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이제 박옥수목사의 '소제' 누룩 1편으로 들어왔습니다.
3.누룩
레위기 2장 1절~16절
![]()
각기 다른 기준 속에 사는 사람들
이번 수양회 때는 소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제를 드릴 때 쓰는 '고운가루'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운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섞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사단의 이끌림을 받고 살아 왔는데, 이제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나온 선이나 의를 전혀 받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만 받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누룩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제를 드릴때 고운가루에 기름을 부어서 드리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유향이 들어가야 하고 소금을 쳐야 하되, 누룩과 꿀을 넣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까지 말씀 드린 것은 소제에 필요한 제물에 대한 이야기였고, 오늘 저녁에는 소제물에 넣어서 안 되는 것 가운데 한 가지인 누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1차 수양회때, 제가 저녁에 말씀을 잘 전하려고 원고를 좀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설교를 한참 하고 있는데, 전기가 나가버린 거예요. 3층에 긴 형광등이 60개 있고, 비디오 카메라를 위해 램프를 여러개 달아 저희들이 사용하는 전기 용량에 딱 맞는데, 방송실에서 전기난로를 쓰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방송실에는 보일러 시설이 안되어 형제들이 추우니까 큰 전기 난로를 갖다 놓았는데, 설교가 시작되었을 때 방송 준비를 다 해놓고 난로의 스위치를 켰나 봅니다. 그 바람에 3층 전기를 끌어다가 하기 때문에 지장없이 할 수 있었지만, 3층에 있는 전등은 다 꺼져 버렸어요. 설교는 계속 하지만 캄캄해서 원고가 보여야 말이지요. 그래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누룩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고 기록하면서 참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난 여름에 저는 이헌목 목사님과 함께 독일에 다녀왔는데, 저희들이 곳슬라에서 여름 수양회를 하기 위해 유스 호스텔 하나를 빌렸습니다. 수양회 때 사람들이 많이 올 걸로 예상하고 방을 많이 계약했는데, 실제로는 그 절반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텔 측에서 '빈 방에 다른 손님을 받아도 되느냐?'고 묻길래,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2층은 전부 자매들이 쓰고, 아래층은 형제들이 쓰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강사라고 화장실이 딸려있는 독방을 주었습니다. 아래 층과 2층 숙소에 공용화장실이 있어서 2층에는 자매들만 있으면 문제가 안되고 아래층에는 형제들만 쓰면 별 문제가 없는데, 다른 손님들 때문에 그게 계획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남자들과 여자들이 같은 화장실을 쓴다는게 참 불편하거든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화장실에 문도 없고, 남녀가 샤워실까지 같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헌목 목사님이 몇번 드나들다가 참 난처했나봐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독일 형제에게 '호텔 측에 여자들은 2층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조치해 달라고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국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독일 사회에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왜 우리가 2층에 올라가야 하느냐?'는 그들에게 설명을 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간곡하게 부탁을 하여, 독일 형제가 호텔측에 이야기를 전하기는 해야겠는데, 아주 난감해 하덜하고요. 결국 그것이 뜻대로 안 된 채 수양회를 마쳤습니다. 서양인들은 '남녀가 다 똑 같은데 무슨 차별을 두느냐?'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양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당황할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독일은 미국보다 더 자유로워서 자기가 하고 싶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성적으로 개방이 되어서 그런지 자기 남편인지 남의 남편이지 구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에 들어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러니가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거지요. 그 사람들은 이조 시대의 선교사가 와서 목회하는 정도로 알고 있거든요. 여기 일본 형제들도 있고 미국에서 온 자매들도 있습니다만, 미국이나 일본에서 목회할 때도 성 문제가 목회자들에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미국의 형제 자매들이 듣고 섭섭해 할는지 몰라도, 미국에도 가정을 진실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참 많은 사람들에게 이혼을 밥먹듯이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우리가 교회를 시작하니까 교회가 그 나라의 풍습과 관습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자신들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이 교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이제 막 교회 생활을 시작했는데,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거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어 주자니 그 삶 자체가 믿음을 거스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 목회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목회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문에 한국의 에이즈 환자가 백이십명이고, 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는데, 저는 에이즈의 확산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에이즈에 걸리면 보통 몇 년 안에 환자들이 다 죽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 에이즈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에이즈환자가 많아도 얼마 안 있어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으로 돌아가면 3년안에 에이즈는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주장입니다.
에이즈에 대한 연구를 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설혹 혼자 사는 사람 때문에 전염되는 일이 있을 지라도 감염자는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에 성경대로 돌아가면 지구의 에이즈는 3년안에 없어집니다. 물론 전문가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그 사람들에게 웃기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제게 웃기는 이야기를 그 사람들이 하니, 그 사람들과 제가 다르지요. 그렇지요?
