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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말씀

사랑하고 있습니까?

작성자소망최상호|작성시간26.06.11|조회수36 목록 댓글 0

사랑하고 있습니까? / 2026년 6월 14일 주일 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13:1-7
 
저는 지금도 가끔 꿈에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수학 때문에 말입니다. 이해도 안 되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수학 수업은 꿈에서도 저를 위축되게 합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난 왜 작아지는가' 라는 노래처럼 아주 작아지게 합니다. 그런데 수학이 저를 작아지게 했던 것처럼 믿음을 배우는 지금 저를 작아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 서면 수학 앞에서 위축되고 한 없이 작아졌던 그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저에게 사랑은 이해가 되지 않고 풀기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근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것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해해도 풀기 힏든 문제가 아닙니까? 수학은 포기해도 됩니다. 다른 과목에서 만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됩니까?  사랑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헌금이나 십일조로 만회가 됩니까? 성경 통독이나 필사나 금식 기도나 봉사나 전도나 구제나 예배나 헌신으로 참작이 됩니까? 은사나 능력이나 영적인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식으로 상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서 낙제하면 별 짓을 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충격적인 진리를 증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수학이 가장 어려운 과목입니다. 거기서 성적이 판가름 나듯이 믿음을 배우는 성도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단연코 사랑입니다. 헌금도 예배도 기도도 은사도 봉사도 구제도 헌신도 전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 없어도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지만 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 의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위선과 외식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못합니까? 사랑도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천사처럼 말을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고 배려합니다. 아주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얼마나 사랑이 많아 보이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합니다. 돈이 힘과 영광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환장한 것이 아닙니까?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성도들도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재산으로 구제합니다. 정말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주었습니다.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5년 전에 일본에서 한국의 한 유학생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것도 외국에서 자신을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를 의인으로 기억하며 고귀한 희생을 추모합니다.
천사와 같이 사랑이 충만한 말과 자신의 전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구제와 위험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버린 그 희생이 사람들이 볼 때에 사랑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과연 그러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람은 눈에 보이고 드러난 그 외모와 외형으로 판단하지만 영적인 하나님은 중심과 그 근원까지 보신다는 겁니다. 무슨 동기로 한 것이냐?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단순히 현상과 형식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용과 원천까지 보시는 겁니다.
성전에서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신 주님이 왜 부자들의 많은 연보보다 한 가난한 과부의 작은 연보를 기뻐하셨습니까? 더 많이 했다고 하신 겁니다. 그 중심까지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부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큰 사랑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큰 믿음과 소망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감히 사람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차이를 하늘과 땅으로 비교하십니다. 만약 지나가던 개미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어떤지 안다면 사람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알게 될 지도 모릅니다. 
본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것보다 더 크고 고귀한 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사랑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보이지만 충격적이게도 그 안에는 사랑이 없을 수도 있는 겁니다. 사람이 볼 때에 겉은 놀라운 사랑이란 형식으로 아름답고 근사하게 포장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진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이미 주님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여도 그것이 믿음의 절대적인 증거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불법을 행한 자들로 정죄하시고 나를 떠나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저져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금 값이 한 돈에 백 만원 가까이 합니까? 금이 정말 금 값이 되었습니다. 뉴스에 강도들이 금은방을 털었다는 사건도 종종 나옵니다. 금과 밀도나 무게가 비슷한 텅스텐에 금을 살짝 도금하여 팔기도 한답니다. 금은방의 주인도 감쪽같이 속는다고 합니다. 잘라서 그 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손님이 팔려고 갖고 온 것을 확인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잘라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도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에는 가짜들이 나타납니다. 돌이나 철을 가짜로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상품은 가짜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짝퉁이 넘쳐납니다. 오히려 시장에는 짝퉁이 더 많이 유통됩니다. 명품을 살 여력은 없고 싼 값에 폼을 내고 싶은 허영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속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짜를 사는 것입니다.
복음 즉 진리에도 짝퉁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복음은 참 생명,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만드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는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만 수 십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가짜에는 가짜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믿음도 조작하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인 것처럼 꾸밀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인데 먼저 제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고 있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내 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질문은 제 자신을 아주 작아지게 합니다. 과연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 앞에서 서면 작아지지 않습니까? 고개가 숙여지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에 가장 흔한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입니다. 얼마 전에 끝난 선거철에 여러분은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표현을 많이 해야 한다고 인식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전에는 어색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풍성해졌을까요? 홍수가 나면 정작 마실 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도 호남 사람입니다. 우리 서도 사랑해야 합니다! 