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왈도파의 개략
12세기 말경 프랑스 리옹에서 P. 발데스(발두스)에 위해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순복음적인 신앙노선의 일파.
발데스복음주의 혹은 왈도파로 불린다.
부유한 시민 발데스는 1176년 갑자기 변심하여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후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또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처럼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설교에 전심하였다.
그가 프랑스어 번역판인 성서를 가지고 설교하는데 감동하여 많은 사람이 따르게 되자,
그들은 '리옹의 빈자'라고 자칭하며
2명씩 도를 짜 각지를 설교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그들의 부족한 지식으로 복음이 잘못 전해질까 우려하여 설교를 금지시켰는데,
그들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자 교황청은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들은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설교하는 교리도 로마교회와 다른 바가 있었다.
한 예로 그들은 연옥을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를 위한 연미사, 속죄를 위한 보속행위 등에 반대하였고,
서약이나 유혈을 거부하였다.
이 파는 프랑스 리옹 부근으로부터 인근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1217년 발데스의 사망 이후
이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져
특히 종교재판에 의해 그들에게 가해진 엄한 조치로 말미암아 점차 자취를 감추어갔고
16세기 프로테스탄트에 흡수되었으나
그 일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국경지대와
알프스의 보도와 계곡에 그 여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48년에야 왈도파는 완전한 시민권을 되찾아
1855년 토리노에 독자적인 신학교를 세웠으며,
대부분이 우루과이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미국으로 옮겨가,
몬타나주에서 왈도파장로교회를 세웠다.
나머지는 이탈리아와 남북아메리카에 존속되고 있다.
지금 이탈리에서 왈도파는 지도적 프로테스탄트단체가 되어 있고
이들이야말로 개혁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다.
2. 왈도파와 왈비파의 비교
왈비파는 왈도파보다 약간 먼저 시작된 단체인데
일명 카타리파로도 불리운다.
이들은 마니교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교리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은 영적인 것만을 창조하였으며
반신인 악마는 신에게 반기를 둔 인간을 물질에 가두었으므로
인간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왈비파는
성직자의 부도덕성을 폭로하고
형상숭배와 교회의 형식을 거부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도덕적인 순결을 주장하며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왈도파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왈도파와 함께 교황 인노센트3세의 1181 - 1229년의 세차례에 걸친 파병 십자군에 의해 박해를 받아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런데 왈도파는 그 뿌리가 지금도 존속되고 있고
왈비파는 약 100년에 걸친 로마카돌릭의 박해로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왈비파가 다른 이름으로 카타리파라 불리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통과의식 때문인데
일종의 세례 요한의 세례와 비슷한 것으로
일반 사람들 앞에서 통과의례를 가졌고
일반신자가 이 통과의례를 거쳐서
카타리 즉 완전한 자가 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을 다른 말로 카타리파라고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