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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돌교회 이야기 - 03 ] 예수 다시보기 - 서로 - 와 보라 하시네...

작성자덤 목사|작성시간16.03.01|조회수44 목록 댓글 0

 [ 2016년 산돌교회 이야기 - 03 ] 예수 다시보기 - 서로

 

 

 

와 보라! 하시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부름도 공관복음서와 달리‘와 보라’이다. 그러면 와 보라와 나를 따르라로 구별되는 이 부름은 다른 것일까? 그 당시 와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상황을 여는 첫 대화는 세례 요한과 그들의 두 제자 사이에서 시작된다. (요 1 : 35 이하)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이곳에서 생명의 흐름은 아니 생활의 진전은 하나님말씀이 육체를 이루고 하나님이, 바로 영이 물질이 되는 길로 열려 있다. 육체인 몸을 움직여야 하는‘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길이다.‘나’가 힘들여 하나님 나라로 가야하는 구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나’에게 물밀 듯 밀려오는 새로운 생활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렇게‘나’에게 온 하나님과‘서로’가 된 예수가 새롭게 살아가는 새 생활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니 따라 가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요한의 두 제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예수를 따라 나섰고‘서로’인 예수께서 각자‘나’인 그들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 이후 이제까지‘나’에게서 시작한 생명의 흐름은 육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가고 물질이 구별되고 순화되어 초월하는 영이 되는 익숙하게 가고 늘 가야 할 길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 자유와 해방을 향해 가는 길,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바로 그 길의 끝자리에 예수께서 계실 터이니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살아가시는 새 길은 말로 설명할 설계도가 아니다. 가르치는 율법의 말씀도 아니다. 그 율법과 설계도가 완성된 온 몸의 삶이요 새 생활이다. 그러니‘화음’을 음표로 표기하지 못함처럼 그 새 생활도 말로 설명이 안된다. 그러니 대답은 의외로 쉽다.

 

와 보라!

 

   육체의 삶에서 진리와 영으로 가고, 가야하는 구도의 옛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영으로부터 육체의 생활로 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내 육체에 이루어진 새 생활이요 새 길이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내 육체의 사람살이가 되는 거룩한 새 길이요 새 생활이다. 내 육체가 주인 되어서 분주하게 살아가야 할 숨차는 하늘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 되고 내 육체와 하나 되어서 시작하는 한 멍에를 맨 새 길이요 이 땅에서의 새 삶이며 하나 된‘서로’가 육체와 물질을 자기답게 하는 이 세상을 향한 새 생활이다. 그러니 대답은 하나뿐일 수밖에 없다.

 

와 보라!

 

  “모세가 율법 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 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나와야 할 것이 아니다.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이 아니다. 가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다. 기다리던 지금여기에 등장해야할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여기에 와 있고 무대가 열려 공연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미 지금여기에서 삶이 곧 생활이 되었다는 것이다. 와보라는 말은 가서 보자는 말이 아니다. 와보라는 말은 온 몸으로 알아보라는 말이다. 바라보는 그 삶과 생활이 그가 사는 삶과 생활이 아니라 바로 그 삶과 생활이 바라보는 내 자신이 사는 삶이요 생활인 것을 알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겠지.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와서 보고 알아보라는 것이다. 아무리 듣고 들어서는 따라 살 수 없지만 생활에 와서 보고, 또 보면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요한이 세상에 들어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인 예수는 소리 뒤에 오는 삶이요, 입으로 하는 말 뒤에 오는 생활이라며 자기는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니 지금여기에서 삶이 되는 생활은 흥하여야 하고 그 삶과 생활이 오실 것이라 전한 말은 쇠하여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세례 요한의 단호한 말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 3 : 30)

 

   그러니 지금여기에서 그 생활과 새 삶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인 현존하는 우주적인 현실이 된다. 놀랍게도‘서로’인 사람이 사는 지금여기에서는 하늘도 땅도, 영도 물질도, 현존하는 생명 자체가 된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라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전 우주적이며 영원한 생명과 통하는 총체적인 생활이 열린다. 이같은 우주적인 현존은‘나’가 아니라‘서로’일 때 가능한 현실이요 생활이다. 그러니 더 늦게 전에‘서로’인 나를 구하고 두드리고 만나고 찾아보라. 오직‘서로’일 때만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는 신앙의 시작이 되고 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린다. 그래서 ‘서로’이신 예수님은 강조하고 강조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 더 큰일을 보기 위해 요한복음 2장을 펴 보자. 쓰나미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2장의 말씀 속에는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나님의 천사들도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요한복음 2장으로 가 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여기인 요한복음 2장에 와보는 것이다. 와보면 사흘째 되는 날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보는 눈을 뜨시길 축원한다.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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