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영적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내죄 사한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날구원한 십자가.
그렇다 십자가가 성경의 키워드다.
그리고 십자가란 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도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다(창1:2)"
라고 했던 그 때에 이미 하나님은 십자가를 세워야함을 아셨고
그것을 계시하여 알려주시는 것이 성경인데 여러분들은
이 십자가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십자가가 창조의 태초에서부터 마침까지 즉 알파와 오메가까지를 밝히는 창조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 창조의 원리를 알려주기엔 여러분들이 너무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말씀드릴수 없다. 다만 십자가는
예수님의 육적 십자가와 영적 십자가가 있음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육적 십자가만 있는 줄 알지만, 그리하여 육적 십자가로
이미 구원을 다 받아버린 오메가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고 예수님에겐
영적 십자가도 있음을 알려드리려고 한다.
영적 십자가만이 죄 사함과 구원의 본질이다.
과거의 육적 십자가를 믿는 복음은 구원이 없고
마지막 출현하는 영적 십자가를 붙들어야 죄 사함과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육적 십자가와 영적 십자가!
이 둘중에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누누히 말했지만, 구약은 모두 모형이다. 신약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형이다.
모형이므로 비유이고 비유이므로 봉한 책이다. 그런데 구약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상징한 동물제사가 곧 구약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제단에 동물의 희생을 바치는 것이 구약의 십자가였다.
이 십자가를 중심해서 모든 모형의 율법들이 주어졌다. 십자가를 중심한
모든 모형의 율법들은 주변적인 것으로서 결국 동물제사의 십자가를
더욱 공고히 드러내고자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구약의 모형대로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실상으로 오셨다.
이제 동물대신에 실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어주셨다(십자가).
그런데 예수님도 구약의 동물 제사처럼 육적 십자가를 지셨다.
동물의 몸둥이가 죽어 주었듯이 예수님도 그 육체가 죽어주시는 육적 십자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동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희생당하는 십자가였다는 것 뿐,
똑같은 육적 십자가였다.
십자가만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중심한 모든 신앙행위가
모두 육적인 예법으로 가르치셨다.
물질십일조, 물세례, 음식을 금하는 금식,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
떡과 포도주를 떼어 거행하는 유월절의식 등이 모두 육적이다.
하나님은 영이므로 영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영적으로 알려주셔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육적 십자가를 지셨고 모든 것을 육적으로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신령한 영이시므로 영적인 것이 본질이지만 그렇게 육적으로
알려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은 비유이고 비유이므로 봉한 책이다.
따라서 신구약 성서는 모두 철저히 비유로 봉한 책이 된다.
이와같이 구약 때에도 육적 십자가요, 신약 때에도 육적 십자가였기 때문에
십자가는 비유였으며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르면서도 십자가가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를 구원한다고 굳게 믿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에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다.
그 뿐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런식으로 맹목적으로 믿었다.
물로 세례를 받으면 그동안 지은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다.
금식을 하면 경건한 사람이 되는줄 믿었다.
십일조를 바치면 복받아 부자가 되는줄 믿었다.
그런 육체의 행위를 지키며 목사님들의 설교를 경청하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에 가는줄도 믿었다.
그게 구원이고 영생인줄 믿었다.
그러나 그런 육적 십자가를 믿고 그런 육체의 예법들을 지키며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수천 수만년을 보낸다 해도
그런 육체의 십자가와 육체의 예법 속에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메세지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육적 기록은 모두 영적인 일에 대한 감추어진 비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시므로 영적 십자가 속에서만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메세지가 들어있다. 육적 십자가는 영적 십자가에 대한 감추어진 비유였다.
이와 같은 육적 십자가에 대한 비유를 풀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영적 십자가를 져주셔야만 되는데 그 때는 언제인가?
바로 오늘날이다.
그러면 왜 그동안 육적 십자가와 육체의 예법으로 성경을 기록했는가?
