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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상의 머슴과 주인 / 3

작성자백록담|작성시간18.06.01|조회수21 목록 댓글 0



머슴과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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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존재(본질)에 대해 인식하려는 노력으로서의 탐구는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지성이 제일 먼저 도입한 것은 개념이며 모든 탐구는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개념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인 조건이 되었습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탐구가 끝없이 진행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인식론으로 넘어가면서 추상적 개념으로 현실을 판단하려는 관념적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대상을 단순하게 현실적인 대상과 추상적인 존재로 구분해봅니다.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존재가 실제 합니다. 결국 이 세계는 사실(事實 fact)과 사례(事例)와 대상(對象)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실제는 수없이 있겠지요. 공간을 날아다니는 전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적인 존재를 실제(實際 a fact as all things)라는 개념으로 존재 자체의 외재적인 특성만을 한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존재의 내재적이며 본질적 특성을 표현하는 실체와 추상적인 실재와는 다른 표현이자 다른 세계입니다. 결국 실제 한다는 것은 고정된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처해져 언젠가는 자연의 풍파와 세월에 사그라지고 인간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는 변덕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이 결국에는 실제에 의지하며 실제를 추구함으로써 거기에서 도움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삶에 가치가 없어 보이고 변덕스러워 보임에 의해서 보다는 보다 더 생각이 깊고 우월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실제를 벗어나 영원불멸한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되고 탐구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런 실제를 벗어나는 길에 보편이라는 개념을 창조해냈습니다. 그런 세계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만을 알아가며 살아간다고 해도 훌륭한 삶이겠으나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결국 추상적인 개념을 창조해 그것을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인식했습니다. 현상적인 실제의 파악에서 멈추기에는 두뇌의 능력이 우주를 수용할 만큼 무한하기에 창조를 향한 직관적 접근은 무수한 인식적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추상하는 지성의 세계를 기반으로 창조적 행위로 나아가며 자신의 우월함을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그러한 우월적 행위를 누구나가 인정하기에 인간은 실제의 탐구에서 벗어나 본질적이며 천상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하는 실체의 세계에 대한 탐구와 추상적 인식을 몰고 올 실재의 탐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에 근거해서 추상화하고 하나의 개념으로 모든 개별자들을 통합하는/ 실제에서 실체를 창조하듯이 인간의 능력은 또다시 실체의 추상적 개념들이 현실세계 그것도 천상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실재의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실제가 실체로 개념화되더니 어느 순간 실재로서 천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데까지 인간의 지성은 나아간 것입니다. 마치 원자를 쪼개고 쪼개며 들어가 그 어떤 물체의 근원이라 할 본질적 알맹이를 찾으려 하듯이(실재) 철학의 세계에서도 현실의 물질에서 시작해 더욱더 추상화되는 개념을 창조해 신의 세계(실체)를 알아가려 했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물질의 분석을 통해 신의 권능을 알아보려 했다면 철학자들은 인간의 개념을 더욱더 추상화시켜가며 신의 존재를 알아가려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에 급급하다던가 아니면 먹고살기에 넉넉하게 됐다고 하는 만족감에 젖어 있다면 실재의 세계는 영원히 다가올 수 없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게 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다가갈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오직 세상을 치열하게 탐구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관념적으로만 다가갈 수 있는 세계이자 이해되고 인정되는 세계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현실의 세속적인 개념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며 영구하게 고정된 존재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실체에는 속성에 의한 판단이 가능하지만 실재에는 그 자체이기에 속성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변을 부유하는 변화에 처한 평범한 것들에 대해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탐구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내부적으로 열등하기에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진정한 존재는 완벽한 현실태로 더 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존재론적 인식론을 우주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즐거움은 한때의 추억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그런 먼지처럼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둘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런 변화와 무의미의 세상의 존재들을 벗어나 무언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자격으로 느꼈습니다. 