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5:1~2 -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지난 로마서 14장은 교회안 두 부류의 믿는 자에 대한 어떠함을 보았다. 믿음과 지식과 영적 분별에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바르게 돌 볼 필요가 있고 믿음과 지식과 영적 분별에 약한 자는 강한 자를 판단하지 말고 순복할 것을 명함 받았다. 많일 그렇지 못할때 마지막날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강한 자는 강한 자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약한 자는 약한 자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것이 바울의 강한 논조였다.
*마24:48~51 -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후5:9~10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이제 로마서 15장으로 넘어온다. 바울의 논조는 진리 안에서 순리를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해야하고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돌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흐름과 생명의 격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만일, 그 흐름이 거꾸로 되고 역리로 흐를때 그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담당하고 약한 자의 약점이나 부족함을 돌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강한 자는 강한 자 자신의 기쁨이나 만족을 위할 목적으로 약한 자를 굴복시키거나 약한 자를 혹 이용하거나 해서는 않된다. 성경은 강한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약한 자에게는 적게 요구했음이다. 그만큼 강한 자의 책임이 무거운 것이다.
*눅12:48 -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강한 자에게 책임이 무거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강한 자에게 그 책임을 담당할 위치를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정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에 맞지 않은, 감당하지 못할 지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우리의 생명의 장성함과 지식의 어떠함과 믿음의 강함에 따른 생명나무 안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이 목적이 된다. 이 노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노선이 아니며 생명나무의 노선임을 알 필요가 있다.
선을 이루는 문제는 율법의 문제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더군다나 덕을 세우는 문제는 율법의 문제보다 훨씬 높은 문제이다. 실상 선은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19:16~17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우리는 흔히 선과 악의 어떠한 기준을 법이나 율법에서 찾는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질문을 던졌던 어떤 사람도 그 기준을 율법에서 찾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청년에게 말하였다. "어찌 선한 일을 내게 묻는 것이냐? 너의 관점에서 선한 일은 내가 아니며 율법의 계명들이니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서 영생을 얻으라" 함이다.
이후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님은 율법의 계명보다 더욱 어렵고 힘든 요구를 하시게 된다. 주님은 왜 율법에도 없는 더 중한 계명을 그에게 주셨고 그것들을 지켰을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하셨을까? 주님의 목적과 의도는 이것이다. "네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할진대 너는 그것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너는 율법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영역에서 눈을 돌려 생명나무로 돌이키고 영생의 실상인 그리스도를 주목하라"는 것이다.
*요3:15~16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5:39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6:51, 54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영생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혹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가능한 일임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그분의 모형인 율법과 율법의 계명 안에서 선악과를 주목했다. 우리는 영생의 문제뿐 아니라 성화의 문제에도 또 성화의 단체적인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도 생명나무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생명을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바울은 선을 이룰 뿐 아니라 덕을 세우라고 주문했다. 덕을 세운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덕을 세움의 문제는 선이나 악의 관점 차원이 아니다. 덕은 생명의 풍성함과 생명의 이득을 말하고 있다.
*엡4:29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전10:23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덕을 세우는 문제를 다루었다. 모든 것이 가하다 함은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비록 가할찌라도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모든 것이 죄스럽거나 악하지 않은 일이기에 그것을 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덕을 세우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요 미덕을 끼치는 것이다.
우리는 선악간만 판단하면 끝이요 문제가 없다고 해서는 않된다. 비록 그것이 죄가 아닐 수도 있고 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하거나 먹음에 있어 감사가 되고 오히려 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는 덕이 되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책망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왜 그러한가? 우리의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의문의 법 혹은 율법이요 또 하나는 생명의 법이다. 율법의 법 차원에서는 선이냐 악이냐의 양분법 외에는 없다. 그러나 생명의 법은 율법의 범위를 초월한다. 율법에서 비록 선이라 한 것도 생명의 법에선 책망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지식이 있고 강한 자가 먹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고 가하다 하였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선한 것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먹음이 약한 지체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며 비방거리를 제공 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음이다. 그는 감사했으나 자신의 먹음은 덕스럽지 못했고 오히려 생명의 법으로는 악을 행한 것이다.
율법과 생명의 법이 항상 일치하리라고 생각지 말라. 율법은 생명의 법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 이 율법을 좇는 자들이 되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율법이 포괄할 수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생명이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법을 소유하고 있음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신령할지 모르나 그것은 생명의 법의 모형에 불과함이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성으로 내려가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된 자의 예화를 잘 알고 있다. 그 길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를 보고 안타까와 했을 뿐 도와주거나 구원해 주지 못한 사건을 우리는 안다. 왜 그들이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율법으로 성전을 섬기는 자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그를 도와주게 되면 그들은 부정하게 된다. 율법은 주검을 접촉하는 자를 부정하다하여 격리시켰고 정결의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을 섬겨야 되는데 부정케 되어서야 되겠는가?
*레11:40 -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민5:2 -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밖으로 내어 보내되"
율법은 그림자와 모형이기에 이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생명의 어떠함을 증거하고 가리키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보기에 율법의 법과 계명들이 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율법이 말하는 그것은 생명나무의 생명을 표현하는 기법에 불과하지 그 계명들이 곧 생명은 아니란 사실이다.
또한 율법이 말하는 악이 실제 악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표현 기법에 불과한 것이지 율법이 말하는 그 자체가 마귀의 더러운 생명은 아니다. 율법이 말하는 선과 악을 통하여 그 선악의 실체와 율법의 실체적 생명인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이 율법을 그림자와 모형으로 주셨다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의도이셨다.
그것은 생명나무이신 우리 주님이며 또한 악한 영인 마귀를 가리킨다. 곧 율법이 가리키는 선한 것의 참은 우리 주님과 우리 주님의 생명이며 또 율법이 가리키는 악의 참 실제는 마귀와 마귀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덕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선 율법 차원에서는 분별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의 법안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명나무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주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 이 완전의 의미는 모형으로써의 율법이 그 모형의 실체를 드러내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모형 아래에 굴복하려 하는가? 모형의 때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그 모형의 참 실체인 생명나무 아래에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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