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호수
전홍구
남양주 오남호수공원 둘레길을 걷다 보면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 있다.
호수를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독서 공간이다.
처음에는 그저 쉼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사람들이 남겨둔 수많은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누군가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바람은 호수 위를 지나와 책장 사이를 스치고 햇살은 물결을 건너 독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세상에는 강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다. 물은 흘러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 호수는 물만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 꿈과 상상까지도 함께 품고 있었다.
호수는 원래 침묵의 존재다.
말이 없다.
그러나 책은 말한다.
수백 년 전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주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의 생각도 전해준다.
침묵하는 호수와 말하는 책이 한곳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치 고요함과 소란함이 서로 손을 잡는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쳤다.
글자를 읽고 있는데도 자꾸만 시선은 호수로 향했다. 햇살을 받은 물결은 페이지보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잔물결 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인생도 한 권의 책과 닮았다고.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첫 장을 펼친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문장을 써 내려간다. 기쁜 날은 아름다운 시가 되고 슬픈 날은 눈물 어린 소설이 된다.
때로는 읽기 어려운 철학책 같은 날도 있고 웃음이 절로 나는 동화 같은 날도 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기 삶이라는 책을 읽지 못한다.
앞 장은 기억이 되고 뒷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며 자기 삶을 돌아본다.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호수 역시 그렇다.
물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비춰준다.
책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하다.
호수는 하늘을 담고 책은 세상을 담는다.
호수는 구름을 품고 책은 사람을 품는다.
그리고 사람은 그 둘 사이에 앉아 자기 자신을 만난다.
나는 한참 동안 책을 읽다가 덮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덮은 뒤에 더 많은 생각이 시작되었다. 아마 좋은 책이란 마지막 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러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읽으러 오는 것은 아닐까.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살아간다. 뉴스의 말, 광고의 말 스마트폰의 말 세상의 말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이 하는 말은 듣지 못한다. 책 읽는 호수는 그런 사람들에게 잠시 귀를 빌려주는 곳 같다.
호수의 침묵은 마음의 소음을 가라앉히고 책의 문장은 잊고 있던 생각들을 깨워 준다.
나는 둘레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호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책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은 건물이 아니라 자연일지도 모른다.
산은 오랜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강은 시간을 적어 내려가는 책이며 호수는 하늘을 필사하는 책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책들을 읽으며 살아가는 한 명의 독자다.
오남호수공원의 책 읽는 호수는 단순한 독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책과 자연이 서로를 읽어 주는 곳이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곳이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 물결이 일고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속 문장 하나가 새롭게 쓰인다.
그래서 나는 그 호수를 떠나면서도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한 권의 호수를 마음에 담아 왔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세상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호수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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