그런 존재론적 인식론으로 치열하게 탐구하며 관념으로서 세상의 원인을 알고자 했으며 그러한 과정을 정립해 나가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주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즉 관념으로 생각에는 있으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과 글로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눈으로 보여줄 수 없는 고귀하고 냉철한 천상세계 어딘가에 분명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그 어떤 본질적 속성(상태)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원인의 세계야말로 진정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근본 세계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우수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자 근본 원인을 찾아내려는 탐구의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신의 세계를 인간의 자연과학을 동원한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알아내고자 했으며 그런 자신감에 차 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근본 원인 즉 존재의 본질과 그 속성을 향한 고투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수많은 예술가들이 집착해온 창조적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사회를 물들였던 계몽의 시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탐구의 대상을 철학적으로는 형상(形相, form eidos perfect)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세계를 실체(實體 substance)로 표현했으며 실재(實在 reality)로 총칭해왔습니다. 실체는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본질로서의 속성을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실재 자체에 대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결국 지상세계를 벗어나 천상세계를 말하지 않고 실재의 의미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천상의 최상층에 있다고 여겨지는 하나로서의 원형(原形 prototype)인 신()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으로부터 땅 위의 가장 미천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위계적인 서열로 도열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당연히 땅 위의 것들은 실제의 세상이고 천상의 것들은 실체들이 증발해 이루어진 실재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철학적 용어로 등장한 실체 substance라는 용어는 사물의 개념적 존재로 본질적이고 관념적인 실재와는 다른 영역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대상의 본질로서의 형이상학적 가치이자 현상세계의 너머에 있다고 생각되는 세상의 근본 원인이 자 궁극적인 참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참모습으로서 철학자들에 따라 그 명칭은 달리해 불러왔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form이라 하기도 하고 보편개념 혹은 본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우주적 시공간에서 인간의 알량한 지성은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시각을 도입해 인식 대상을 실제와 실체의 세계로 구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인식론을 우선시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아는 가로 집약됩니다.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대상에 대한 의심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에 합당한(실제) 가 혹은 자연의 기준에 합당한(실체) 가 과연 기준은 있는가(실재) 등 결국 당위와 그에 대한 근거로서의 의심인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요구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동에 처해 살아가는 머슴들에게 삶은 개념의 사용에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살아갈 수 있었으니 자연의 현상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각각의 대상과 대면하며 고마움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의 생명현상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갔습니다. 윤리의 세계에 만족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가공해 통일시키고 종합시켜가며 자신의 앎의 욕망으로 나아가는 지성적인 능력의 행사에까지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논리의 세계입니다. 그들 머슴이 보기에 주인들의 그런 삶에의 몰두는 자연을 무시하고 천시하려는 천벌이라는 죄의 잉태를 가져올 욕망의 어리석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를 실제로 받아들이며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보람이었습니다. 내 삶은 내 가치의 적용을 도입해야지 남의 가치나 세상의 가치를 도입할 때에 고통은 시작되고 번뇌는 시작될 뿐이었습니다.

