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증언>
여호수아경 2.1-24
두 사전 준비
1. 여호수아는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하기 전에 두 일을 진행한다. 그 하나는 요르단 동쪽에 땅을 분배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나쎄 반 지파에게 선봉에 서도록 준비시킨 일이고, 다른 것은 강 건너편에 있는 예리코성을 정탐하게 한 일이다. 오늘은 그 두 일을 배우기로 한다.
2. 여호수아는 두 지파와 반 지파를 불러놓고 그들이 모세와 맺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민 32장).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르단강 동쪽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르우벤과 갓과 므나쎄 반 지파는 모세에게 청한다. ‘우리는 가축이 많은데, 이곳은 가축을 치기에 아주 좋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요르단강을 건너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말한다. ‘너희 형제는 싸우러 가는데, 너희는 싸움을 회피하려는 것이냐?’ 그러자 그들은 약속한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 살 수 있도록 성읍을 잘 마련한 뒤에 우리가 그 싸움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길르앗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3. 길르앗을 차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길르앗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사람이 처음으로 이루는 선 또는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즐거움을 뜻하는데, 사실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몸의 감성에 속하는 것이고, 또 무엇보다도 먼저 거듭날 때 개시되는 일을 가리킨다(AC 4117). 그것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남들을 위해 무언가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면서 이루는 봉사 같은 일을 했을 때 얻게 되는 보람이나 즐거움이 있게 될 것이다. 길르앗의 영적 의미가 이런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을 분배받은 이들이 가나안 땅 차지에서 선봉에 선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경험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축(미크네, מקנה)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것은 아직 양이나 소같이 개별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몰아서 취급된 집합명사이다. 미분화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박하지만 선한 충동들 또는 정동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가나안 땅차지에서 앞장을 선다는 것은 그러한 충동들이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동들에 힘을 받아서 거듭남의 내적 차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르단강 동쪽 길르앗 지역의 땅을 차지한 르우벤과 갓과 므나쎄 반 지파가 가나안땅의 점유에서 선봉에 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소박하지만 선한 일들을 하고자 하는 충동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거듭남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준비되어야 할 첫째 사항인 것이다.
4. 그러나 그 추동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선봉에 서지만 그것뿐이다. 그들이 자기 역할을 완수했을 때 그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요르단강 이편은 그들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기는 하지만, 가나안땅이 아니라 강 저편을 차지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이 발휘하는 힘은 육체적 속성이기 때문에, 육체적 속성에 한정될 뿐이다. 신앙인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말씀에서 요르단강 동편이 천계의 모습인 가나안땅에 속하지 않고 희미하게, 가끔 필요할 때마다 보이는 정도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살과 피는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50)는 훈계를 떠올리게 된다. 살과 피 곧 혈육(血肉)은 어디까지나 혈육이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갈 때는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지만, 그 역할은 하느님 나라의 어느 공간을 차지하게 될 때까지 필요한 것이고, 또 그때까지 도움을 주는 것일 뿐이다. 그 뒤로 어느 순간에는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혈육이라는 게재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속성은 있지만 없는 듯이 잠재(潛在)할 뿐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5. 이제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자.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불러서 명한다. ‘가서 보라, 그 땅과 예리코를’(1절, 개인역). 그들은 ‘머라글림 헤레쉬’(מרגלים חרשׁ)로 규정되었다. 이는 은밀히 또는 말없이 걷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 염탐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여호수아는 그것을 직접 발설하지는 않았다. 단지 ‘가서 보라!’고 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본 바탕, 됨됨이를 낱낱이 파악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주께서 그분을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요 1.39). 그 둘은 그분의 거처를 ‘가서 보고’ 그날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해준 말만 듣고 그분을 따랐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꾸어 말하면 피상적으로만 알지 않고, 그 됨됨이를 바로 파악하여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지금 여호수아도 현재의 가나안을 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그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했다. 요즘 말로 ‘팩트체크’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확인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이며 어떠한지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그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 땅차지에 선행되어야 할 둘째 과제이다.
6. 그들이 예리코에서 찾아 들어간 곳은 라합의 집이었다. 아마도 통상적으로 나그네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어는 그녀를 ‘이솨 조나’(אשׁה זונה)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창녀’로 번역해야 가장 알맞을 것 같다. 아무튼 우리가 그녀에게 부여해야 할 내적 성격은 두 사항일 것 같다. 먼저 그녀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짝을 바로 짓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남편이 없고 또 짝도 바르게 맺은 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라합과 같은 모습을 주님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한테서 보게 된다(요 4.1-26, 특히 17,18,20절). 남편 없는 여인이 주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바른 길로 가게 된 것이다. 라합은 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는 진술이 그것을 알려준다(15절). 성벽은 도성을 방어하는 벽이다. 그래서 내적 의미로 그것은 ‘교의’로 헤아려진다. 신앙과 삶을 바르게 유지하고 또 유도할 수 있는 지침인 것이다. 라합은 지금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그 교의가 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내보인다. 이른바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물론 ‘온 땅’이 주님의 역사를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해오는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 정탐꾼이 옴으로써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7. 그녀의 입으로 전해진 주님의 역사는 두 사항으로 파악된다. 첫째는 ‘갈대바다’(얌 숲)의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이고(출 14.16), 둘째는 바로 요르단 건너편에서 행하신 아모리 두 왕을 진멸시킨 일이다(10절). 갈대바다의 일로 애굽의 파라오 군대가 몰살했다. 이제 길르앗 지역의 아모리 두 왕이 또 진멸되었다. 진멸! 씨를 말렸다는 말이다. 주께 거슬러서 살아남을 자들은 없다! 그래서 ‘온 땅의 주민들’은 마음이 요동친다(9,24절). (개역전통은 예전의 사전적 의미파악과 문리역(喪膽)을 따라 이를 ‘간담이 녹는다’고 옮긴 것 같은데, 원어 ‘’나모구(נמגו)는 심정적인 동요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출렁이는 현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나약해지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11절). 인간 영혼의 두 갈래에 혼란이 온 것이다.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지성과 의지라는 두 영적 기능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들리지만 바른길을 찾으면 안정될 것이다. 짝을 제대로 맺으면 순조로운 삶을 다시 영위하게 될 것이다. 정탐꾼 두 사람을 지붕에 감춘 것이 그 시작이다(6절). 마지막 때에 지붕에서 내려오지 말아야 하고(참조. 마 24.17), 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듯이 그들은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이다(마 6.6). 영적으로 높은 상태를 지향하고 또 그것을 유지되도록 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 진입의 교두보는 형성된다. 거점, 디딤돌이 마련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