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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6-06-07

작성자김요안|작성시간26.06.11|조회수19 목록 댓글 0

<말씀증언>

여호수아경 1.1-18

다시 거듭남의 길로

 

1. 우리는 체계있는 신앙을 형성하자는 취지에서 교회 절기에 맞추어 주일 말씀을 읽어가고 있다. 교회 절기는 이제 성령강림절기로 접어들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는 초기 교회에 큰 힘을 불어넣어 주신, 현실세계에 행하신 강력한 주님의 활동이었음이 분명하다. 교회 공동체는 그 역사를 통해서 외적으로는 부흥의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적인 변화도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러한 요청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강림의 역사는 거듭남과 구원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우리는 지난 두 주간 동안 읽고 헤아렸던 주님의 수난과 그분의 부활 모습을 가슴에 담고, 가나안 정복의 과정을 더듬으면서 거듭남의 길을 배우고자 한다.

 

2.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서론적인 내용이 될 수 있겠는데, 사실 성경은 마디마디마다 그 첫 부분에서 다루어질 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여호수아경의 첫머리에서 그것을 헤아려 볼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가지 문제는 짚어보기로 하겠다. 여호수아경은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욱이 그 가운데는 ‘헤렘’이라는 진멸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종학살이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만 읽은 결과로 여겨진다. 사실 학문적으로 보면, 양식비평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은 강의시간에 공공연하게 내적 해석을 자주 언급했던 것으로 제자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양식비평의 틀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20세기의 위대한 구약학자로 칭송받는 게르하르트 폰라트(Gerhard von Rad)는 “가능한 한 빨리 거기서 떠나서 배후에 놓여있는 도달해야 할 진정한 문제로” 옮겨가야 한다고 보았지만, 거룩한 전쟁의 주제를 놓고는 ‘제의’라는 틀 속에 한정하는 데 그쳤다. 말하자면 궁켈은 영적 해석을 소개했지만, 폰라트는 그런 이해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에둘러 말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때마다 밝히는 것은, 성경은 본문을 철저하게 상세히 읽어야 하지만 그것은 그 말씀 안에 담긴 뜻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얽매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서 문자주의를 거부하고자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내적인 의미들을 찾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전쟁을 우리는 내적인 싸움이라는 영적 이해를 가지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싸움과 전쟁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3. 여호수아경 1장 본문으로 돌아가자. 모세가 죽었을 때 주님은 출애굽 과정에서 그를 보좌하던 여호수아를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셨다(수 1.1-4).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성경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시대가 마감된 이후에 애굽에서 태어나 40년 동안 애굽 왕자로서 살았고, 또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쳤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 그의 생애 나머지 40년을 광야에서 지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바라만 보았다. 그의 역할은 끝났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부여된 임무다.

 