 

 

세상에 개념의 총량으로서의 지식이란 것은 대상에 대응하는 인간이 창조한 추상적이고 상상력에 의한 생명이 없는 건조한 개념 그 자체일 뿐이었습니다. 실물로서의 활동하고 살아 숨 쉬는 존재 즉 실제를 대신할 수는 없었으니 결국 지성은 그것을 앎의 편리라는 욕망에 근거해 강압적으로 대신하여왔을 뿐입니다. 즉 그것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 생각 속에 놓여있는 건조하고 형식적인 구조로서 현실을 초월하는 독립적이며 냉철하게 보자면 하나의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기호였을 뿐입니다.

 

 

대상 자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물이란 개념은 그것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물의 느낌을 알 수 없는 추상 기호였던 것입니다. 그 물을 실제로 알아채기 위해서는 직접 손을 넣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론자들은 물이라는 개념을 절대화시켜 도입함으로써 무수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물의 세계를 그 복잡하고 무한한 느낌을 인간의 머리에서 지워버리도록 규격화되고 강제된 지식의 올가미를 개발해 그것을 무수하게 쪼개내어 다양한 개념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온도계를 개발하고 압력계를 개발함으로써 경험으로 깨달으며 살아가야 할 인생의 삶을 건조시켜 버렸습니다. 개념은 경험 없이도 사용이 가능한 아주 손쉬운 가벼움과 함께 무차별적이라는 독단의 무서움도 내재시켜온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호의적인 삶에서의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겠습니까. 뜨거운 물/ 차가운 물/ - - - 미지근한 물/ 등 그 복잡하고 거칠며 우직하며 미욱하게까지 보이는 것을 단칼에 제거해버리고 확실하게 규명해 보임으로써 직시(直視) 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악함과 욕망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앎을 추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본성이 누구나에게 내재되어 태어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자 우리 내면의 태생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편리성이니 지성적이니 우아함이니 생명보호 차원이니 하며 점잖음의 장막으로 가려왔을 따름입니다.

 

 

욕망의 인간과/ 그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실제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전달 체계로서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결국 개념을 통해 자연에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며 생각으로서의 공간이 형성됨으로써 지성이라는 결실을 마음의 곳간에 저장하게 되었습니다. 즉 나무/ / 구름/ 하늘/등의 개념어들은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연결해주는 기호로서의 도구들입니다. 경험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호등에서 녹색불이 켜지면 알아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기호의 편리성이자 인식의 편리함입니다. 나무를 말하면 모두는 알아듣고 이해합니다. 자기가 표현하는 나무를 직접 뽑아 와서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편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런 보편적인 쓰임새로서 개념은 최상이며 너무나도 쉽게 소통이 가능하고 최적의 편리한 수단입니다. 결국 나무라는 개념은 누구나가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개념이 되었으며 그것은 분명 현실에 실제 합니다. 그러나 실제 하는 대상은 하나만을 지칭하기에 전체로서의 대응할 수 있는 실체라는 개념으로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늘나라를 핑계로 도입해 천상에 존재한다는 실재로 인식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나무들은 그런 천상에서의 실재로부터 유출되어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나무는 그 개념 자체가 실체가 되어버립니다. 즉 실제의 존재가 실체로서의 보편적 개념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즉 실체로 존재한다고 하며 현실 개념으로 나무를 대현(代現) 하고 그렇게 인식해버린 것입니다. 그런 실체조차도 더욱더 축약시키고 단순화시켜 상상으로 추상하기 위해 우리는 실재라는 추상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더욱더 가볍고 얼마든지 주인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무겁고 둔탁하며 둔박한 것들을 털어버린 단순 간단하고 명료한 세계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연에 배반하는 독단이며 지성은 결국 자연에 없던 차별을 불러오고 입체를 불러와 인간 스스로 우월해지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주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머슴은 그것을 외면하면서 자신만의 즐거움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체가 존재 자체에 대한 추상적 언어적 표현이라면 실재는 그런 존재의 무거움을 버린 인식으로서 만의 추상적이면서도 천상적인 언어적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주인으로서의 앎의 세계는 현실에 실제에서 보편으로서의 실체라는 존재를 뛰어넘어 추상으로서의 실재라는 인식의 마음세계에 안착하는 과정이며 실제에 만족한다면 머슴의 삶이요 실체에 이르면 평민의 삶이요 실재에 다다르면 주인이 삶이 되는 위계질서를 몰고 왔다고 보입니다. 나무는 실제 하는 현실의 목재이고 땔감이며 나무를 분석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원자는 실체이며 나무의 원자를 더 분석하고 쪼개 들어가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영역의 그 어떤 것을 우리는 실재로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가능한 영역과 불가능한 영역이 합일한 세계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불가능한 영역을 깔보고 무시해온 결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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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겨울 바다와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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