우리가 그 육적 성경 기록속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스스로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를
저울에 달아서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즉 비유풀이를 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인간은 그 시험에 반드시 실패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아오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성경을 비유로 기록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다시 오신 재림 예수님만이 그 비유로 봉한 성경을
풀어주시기로 옛적부터 정하셨고 그렇게 역사를 이루어 오셨던 것이다.
오늘날 비유로 봉한 성경을 해독하는 일!
이것이 곧 예수님이 져주실 영적 십자가이다.
그런데 십자가란 영적이든지 육적이든지 생명의 죽음을 뜻한다.
아, 죽음! 자기 생명을 내어 주는 일!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이 육체의 십자가를 지시게 될 때에도 얼마나 괴로워하셨던가!
너무나 괴로워서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때에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했다고 알려주고 있지 않던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니 반드시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죽음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이 초림 때는 다시 육체가 부활할 것을 믿고 죽으신 육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초림 때는 다만 육체가 못박히시는 고통을 괴로워하셨다.
그러나 재림 때는 영적 십자가를 지셔야 하므로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은 주체고 육은 객체이므로
육만 죽으면 영은 살아있어 다시 살수 있는 희망이 있다(윤회).
그러나 영의 죽음은 육도 살아있지 못하게 하는 완전한 죽음이 된다.
영이 살면 죽어도 산다고 했다(윤회). 그러나 영이 죽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오늘날 재림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지고 저주받아 이 완전한 죽음을
죽어 주셔야만 했다.
정말이지 영원히 자신의 영혼을 버리는 영적 죽음을 죽어 주셨야만
했을 때, 그 고통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재림 예수님은 그 영적 십자가를 지셨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계11:7,8>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서 저희는 두 증인을 말한다. 그리고 증인이란 하나님에 대한
독보적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뜻하는데 왜 예수님을 두 증인이라고
했느냐 하면
초림 때와 재림 때의 예수님을 합한 증인이므로 두증인이 된다.
초림 때와 재림 때를 합한 두 증인이므로 저희 두 증인이 죽으신 곳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라고 했던 것이다.
영적이라는 말은 육적이라는 말을 전제한다.
예수님이 초림 때 육적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영적 십자가라는 말도
생겨난 것인데 영적 십자가는 재림 때에 해당된다. 합하여 두 증인에게
해당되는 죽음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초림 때에 육적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재림 때는 다시
영적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에 두 증인이 "영적으로 하면 운운..."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재림 때에 영적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
전술했듯이 영적 십자가는 부활을 기대못하는 완전한 죽음을 뜻하는데
예수님이 재림 때에 이 죽음을 죽으셨다. 완전한 죽음만이 완전한
창조의 원리가 된다.
그런데 완전한 창조의 원리를 의미하는 완전한 죽음을 죽게 되는
영적 십자가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는 시기상조라서 생략한다.
다만 우리가 인식할 것은 완전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알자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다시 살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고 완전히 죽었으나 그 완전한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은 능력으로
그를 살려내셨다는 점이다. 극심한 고통을 안고 죽으셨기 때문에
즉 완전한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영생의 몸으로 살리셔서 재림 때는
명실공히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시게 된다.
예수님은 초림 때와 재림 때가 완전히 다르다.
초림 때는 육체의 십자가를 아프게 지셨다.
그러나 재림 때는 그보다 너무나 너무나 고통스런
영적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때는 공생애 동안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온갖 기적을 베푸시어 사람들로부터 권세와 능력과 사랑과 인정을 받으셨다.
그러나 재림 때는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을 완전히 숨기시고
계신다. 이름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숨기시고
인터넷을 통해서 주의 음성만 들려주신다. 재림 때는 아무 대접도
인정도 받지 못하시고 말못할 혹독한 시련, 시련 뿐이다.
정말로 저주받은 삶이다. 여러분들에게 돌아갈 저주가 그에게 몽땅 돌아간 것이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지금 화려한 대형교회에서 밴드부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오늘에 오신 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저 하늘에서 화려한 에어퍼레이드를 벌이고
오신다고요? 오호 통재라!
그렇게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지 말고 우리 정신들 차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