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556호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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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목적은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가를 탐구하여 그 행동하게 하는 것을 예측하고 통제함으로써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데 있다. 학파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요인을 다르게 본다. 무의식, 생각, 욕구, 습관, 의미추구 등등으로 본다. 이런 요인들은 주로 어려서 형성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각각 행복한 삶 혹은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든다. 심리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행동케 하는 요인인 무의식을 통찰한다거나, 생각을 바꾼다거나,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 욕구를 줄이거나 해결한다거나 아니면 습관을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행위를 하게 하는 요인이 있다.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으나 대체로 신비한 체험, 물질 등의 소원성취 혹은 사후 구원,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 보다 인간답게 사는 것 등등일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건강한 신앙행위를 위해서는 신앙행위를 하게 하는 요인인 신앙의 동기나 목적을 변화시켜주면 된다.
미국 신흥종교단체 해롤드 캠핑 목사가 2011년 5월 21일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며 선택받은 2억 명만이 휴거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수년 전에도 그 같은 예언을 했으나 빗나갔고 결국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5월 21일은 영적인 휴거가 일어난 날이었으며, 5개월 후인 10월 21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수가 재림하여 심판을 할 것이라고 또 다시 망언을 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캠핑의 추종자들 중에는 다니던 학교, 직장을 그만 둔 이들도 있었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한꺼번에 다 써 버린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캠핑의 예언으로 인해 빚어진 가족 간 갈등이 이혼으로까지 이어진 사례도 있었고, 14세 소녀인 나스탸 자키노바는 5월 21일 당일 목을 메어 자살했는데 조사 결과 그의 일기장에서는 ‘나는 휴거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남아서 고통 받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아직도 그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 남아 있어 현지 교계 지도자들은 성명, 인터뷰, 설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캠핑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한다.
캠핑의 거짓 예언의 여파는 우리나라의 다미 선교회가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한 때와 흡사하다. 당시 선교회의 일원 중에도 다니던 직장을 포기하고서 휴거를 준비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내가 선교회에 빠져 가정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가정이 파탄 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곧 휴거할 것인데 자녀를 학교에 보내 무엇하냐며 학교를 중퇴시키고 자녀들과 함께 선교회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더욱이 잉태한 아이를 낙태한 여인까지 있었으니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황당한 행동을 하여 자신들의 삶과 가정을 파괴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까지 혼란케 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위상까지 추락을 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바 신앙의 동기 내지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잘못된 종말론 뿐 아니라 다음의 몇 가지의 신앙형태로 인한 왜곡된 신앙동기 및 신앙목적 때문인 경우도 있다.
한 가지는 신비주의다. 신비주의란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종교적 성향을 말한다. 어느 교회 성도가 본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또 그 목사님의 설교를 동영상으로도 듣는다는 말을 듣고 그 동영상을 들어보았다. 신비주의였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설교를 하라고 해서 한다고도 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을 기망하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해괴망측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신령스럽게까지 생각하고 추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으로써 신앙의 본연의 목적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을 신비에 두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다. 기적이 있고 신비한 체험이 있다. 나 역시도 성도시절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하나님께 만나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왜 만나주지 않느냐며 따지기도 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고 은사도 받았다. 목회를 한 이유 중의 하나도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앙체험은 중히 여기지만 신비한 체험만을 일삼는 신비주의는 철저히 배격한다. 또 한 가지는 이원론주의이다. 원래 이원론주의는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하는 주의를 말한다. 교회 안의 일만을 영적으로 생각하고, 교회 밖의 일은 신앙이 아닌 세속적인 일로 여기는 것도 이원론주의이다.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그동안 교회가 ‘교회 일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지켜주십니다,’라는 설교로 이원론주의를 조장한 면도 없지 않다. 그 덕택으로 교회는 성장했고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 밖의 가정이나 사회 속에서는 빛 된 삶을 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2010년 12월에 기윤실에서 실시한 호감 가는 종교 여론조사에서 기독교가 꼴찌가 되고 말았고,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른 또 한 가지는 기복주의이다. 기복주의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신앙 습성을 말한다. 사실 신앙이란 기복주의를 떠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주로 신령한 복을 말하고 있는 신약성경에도 현세의 복에 대해 약속한 곳이 많다.(고후9:6, 딤전4:8). 하지만 신앙의 동기나 목적을 기복에 초점을 맞춘다면 필시 신앙의 근본목적을 소홀히 하게 될 수밖에 없다. TV 설교에서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사업장을 지켜주십니다.’라는 설교를 들을 때면 일면 맞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자칫 설교를 듣는 연약한 성도들이 기복주의 신앙으로 흐르게 될까해서이다. 그뿐 아니라 사업에 실패한 경우나 가난한 성도의 경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성경은 신앙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할까? 레위기 19장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로 피조물과 구별된 성품을 말한다. 또한 도덕적으로 완전한 성품을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식이므로 하나님처럼 세상 사람과 구별되며 도덕적으로 완전한 성품을 드러내면서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세상 즉, 세상 사람들의 삶이나 문화와 제도 등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 변질되어 있는 부분이 많으므로 성도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좆아 창조목적대로 살아감으로써 그들에게 모델이 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회복시켜나가라는 것이다.
19장 2절 이하에서는 어떤 면에서 거룩하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며 떨어진 이삭을 남겨두라,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거짓말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학대하거나 남의 것을 강탈하지 말며 고용한 품꾼의 삯을 그날로 지불하라. 재판관은 부정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돌아다니면서 남을 헐뜯지 말라, 몸에 문신을 새기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소중히 여겨라,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님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며 높이 받들어 모셔라, 너희 땅에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동족같이 여기며 너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팔 때에도 서로 속이지 말며 공정한 저울을 사용해야 한다.
한 마디로 교회와 가정과 그리고 직장 등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과는 달리 창조 목적에 맞게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거룩함도 말씀하시지만 교회 공동체 밖의 가정과 직장 등의 사회에서의 거룩함에 대해서 더 많이 말씀하시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4장 3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시고 4장 7절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한 삶을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어쩌면 가장 오해하고 있는 성경이 요한 계시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을 쓴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두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겟돈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언제 오실 것인지 등 신비한 것을 알려주어 신비 그 자체에 빠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계시록을 쓸 당시 사회적 핍박이 매우 심하여 성도를 격려하기 위해 기록해주신 말씀이다. 어떤 핍박이 있다 해도 성도에게 약속한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반드시 임할 것이므로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라고 위로하고 격려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오실 것이므로 조금 손해를 본다 해도, 조금 덜 이익을 본다 해도 아니, 세상 사람들은 세상 방식으로 살아 불의하게 이득을 얻는다 해도 성도는 믿음으로 꿋꿋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은 거룩한 삶이다. 로마서 12장에 의하면 거룩한 삶이 곧 예배요, 신앙이라고도 말씀한다. 가정과 직장 등의 사회에서의 거룩한 삶을 도외시한 채 세상은 망할 것이라며 휴거될 것만을 기다린다거나 또한 신비한 종교적 체험만을 중히 여기며 늘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본연의 목적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면서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게 사는 것도 신앙의 본연의 목적이 아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든 하늘나라 백성들은 하늘 백성답게 의연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충만하게 통치해주심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느라 비록 육신적으로는 고난을 겪을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세상이 알지 못한 평안으로 가득찰 것이며 또한 세상이 창조목적과 질서가 회복됨으로써 밝아질 것은 물론 세상으로부터 칭송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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