허공에 외친 그 의미없는 울림이 세상에는 널부러져 있지만 사실은 사랑은 아주 희귀한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지만 싸구려는 아니듯이 사랑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지금 이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에 그저 표면만 사랑으로 살짝 도금한 값싼 사랑만이 난무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타락한 인간들이 잠시 나누는 육신의 사랑도 점점 싸구려가 되가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정욕은 자아숭배의 욕망이 아닙니까? 저는 타락한 인간에 사랑이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타락한 인간이 즉 죄인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만 본분에서 즉 성경에서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제 결론은 타락한 인간은 사랑할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노래를 듣고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고 눈물을 흘리지만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신에게 유익이 될까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자신만 사랑하는 자로 타락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아숭배입니다. 내가 하나님 즉 왕과 주인이라고 타락한 자들입니다. 자신을 섬기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이고 왕이고 주인인 그 자리에 즉 타락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서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고,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친구와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과연 남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주인 됨을 즉 자아를 숭배하는 그 이기주의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아무리 닦아도 희게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먼저 남의 유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남의 유익을 구하는 형식을 취해도 그 안에는 고귀한 희생으로 포장된 자신의 고상한 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증명하려는 의도이며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의 교만도 있지만 겸손한 자의 교만도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타락한 자아숭배일 뿐입니다. 결론은 타락한 인간은 사랑할 수 없는 자이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 사랑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마저도 자신을 자해하는 것으로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즉 하나님을 떠난 죄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습니다. 내 안에 음식물이 들어오고 힘과 생기가 있어야 자연의 아름다움이 들어오고 자연을 보호할 맘이 생기는 것이지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데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까? 금강산이 음식이라면 다 먹어치우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배고품에 굶주리면 자기 자식도 삶아 먹었습니다. 자기 속으로 낳아 젖을 먹이고 키운 자식을 자기 손으로 잡아 먹는 겁니다. 반대로 자식이 힘이 있으면 부모를 안 잡아 먹겠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그 육적인 사랑도 먼저 자기 만족이 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만족이 그 진짜 만족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사람의 만족은 하나님께 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의 만족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만족을 잃은 것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로 만족하려고 해도 그 순간 뿐이지 밑 없는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그것이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쉴새 없이 그 밑 빠진 독에 물이 사라지기 전에 새로운 마취제와 진통제를 들이 부을 수 있지만 결국은 독은 텅비게 됩니다. 만족이 없는 자로 드러납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자로 드러납니다. 한 평생 자기만을 위해 헛 되게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겁니다.
내 마음과 영에 만족이 있어야 남을 위한 만족이 나옵니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내놓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그 마음과 영 안에 내 생명의 주인이며 창조자이신 주님이 계셔야 즉 만족한 자가 될 때에 사람은 비로소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어야 내놓을 수 있는 겁니다. 결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참 사랑은 사람에게서(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이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 무엇을 떠올립니까?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떠나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근원과 원천이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즉 나의 자아숭배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회개할 때 내가 마음과 영혼과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진짜 주인이신 주님이 주인의 자리에 좌정하실 때 생명의 주인이며 사랑의 원천이며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뜨거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이 내 마음과 영혼에 충만하게 임해야 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금방 콸콸 흘러나옵니까? 수원지에서 가정의 수도 꼭지까지 수도관이 연결이 된 즉시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 꼭지에 입을 대고 빨아도 안 나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합니다. 수도관이 물로 꽉 채워져 수압이 차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그날을 향해 가는 겁니다. 난 왜 사랑하지 못할까? 난 왜 사랑할 수 없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것이 맞은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런 의문이 한 방울 한 방울 뚝뚝 떨어지는 사랑의 수도에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사랑 앞에 자신을 세워 보십니까? 사랑의 수도꼭지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까?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의 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3-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은 나에게 온전한 즉 완전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확증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을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은혜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 죄를 십자가에 주님이 다 짊어지시고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대속해 주신 겁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셨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무조적으로 말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이었을 때, 흉악한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신 겁니다. 먼저 사랑하신 겁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주신 겁니다. 그것이 한량없는 은혜가 아닙니까? 감당할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도 갚을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믿으십니까? 그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그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십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결국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 안에 오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즉 육적자아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날마다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 사랑이 충만하기 원합니다.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사랑의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작아지지만 그것을 통해 은혜를 회복하고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부족하고 힘들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성장과 진보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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