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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知性

다른 영이란 무엇인가?

작성자Manuha!|작성시간05.04.06|조회수191 목록 댓글 1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알지니."

나는 앞의 두 글, '다른 복음 이란 무엇인가' 와 '다른 예수 란 누구인가' 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경계했던 거짓 선지자 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사람을 미혹하는가에 대한 견해의 일단을 피력했다.


'다른 예수'란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존재, 이 세상의 임금으로 나타나는 메시야임을 밝혔고,'다른 복음' 이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사람도 또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변질된 복음을 일컬음이라고 밝혔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과연"다른 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 다른 영은 일맥상통한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다른 예수 는 실존이고, 다른 복음 은 그 다른 예수 가 전하는 복음이며, 다른 영 은 그 다른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영적 실체일 뿐이다. 다른 영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부득불 또다시 요한일서 4장 언저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진리의 영''미혹의 영' 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영들을 다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그것이 모두 진리의 영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길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더라도 그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문제는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아무도 이 말씀의 기준으로 '진리의 영''미혹의 영'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 시인하면 하나님께 속한 영 이고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의 영 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각종 교파 중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던가?

그런데 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이단 이라고 손가락질하는가?

나의 안타까움은 여기에 있다. 요한일서 4장이 요한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 이라고 선언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아우성들이신가?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고, 오늘 우리 속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여기서는 요한일서 4장이 나오게 되는 배경을 중심으로 얘기를 전개해 보기로 한다.

먼저 3장 후반부의 말씀이다. 3장 마지막 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의 관심은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이며, 내가 주 안에 거하심이다.

나의 육체 안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시인과 부인의 대상은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목수의 아들로 오신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예수가 아니라, 오늘 여기 내 안에 거하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예수이다.


그래서 시인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인하다' 는 동사는 타동사로서 목적어를 수반한다. 하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목적어) 시인합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 되심을 시인하고,

그를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사람 속에 내재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의 대통령이 김대중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김대중이 나라는 인간 속에 내재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객관적으로 시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인하다는 말이 지니는 이런 속성 때문에 인간들은 객관적인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어떠하심을 설명하고 가르치며, 그리고 그 객관적인 예수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라고 다그친다.

그런 설명을 이름하여 전도라고 하며, 역사적인 예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흔히 「영접」 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해한 예수를 긍정하고 시인하는 것을 일러,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 문제가 있다.


요한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함에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시인하는 대상이 '나' 라는 존재 바깥에 객관적이며 제 3자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존재 안에 나의 주관으로 존재하신다 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바깥에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의 주관으로 살아 계신다는 말이다. 기존의 나는 죽고(자기 부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전 존재 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글이 성경이 되는 것이다.

바울의 말과 바울의 글은 그 전의 인간 사울의 것이 아니라, 사울은 죽고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언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 다.


시인하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직접적인 언급을 살펴보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대단히 죄송하지만 부득불 원어를 인용해야겠다.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이라는 말은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 이고, 저를 시인한다 는 말은 '호몰로게소 엔 아우토' 이다.


'호몰로게오' - 시인하다는 동사가 타동사임이 분명할진대, 그렇다면 이 말 뒤에는 목적어가 등장해야 하고, 나를 에 해당하는 목적어 '메' 나, '에메' 를 사용해야 옳고,

나도 저를 시인할 것 이라는 말씀에도 저를 에 해당하는 목적어 '아우톤' 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를 은 '엔 에모이'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내 안에서 라는 부사구로서 문법적으로는 목적어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저를 에 해당하는 '엔 아우토' 역시 마찬가지다. '엔 아우토' 는 그 안에서 라는 부사구이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나를 부인하면 은 '아르네세타이 메' 로서 여기서는 부인하다는 타동사 '아르네오마이' 의 목적어로서 1인칭 대명사 목적격 '메' 가 사용되는 것이다.

나도 저를 부인할 것이라는 구문 역시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따분한 헬라어 원문을 인용하는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께서 '나를 시인한다' 는 말씀을 하신 뜻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시인은 대부분 예수가 객관적인 목적격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예수와 내가 서로 서로 안에 서로의 주관으로 존재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시인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내 안에 있어, 나의 말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될 때, 비로소 내가 예수를 시인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이며, 그와 내가 하나됨이다.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가 사심이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미워하고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인 언사를 늘어놓음이 아니다. 예수와 내가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객관적인 존재, 제 3자로 있으면서, 떠벌리는 모든 말이 예수를 부인함 이다.


예수에 대한 찬양의 말을 하건 아니면 그 반대의 말을 하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감사해도 그 찬양과 그 감사가 예수를 부인함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논점을 좀 바꾸어서, 예수를 시인하는 사람 들과 부인하는 사람 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요한은 이어지는 요한일서 4장 4절 이하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을 이로써 아느니라.”



고 말씀한다.



미혹의 영 이 내뱉는 말의 핵심은 세상에 속한 말 이다.

세상이 듣는 말이고, 세상이 좋아하는 말이다.

이 말이 무엇인가?


'다른 예수' 가 전하는 메시지들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세상에서 복 받고,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자자손손 이름을 날리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을 세상적으로 적용하는 모든 시도 들이다.


그래서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리라는 말을 하시면 베드로처럼 그리 마옵소서 한다.

왜냐?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남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 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혜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지만, 그래도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얘기, 복음의 변질이 왜 일어나는가?

그 율법이 바로 세상의 질서며, 세상의 윤리며, 도덕이며, 인간 보편의 양심이기 때문이다. 인간 보편의 양심.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 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아무리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고 소리 높여 외치더라도, 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질서, 하나님 세계의 생명 원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의 질서를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나는 지금 세상의 질서를 무시하라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치원의 도덕 선생 입에서 나올 얘기며, 또 돈 벌어 잘 먹고 잘 살자는 얘기, 세상적인 복 받음의 얘기는 대기업 회장님 입에서나 나올 말이라는 얘기다.



다른 영, 미혹의 영' 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심을 부인하는 영 이고, 그리하여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 살아 역사하심을 부인하는 영 이고, 따라서 세상에 속하여 세상적인 복과 세상적인 질서유지를 위하여 '은혜의 복음''행위의 율법' 으로 되돌리는 시도를 하고 있는 존재.


그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런 존재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그들에게 맞아 죽음으로서이다.


이것이 이김이다.


죽음을 생명으로, 지는 것을 이기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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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미쁨이 | 작성시간 05.04.06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내 안에 있어, 나의 말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될 때,)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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