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물감을 펴놓고 그리다 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름 고민하며 그림을 다듬고 있을 때,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한마디 건넨다.
"그거 그리면 밥이 나오나?"
그 말을 들으며 별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쓰였다. 자기 옆에서 함께 TV를 봐주기를 바라서일까. 아니면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답답해 보여서일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림을 다 완성해서 "어때?" 하고 보여주면 남편은 언제나 똑같다.
"좋아. 멋있어."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다.
홍대 부속 여중에 다니던 시절, 내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특별활동 공예반 시간에 맛본 미술의 즐거움은 어린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덕수궁에서 열리는 국전을 보러 가면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가슴이 콩콩 뛰었다. 지금도 그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람은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 안다. 다만 그 마음을 끝까지 품고 살기가 어려울 뿐이다.
가정형편은 내 꿈을 키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림은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묻혀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친구 덕분에 딸이 그림을 배우고 전공하게 되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했다.
친구 화실에 놀러 가서 우연히 그렸던 그림 한 점은 내 안에 남아 있던 꿈의 흔적을 다시 깨워 주었다.
그 후로는 남편과 함께 목회에 전념하며 살았다. 맡겨진 일에 마음을 다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오웰이 말한 '빵의 시간'을 오래 살아낸 셈이다. 생존과 책임의 시간 속에서 어느새 사십 년이 흘러갔다.
남편이 은퇴하면서 내게도 비로소 자유의 시간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였다. 유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캔버스와 물감이 쌓이는 것이 부담스러워 스케치북 한 권만 있으면 되는 어반스케치를 선택했다. 주민센터 수업에 등록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4년. 책 한 권을 내게 되었다. 그림도 내 것이고 글도 내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참 뿌듯했다.
"그거 해서 돈이 되냐?"고 묻던 남편은 정작 나보다 더 기뻐했다. 돈은 들어오기는 커녕 지출이 되었으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그림도 글도 밥은 안 나왔지만 다른 것을 가져다주었다. 설렘과 기쁨,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어제 서글서글 글모임에서는 리베카 솔릿의 《오웰의 장미》를 나누었다. 사실 이 책은 내게 쉽지 않았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 독서 수준이 부족한가 싶기도 했고, 이 나이에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결국 내 마음에 남은 것은 '빵과 장미'였다.
로즈 슈나이더먼은 "빵과 장미를 통해 단지 생존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고 했다. 오웰과 솔릿은 장미를 자유와 상상력, 자기결정권의 상징으로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어떤 장미를 심을지는 다르겠지만 결국 장미는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빵을 위해 살아왔지만, 내 안의 장미는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빵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장미는 마음의 양식이다. 상상력의 양식이고, 정신의 양식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양식이라 이 책은 말한다.
《오웰의 장미》는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오래전부터 장미가 있었다는 것을. 다만 바쁘게 살아오느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제 나는 계속 장미를 심으려 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밥이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장미는 원래 배를 채우기 위해 피는 꽃이 아니니까.
그리고 어느 봄날 문득 돌아보았을 때, 내가 심은 줄도 잊고 지냈던 장미들이 환하게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그 꽃들이 나뿐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은 위로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 삶의 뜰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장미 한 송이씩 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새날 작성시간 26.06.20 오웰의 장미
제게 큰 울림을 줍니다
저도 노년에 피아노 바이올린 붓글씨 글을쓰면서 좀 고상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젊은날에 준비해 두었는데 파킨슨 진단을 받고 왼쪽 새끼손가락이 경련으로인해 잘 안된다고 피아노 바이올린 다 나눔하고 붓 벼루도 다 나눔하고^^
사모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장미를 심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모님 그림도 글도 빕은 안나오지만 사모님의 마음이 행복해져서 행복한 밥상은 만들어 질겁니다
그림도 글도 넘 멋집니다 ^^♡♡ -
작성자성민짱 작성시간 26.06.20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살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하며 노후를 보낼 수 있음이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정말 불쌍하게 노후를 보내시는 분들이 많은 세상이라서요
자신의 남을 날을 계수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고 이 땅 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사모님의 멋진 행보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밥보다 더 귀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삶. -
작성자*수선화* 작성시간 26.06.20 멋집니다
돈이 안나오고 밥이 안나와도
자기 만족과
그림을 그릴때 아무생각도없이
그릴수 있음이 저는 좋은것 같아요
수채화 그리다선생님이 작년에바뀌면서
어반으로수업이 바겨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중 입니더 -
작성자한강 작성시간 26.06.20 밥! 생명선이라 할수있죠!
밥속에 숨었는 장미를 발견했군요
이제부터 심겨지는 장미를 통해 또다른 행복감에 젖어있을 그대를 응원할게요
나에게 숨어있는 장미도 찾아보고요 ㅎ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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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늘소망! 작성시간 26.06.22 저도 오랫동안 빵을 위해서만 살았어요.
내 안에 장미가 무엇인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정적인 것 보다는
동적인 것을 하려고 해요.
은혜로운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