4. 모세와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가는 과정에서 수행했던 역할분담이 분명하다. 그 둘은 말씀을 대표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위인들이 주는 모습을 마음에 새기게 되고, 또 여기저기 줄을 쳐가며 굳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죄악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올바로 살도록 지시하고, 믿음생활에 지칠 때 용기를 갖게 하고 위로하면서, 만나를 먹이듯이 우리를 먹이며 거친 광야를 지나게 한다. 이것이 모세다. 또 말씀의 뜻을 우리가 열심히 배우지만 기억하기만 하면, 그것은 모세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는 기쁨을 얻을 때 그것은 여호수아다. 모세가 광야를 인도할 때 여호수아는 그를 돕는 ‘섬기는 자’(머솨렛, משׁרת)로만 남아있었다(1절). 아직은 말씀의 깊은 영역을 어쩌다 깨닫게 되는 상태가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살지만 세속에 전혀 물들지 않고, 말씀의 깨달음이 끊임없이 계속되며 선을 이루는 삶을 이끌게 될 때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거듭남의 외적 상태를 인도하는 지도자의 표상이고, 여호수아는 내적 상태를 인도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 둘 모두 말씀이신 주님을 표징한다. 모세는 말씀의 겉뜻으로서 주님을, 여호수아는 속뜻으로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거듭남은 크게 나누면 외적, 내적 두 단계 또는 두 차원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이제 여호수아의 인도는 그 둘째 단계 또는 차원에 진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5. 여호수아의 임무는 이스라엘 자손이 땅을 차지하게 하는 일이다(6절). 여기서 ‘땅 차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유산을 물려받는 일을 의미한다.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상속인으로서 천계를 물려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말씀에서 ‘상속’이란 천계에 관해서 말할 때는 특히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으로 인해서 선 안에 있는 사람, 결국 거듭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참조. AC 9274). 사람으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예외없이 그 ‘상속’을 받을 사람으로, 곧 상속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호수아에게 명하시는 임무, 곧 땅을 물려받는 일은, 말하자면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인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6. 여호수아가 차지하게 해야 할 땅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먼저 그 땅은 ‘요르단강을 건너가야’ 있는 땅이다(2절).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 내용은 3장에서 자세히 읽게 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요르단강 세례’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그 땅은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곳’으로 표현되어 있다(3절). 발로 밟는다는 것은 ‘발 아래 둔다’거나 ‘발등상이 되게 한다’는 의미와 같다(시 110.1; 마 22.44). 발로 밟으면 발밑에 있는 것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듯이, 제어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지배와 통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들어가려는 요르단강 건너 땅은 이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곳’을 주시겠다는 것은 그들을 제어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음에 그곳은 ‘헷 사람들의 땅’으로 표현되었다(4절). 역사적으로 파악하면 이전에 그 땅은 헷 족속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헷족은 ‘하티’ 또는 ‘히타이트’로도 일컬어진다. 그들은 오늘의 튀르키예 지역에 제국을 건설하였고, 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넘어서 그들이 고대교회의 후예들이었으며, 말씀에서 에덴동산으로 그려진 태고교회의 정신적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이들이라는 사실이다(참조. AC 4447). 가나안땅이 ‘헷 사람들의 땅’으로 지칭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7.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차지하도록 명하신 땅을 ‘주께서 주시기로 맹세하신 땅’이라고 말씀하신다(6절). 여기에 ‘주께서 맹세하셨다’고 표현되어 있다. 누가 맹세하는가? 맹세는 아주 외적이고 자연적인 사람들이 진리가 증명되기를 원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내적이고 영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맹세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특히 하느님이나 하늘 같은 거룩한 것을 두고 하는 맹세를 회피한다. 다만 말로써 진실을 알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맹세는 내적이거나 영적인 사람에게 속하지 않으며,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내적인 또는 영적인 사실을 가르치셨고, 그것을 위해서 거룩한 것들로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셨다(참조. 마5.33-37). 그러나 여기서 맹세하셨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표상과 표의 교회 안에 있었던 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일이 허락되었고, 특히 야곱의 자손들에게 그랬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참조. AE 608). 말하자면 출애굽 이전에 조상들의 시대에 그들에게 맹세를 허락하셨던 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8. 가나안의 땅차지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할 것은 물론이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계속되는 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사실 출애굽 도정과 지금까지 걸어오며 겪어왔던 광야의 인내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일이기도 하다. 모세의 영도 하에 출애굽 재앙을 겪고, 더위와 갈증을 넘어서고, 굶주림을 견디고, 드디어 바로의 추적을 피해 바다를 건넜지만 40년 광야를 유랑해야 했던 것보다 더 힘겨울 것이라는 뜻이다. ‘더 센 놈들’이 그곳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땅을 차지하고 있는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그들을 멸절시키지 않는다면, 그 땅의 새 주민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의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 때문에 거듭 ‘강하고 담대하라’고 용기를 주신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님은 거듭해서 그 험난한 싸움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다. 다시 거듭남의 길로 나서는 신앙인들, 아니 한걸음 더 들어간, 거듭남의 내적 차원으로 들어서려는 신앙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들에 힘입어 용기를 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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