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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음란한 여인을 배우자로 삼아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을 배우자로 삼도록 말씀하셨다.“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다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호1:2-3)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취하여 자녀까지 낳았다. 학자들은 ‘음란한 여자’라는 단어는 일반 창녀와는 구별되는 단어로 세속적인 일반 창기가 아니라 바알종교의 풍요제의에 참여하던 일반 여인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당시 이방 종교였던 바알신전에서는 예배의식으로 남녀 간에 성관계를 가졌는데 그 의식에 참여한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멜 여인은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바알 신전으로 가 음란한 짓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다시 데려다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와 같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하시고 또 계속해서 그런 짓을 하는 여인을 다시 데려다가 사랑하라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본문 2절 하반부의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구약성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떠나 바알숭배 의식에 참석하였다. 바알이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풍요로움을 위해서 세상방식을 따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고멜이라는 음란한 그 여인이 바로 ‘너희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격이다.
“나 하나님이 너희를 신부로 삼아 나의 성전에서 나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정결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으나 너희는 음란한 고멜처럼 수없이 나를 떠나 바알 신전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고 있지 않느냐?”하나님께서는 고멜의 세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하실 것을 보여주셨다.
첫째 자녀의 이름은 ‘이스르엘’로 성도들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둘째 자녀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셋째 자녀는 로암미로 더 이상 내 백성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성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부로 맞으시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렇게 약속해주셨다. ‘너희는 내 백성이라, 사랑으로 은총과 긍휼을 베풀리라. 그리고 축복하리라.’
그러나 고멜 여인이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음란한 짓을 하듯 이스라엘 백성들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짝하고 우상과 짝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성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켜주시고 만다.
“너희 형제에게는 내 백성이라 하고 너희 자녀에게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라.”(호2:1, 현대인의 성경)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셨지만 다시 백성으로 회복시켜주시고 더 이상 사랑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지만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켜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신부로 맞아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호세아 선지자의 음란한 여인을 보고서 죄책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경고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서 그 누구도 회개하고 뉘우치는 등 스스로 변화를 추구한 성도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음란한 성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하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대한 신실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번 자녀로 삼으시고 한번 신부로 택한 백성들은 결코 버리시는 일이 없으신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하신 궁극적인 이유가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부로 맞은 성도들이 그렇게도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는 등 음란함에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참고 또 참으면서 사랑해줌으로써 결국 사랑에 굴복시키고 마는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잠언2장에 이 같은 말씀이 있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자라.”(16-17)음녀가 남편을 버렸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곧이어 음녀가 남편을 버린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결혼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가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닌 부부 각자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행위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것처럼 부부 역시 하나님과 맺은 결혼언약에 신실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결혼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도록 말씀하셨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찌니라 하시니.”(마19:6)크리스천 부부가 결혼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야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세상과 짝하는 음란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모델로서 보여주는 사명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프레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결혼언약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를 요양원에 입원시킨 남편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요양원을 방문하여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사람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책을 읽어주고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는 등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었다. 그는 아내의 방을 나서기 전에 항상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작별키스를 하였다. 그는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렇게 하였다.
어느 날 간호사들이 그에게 면담을 청했다. 그들은 요양원의 모든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위하는 그의 모습에 감명 받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윽고 수석 간호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얘기하였다. “저희 간호사들은 아저씨가 매일 아주머니를 돌보러 오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자기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모르며 아저씨가 누구인지조차 몰라본답니다. 저희들이 아주머니를 잘 돌보고 있으니 아저씨는 여기 오는 시간에 안심하고 다른 일을 하여도 괜찮아요. 매일 이곳에 와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 마세요.”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두 뺨을 적셨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저도 아내가 제가 누구인지 몰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가 제 아내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50년 전에 하나님과 아내에게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으며 병들었을 때든, 건강할 때든 항상 함께 하겠다고 서약했어요.”그 말을 들은 모든 간호사들은 숙연해졌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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