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계시의 완전성(3).
시내산 언약 당사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이다.
율법은 시내산 계약 내용이다.
이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합의 사항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역할에 충실한 결과이다.
시내산 언약 체결은 모세당시의 소나 양을 사고파는 과정과 같다.
여호와께서는 계약 체결을 위하여 모세만을 나아오게 하신다.
시내산에서 돌아온 후에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율례를 백성에게 고한다.(출24:3)
이는 매도자의 요구사항을 매수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이에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한다.(출24:3)
이는 매수자가 매도자의 조건을 수락하는 일이다.
그 결과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계약이 설립된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다.(출24:4-5)
이는 계약 내용을 담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는 계약한 대로 시행된다는 확정이며 선언이다.
모세는 번제와 화목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단에 뿌린다.
이는 매도자가 계약서에 인감도장을 날인하는 일이다.
모세가 기록된 계약서를 낭독하자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말한다.(출24:7)
이는 기록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이다.
이에 모세는 남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고 말한다.(출24:8)
이는 매수자의 인감도장을 계약서에 날인하는 일이다.
이처럼 계약이 체결된 후에는 계약 당사자 간 교제의 악수가 이루어진다.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신 것이다.
모세는 율법을 선언하여 나라를 설립한다.
십계명은 헌법이며 율법은 나라를 경영하는 법률이다.
법률을 보완하는 시행령은 판단관들의 판단이다.
율법이 말하는 바를 따라 이루어지는 재판관(판단관)들의 판단과 가르침이다.
모세 당시에는 천부장과 백부장들의 판단으로,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행령의 모음집이 장로들의 유전이다.
이처럼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특별계시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온전한 계시가 아니다.
이는 휘장의 장벽 가운데서 주어진 계시이기 때문이다.
죄 아래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맞춰진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
각 시대 백성에게 주어진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통로이다.
구약에서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각 시대 중보자를 믿는 믿음이다.
여호와께서는 중보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중보자를 통해서만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아담 당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는 아담의 하나님으로,
노아 당대와 그의 후손에게는 노아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 당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증거하신다.
모세 당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으로,
모세 당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중보자 모세를 믿음으로 그를 보내신 여호와를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을 믿음으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구약 중보자를 통해서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
신약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아들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 사역의 방식은 항상 중보자를 통한다.
구원역사의 중요한 변환기마다 중보자를 세우셔서 이전보다 진전된 경륜을 시행하신다.
이러한 하나님 사역을 요약하고 압축한 것이 계보이다.
이것이 창세기의 10개의 계보와 역대기의 계보,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 계보의 내용이다.
따라서 계보의 내용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방침의 내용이다.
구원역사가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하여 어디로 향하는지를 나타낸다.
구원역사의 종착점이 어디인가?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목표로 한다.
창세 이후의 하나님 뜻과 경륜은,
옛 언약에 의거한 하나님 사역은,
죄 아래에 잇는 옛 백성의 수준에 맞춰진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과 동행하신다.
죄로 인한 휘장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사신다.
구약시대에서는 사람 중보자를 통해서 종의 영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따라서 구약시대 역사한 성령은 종의 영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서는 아들을 중보자를 통해서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령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하는 아들(양자)의 영이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언약적인 관계를 따라 역사하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믿음은 휘장의 장벽이 있는 믿음이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과 온 후를 대비한다.(갈3:23-29)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이며 구원 역사적으로 기록된 하나님 나라 언약서이다.
모세와 사도들의 증거방식은 하나님 중심적이며 구원 역사적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과의 대비는 구원 역사적인 대비이다.
이는 율법의 통치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한다.(갈4:4-5)
이는 모세율법(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율법 곧 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 아래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모세율법(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라고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율법과의 대비가 이를 반증한다.
구원 역사적인 율법과의 대비는 하나님 통치질서의 대비이다.
이는 옛 경륜과 새 경륜의 대비이다.
율법의 통치는 사람을 통한 간접 통치질서이다.
율법의 아래에 있던 때는 종과 어린아이와 같다.(갈4:1=3)
그러나 복음의 통치는 아들을 통한 직접 통치질서이다.
이는 아무런 가리움이 없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질서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율법의 행위와 믿음과 대비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와 믿음과의 대비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 역사적인 대비이다.
마태의 증거를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말씀하신다.(마19:13-15)
왜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어린아이가 예수께 나아왔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율법 아래에서는 숫자에 낄 수도 없는 나중된 자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예수께 나아온다.
먼저된 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를 거절하지만
어린아이는 예수께 나아와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부자 청년과 제자들과의 대비를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마19:16-30)
성경은 하나님 계시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증거하신다.
모세율법과 제도를 따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구원은 세상적이며 땅에 속한 구원이다.
하늘에 속한 온전한 구원,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히 하나가 되는 구원이 아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아래로부터 나서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요1:1:12)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아버지로 증거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에서 이전의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케 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이 하늘의 질서로 완성된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케 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계시도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서 믿는 자의 아버지로 계시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직접 증거이다.
이는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아신 바된 아버지의 뜻과 경륜을 온전히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약에서는 봉인되었던 완전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나타난다.
따라서 옛 언약에서의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은혜의 일들은,
사람 중보자를 통해서 나타내신 모세율법(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서 해석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말한다.(롬3:21-22)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체결된 것이 시내산 언약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신 결과물이 모세율법인 것이다.
이러한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따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여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갈4:4-5)
율법 아래에 있는 제자들과 바울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옛 언약에 대한 신실함의 결과이다.
이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의 열매이다.
이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죄와 사망 아래에 있다는 말이다.
이는 죄 아래에서 시행된 한시적인 경륜이 율법이기 때문이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친다.
이는 율법과는 달리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이 미친다.
이처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곧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미친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히 영혼의 기능을 새롭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을 완성하는 문제이다.
에덴에 세워진 아담을 하늘에 앉은 새 백성으로 완성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본성은 죄와 죽음이 어찌하지 못하는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원한 생명체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통로이다.
영혼의 즉각적인 기능이 믿음이다.
이는 증거가 필요가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백성,
곧 하나님 아들된 백성으로 온전케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에덴 동편의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고,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는 나라로 설립되며,
종말에 보내신 아들을 통하여 하늘에 앉은 새 백성으로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을 믿는 자들에게도 주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의 영을 부으셔서,
죄와 죽음이 어찌하지 못하는 새 백성으로 온전케 하신다.
이것이 아담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아무런 가리움이 없는 가장 친밀하고 하나가 된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는 흙으로 지어진 하나님 형상인 인간이 온전케 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앉은 곳은 하늘의 성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은 하나님 얼굴 앞이다.
이는 하늘의 성소라는 말이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실체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말하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구원 역사적인 하나님 뜻과 경륜의 완성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