참 놀란운 것은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그런 미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도 구원을 받으면 그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거듭나기 전에 그 들은 죄에 얽매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거듭난 이후 교회안에 들어와 그들의 삶이 거룩하여지고 깨긋하게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사역할 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삶이 문란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안에 들어와서 술을 끊어라.간음하지 마라.살인하지 마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 그들이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
실제보다 부풀리는 누룩
이 누룩에 대한 이야기는 신구약을 통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잘 모르고, '우리가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라고 말했어요. 조금 전에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바로 직후인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누룩은 떡을 만들 때 부풀리게 하는 효소인데, 우리가 잘 아는 베이킹 파우더도 누룩의 한 종류입니다.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 빵을 '유교병'이라고 하고, 누룩을 넣지 않고 부풀리지 않은 빵을 '무교병'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유교병과 무교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누룩을 만든 떡을 유교병이라고 하고,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을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빵에 누룩을 넣어 부풀려서 부드럽게 만들지만, 그들이 누룩을 넣은 빵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그 절기를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무교절에는 절대로 누룩을 넣은 빵을 먹어서는 안되고, 집안 어떤 곳에도 누룩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무교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깨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무교병의 절기를 만드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때는 무교절도 아니었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술울 담글 때에 누룩을 쓰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그냥 두어도 발효가 되니까, 누룩을 안 넣어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룩을 넣는다 하면 으례 떡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룩'이야기를 듣자 '떡을 안 가져왔다.'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내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지 않았느냐? 그리고 남은 떡을 몇 광주리 얻었느냐? 열두 광주리를 얻지 않았었느냐? 내가 떡 일곱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몇 광주리를 얻었느냐?'하시면서, '다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조심하라는뜻이구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조심하라 하지않고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습니까? 저는 누룩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우 목사님은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빵을 많이 만들어 주셔서 누룩의 효과를 잘 알고 있더라고요.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반죽을 해서 아랫목 제일 따뜻한 곳에 반죽을 두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 놓으면, 반죽이 막 부풀어 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반죽이 넘쳐서 방바닥과 이불에 다 묻어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라는 말은 실제로 조그마한 것을 크게 부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한국에도 누룩을 섞어서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참 많습니다. 요즘 '성령폭발'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저는 아직 성령이 폭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과장하는 것도 누룩의 일종입니다. '불 받고, 은혜 받았다.'라고 부풀려서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은 약해 집니다.
선교학교 수업시간에 종종 깨달은 말씀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때 어떤 형제가 발표하는데, '그 일이 너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하고 '너무 큰 기쁨, 너무 큰 감사.'라는 표현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형제. 그렇게 그 형용사를 자주 쓰면 주님을 표현 할 때는 무슨 형용사를 쓸래?'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데에나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표현할 때 써야 맞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큰'이라는 표현보더 더 큰 표현이 별로 없는데, 주님을 표현할 때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결국 그런 형용사를 자주 쓰다 보면 주님에 대해서도 동일한 형용사를 쓸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겪은 일과 주님이 상대적으로 같아지는 겁니다. 그렇지요?
저는 단어를 쓸 때, '이것은 김목사에게 말 할때 쓰면 되겠다. 저것은 우리 아들한테 쓰면 되겠다. 그런데 이 단어는 주님께 써야 맞지. 인간에게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사용해야 안되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의 누룩이 섞여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면 그 누룩을 뽑아내십시오.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 외식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말은, 그들의 교훈속에 실제와 다른 말, 부풀린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교훈을 삼가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거든요, 우리의 삶속에 누룩을 조금만 섞으면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단에 섰을 때, 자기가 하나님앞에 불완전한 인간임을 성도들에게 분명히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는 성도들은, '나는 매일 장사한다고 죄를 짓지만 우리 목사님은 죄를 안 짓기 때문에, 나도 빨리 돈을 벌어 저렇게 살면 죄를 안 짓지.'하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자기의 부족함을 성도들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야곱이 실수 한 것, 다윗이 범죄한 것,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인 일등을 볼 때 은혜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완전했고, 다윗에게 허물이 없고, 야곱에게도 허물이 없다면, '난 허물 투성이인데 나같은 사람은 은혜를 못 입겠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에게 허물이 있고, 아브라함에게도 허물이 있고, 노아에게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허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은혜 입는 것을 보니, 나 같은 사람도 은혜를 입겠다.'는 마음이 들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인도할 때, 성도들의 마음을 온전한 위치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은혜를 입는 위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죄를 짓지 마십시오. 제가 40일 금식을 했더니 죄에 대한 유혹이 전혀 안 일어나고, 황금을 봐도 돌멩이처럼 보이고, 여자를 봐도 석상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휴,어쩌면 저렇게 될까? 난 안돼...'하면서 부담을 갖게되어 '그런 신앙은 목사나 부흥사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나는 안돼.'하는 좌절감속에 빠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속으로는 안 그러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입니다. 알겠습니까?
제가 대구에 있을 때, 여러분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매 주 월요일마다 성경 공부를 했는데, 저는 늘 제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들로 부터, '박목사님의 말씀은 참 은헤롭습니다.그런데 우리 선배 목사님들로 부터 금식기도하면 죄도 안 짓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박목사님으로 부터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 줄 모릅니다.' 하는 이야기들을 참 많이 합니다.
유월절은, 정월 십사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정월 십오 일부터 한 주간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그 기간동안에는 떡에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다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삻이 우리에게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죄가 다 사해졌다고 하면, 앞으로 죄를 막 지어도 괜찮겠네.'하는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대답할 이야기가 별로 없겠지요? 실제로 죄를 지어도 용서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죄를 막 지어도 괜찬하다고 하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나면, '이제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말이 안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둘 밖에 모르는 인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은 참 단순해서 '이것 아니먄 저것' 둘 밖에 모르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예수님을 시험 하러 왔을 때, 무엇이라 했습니까?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치라'해도 걸리고 '치지 말라'해도 걸리는데, 만약 예수님께서 '치라'하면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러 온 네가 죄를 지었다고 치라 명하느냐?'할 것이고, '치지 말라'하면 율법을 어긴 자다 할것이어서 둘 다 걸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 3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것은 치라는 소리도 아니고, 치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여튼 인간들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 주님을 올무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한 번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앞에 나아와서,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세금을 바치라'하면 로마의 편이 되기 때문에 걸려들 게되고 '바치지 말라'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자가 되어 걸려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도 걸리고 저렇게 해도 걸리도록 함정을 만들어 놓고는, '선생님이여, 당신은 선하시고...'하며 소쿠리 비행기를 태웠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빨리 말씀해주시지요.' 예수님 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칠까요, 말까요?'
'여기에 누구의 얼굴이 있느냐?'
'물론 가이사의 얼굴이 있지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항상 인간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둘 밖에 모른 답니다.
브라질 어느 정글의 원주민들에게는 숫자를 세는 단어가 둘 밖에 없는데, 하나는 까나까나, 둘은 하리, 셋은 까나까나 하리, 넷은 하리하리 까나까나 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숫자를 세는 단어가 둘 밖에 없으니까 그것 밖에 모르듯이,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이 둘 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으냐,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느냐?'하는 것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3의 대답 뿐 아니라 더 여러가지의 대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
율법도, 성령의 법도 없어지면
유월절은 우리가 죄에서 건짐받는 '구원'을 의미하고 유월절 그 다음 날 부터 시작되는 무교절은 우리의 생활 속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으로 말미암지 않고 말씀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과 같이 그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난 뒤에 죄 때문에 고민하거나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구원받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런문제들에 대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부산의 어떤 분이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에 꼭 한 번 만 방문해 주십시오.'
'왜 그럽니까?'
했더니, '우리를 죄에서 좀 건져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지 않으려고 하니, 한 번만 와 달라고 하도 부탁을 해서 갔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예배당 입구에 들어가니 양쪽에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한 쪽 방에서 집사 둘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목사는 옆에서 훈수를 하고 있었던 광경이었습니다. 장기판 옆에 있는 작은 그릇에는 담배 재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목사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를 만나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목사로 있다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해가 갑니까? 목사가 갓 구원을 받으면 목사입니까? 평신도 입니까? 목사가 아니거든요. 구원받기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목사도 구원 받으면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한데, 목사 직분은 그대로 갖고 있으려는 거예요. 자기가 깨뜨려 지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라도 거듭나면 어린아이인 줄 모르고 여전히 목사 노릇 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망치게 하는 것인 줄도 모릅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한 두명 일어났거든요.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를 절대 안짓는다고 설교를 한 거예요. 교인들은 맞다고 했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 구원받고 나니 거짓말을 안하게 되더라. 담배도 끊어지더라.'안심하고 외치니까 교회가 불길이 치솟듯이 부흥이 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6개월 쯤 되니 교회가 깊은 침체속에 빠져들더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했는데, 교인들이 하나 둘씩 범죄를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교인들은, 구원 받으면 죄를 안 짓는다고 했는데 죄를 지었다고 하면 구원이 아니라고 할까봐 겁이 나서 말을 못했고, 구원 받으면 죄 안 짓는다고 하던 사람들도 자꾸 죄를 짓게 되니 힘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어느 날 예배시간에 그 중에 용감한 청년이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하니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가자기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마음에 율법도 성령의 법도 없어지니까 교인들이 담대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괜찮다고 하니 싸움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간음도 했는데, 그 교회가 금방 지탄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담배 피워도 괜찮다. 바둑을 두자. 장기를 두자. 춤 추러 가자.'예배를 마치고 목사가 교인들과 춤추러가고 카바레에 가서 한 잔 씩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를 교묘하게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사가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도 구원을 받게 되면, 참된 인도자로부터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
죄 속에 빠진 고린도 교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슬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과연 죄를 지어도 괜찮으냐, 아니면 죄를 지으면 안 되느냐? 여러분, 그런 의문을 가져 본 적 있습니까?
레위기 2장에서 '소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앞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죄를 포함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어떤 길을 열어 놓으셨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고린도 교회가 죄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안에 있는 죄를 지적했는데 그 중 교회안에 형제라 일컫는 자가 자기 아버지의 후처, 즉 계모와 간음을 한 죄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은 이방인 가운데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5장에서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을 당하셨느니라.'
(고전 5:6.7) 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분명히 거듭난 사람들이었고, 음행하는 죄를 짓기 싫어했지만 그들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자... 이제 여기서 누룩 2편으로 넘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