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586호 /하나님이 허락하신 강물에 뛰어들어라.

작성시간11.07.18|조회수4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586호 /하나님이 허락하신 강물에 뛰어들어라.

 

 제15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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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허락하신 강물에 뛰어들어라.

 

 

 

      열왕기하 5장에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이 등장한다. 아람에서는 아주 크고 존귀하고 위대한 용사였지만 나병환자였다. 사람에게 아주 치명적인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다면 아무리 지위와 명예가 있어도 너무나 괴로운 삶을 매일매일 가져야만 한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성공했지만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만이란 이름은 기쁨, 즐거움이란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전쟁터에서 승리를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병으로 인해 괴로움과 좌절, 고통과 아픔만 늘어났지 그 어느 순간에도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성경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에게 가서 처음에는 불순종하려고 했지만 나중에 순종하여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함을 얻은 은총과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장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5장 전체를 장식할 만큼 너무나 드라마틱하며 기적과 같은 실화는 교회학교 설교와 성경교재에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서 주인공은 나아만 장군도 아니며 엘리사도 아니다. 진짜 주인공은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구역은 계집 종) 하나를 잡아와 자기 부인에게 몸 종이 되게 하였다. 이 소녀가 붙잡혀 오기 전에 부모와 형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과 행복하게 살다가 아람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소녀의 가족들은 붙잡혔거나 아니면 아람군인들이나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철천지원수이거나 자기 가족들을 몰살시킨 아람 땅에 올 때 복수의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나아만 장군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몸서리쳐지게 괴로움과 눈물, 용서할 수 없는 아픔을 갖고 있었을까?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아주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이 소녀는 과연 어떤 감정과 마음이었을까?

 

    대부분 설교나 성경공부의 주인공을 설정하게 되면 아마 나아만 장군이나 엘리사를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어린 소녀와 몸종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설교를 했더니 듣는 성도들의 반응은 아주 색달랐다. 이때까지 나아만 장군이나 엘리사 선지자만 연결하여 듣던 말씀이 너무나 달리 다가온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아만 장군의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차라리 평생토록 고통과 아픔으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자신의 땅에 엘리사 선지자 앞에 있었더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직언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밤마다 나병으로 인해 무서운 고통과 아픔을 듣고 있었던 어린 소녀는 어쩌면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주인이 아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저의 가족을 위해 복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내심 기뻐하거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아만 장군이 죽게 되면 자신의 가족을 위한 복수가 끝나고 노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거나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쩌면 하나님께서 어린 소녀에게 원수 갚는 길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내져 고침을 받게 하는 길임을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를 용서하는 것이 너의 복수를 갚는 것이며 가족을 잃은 슬픔에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 영혼이 죽는 것보다 살아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주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직언으로 인해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왕에게 가서 간구하니 왕의 칙령을 받아 이스라엘 땅으로 떠난다. 칙령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은 기절초풍할 내용의 칙령을 보고 분노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게 한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 집 앞에 당도했을 때 엘리사 수하 사람으로부터 요단강에 일곱 번에 씻으라는 말에 분통을 터트리며 “차라리 내가 살던 아람에 있는 강물에서 씻는 것이 낫지 어떻게 시궁창 같은데서 나를 씻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방방 뛰는 모습에서 자신의 위신이나 명예, 자존심을 아주 상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 소녀 계집종은 아니지만 자신의 종들이 만류하면서 일곱 번 강물에 씻는 것보다 더 큰 명령이라고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언을 했던 종들도 어린 계집 종들과 마찬가지 자신의 가족이나 형제를 잃어버리지 머나먼 이국땅에 끌려와 나아만 장군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라면 그들도 아주 어릴 때 끌고 왔을 것이다.

 

   어쩌면 어린 계집종처럼 복수의 칼날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아만 장군이 병에 걸렸을 때 복수를 갚게 되었다고 희열을 느끼며 그 병을 죽게 되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나아만 장군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권면과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에 잡아온 종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 잡혀 온 사람인지 모른다. 중요한 계집종이나 머슴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전쟁터에서 소모품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없었다면 나아만 장군이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렇게 성경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하 5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내용은 몸종들이 나아만 장군을 아버지라고 할 정도면 나아만 장군이 노예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잡혀온 노예였지만 자신의 자녀처럼 양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도록 사랑으로 양육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집종이나 몸종들이 자신들을 고아로 남겨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 때문에 총성을 다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본 장에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계집종이나 몸종이 없었다면 나아만 장군의 병은 치료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요단강이란 “야르덴”(@ydry) dr'y;(yarad, `내려가다')단어에서 파생되어 “빨리 내려가고 내려가는 강”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성지순례 가보신 분들은 잘 알 것이다. 요단강이 어느 정도인지,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씻어 어린아이 피부처럼 되었다는 것은 인간본연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나병환자는 피 속에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생겨지는 병이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피는 깨끗해야만 피부도 좋아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 내 안에 들어와 정상적으로 흘러 다녀야 되는데 변질되어 불결한 피가 되어 흘러 다니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너무나 심각한데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흔히 우리가 알고 나병환자를 인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인 말씀을 받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나의 지식으로 이해해버리면 이와 같이 나병환자가 되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으로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거나 말씀을 삶 속에서 올바르게 적용해 나가야 하는데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 생각하거나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도 모르게 나병환자가 되어 있다.

 

   진물이 나고 고통이 와도 전혀 느낌을 갖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 자신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썩어 문드러져 고름이 줄줄 흘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밖에도 나병환자도 많지만 교회 안에는 더 많은 나병환자가 즐비하다.

 

   나아만 장군의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어린 아이 피부처럼 확연히 달라진 나아만 장군이 돌아와서 계집종과 몸종들에게 어떤 상을 내렸을까? 노예 신분을 벗어나도록 해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했거나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거나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나병환자처럼 되어 있는 존재들이 너무나 많은 데 이들이 나의 원수이며 적대자이며, 복수의 칼을 들이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단과 사이비를 낙인을 찍는 사람들, 이단과 사이비로 단죄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유익과 이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이성과 판단을 총동원한다.

 

   이런 존재들이 나병환자인 것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나병환자가 지나갈 때 자신의 나병환자임을 크게 소리치고 다니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문화였다고 한다면 현재 한국교회에서 큰 소리 꽤나 외치고 있는 이들마저도 나병환자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한국교회의 문을 차단시키고 있으며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다.

 

   내가 나병환자임을 안다면 요단강에 빨리 내려가고 내려가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상과 생명이 흐르고 있는 강물에 뛰어 들어라. 한 번이 아니라 또 씻고 씻어 어린 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해져야 한다. 이것은 기도나 금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어떤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여쭈어보아라.

 

    어느 여자 권사님의 입에서 “하나님이 한국교회 안에 발을 디딛고 싶은데 나병환자의 고름처럼 너무나 더럽고 추악해서 디딜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은 필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국교회와 국민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나병환자처럼 되어 있는 목회자들 때문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여 회개하지 말고 먼저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큰 소리로 “나는 나병환자입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 강물에 뛰어 들어 자신의 몸이 어린 아이처럼 하얗게 변할 때까지 씻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 지금 뛰어 들어가라. 그리고 씻김을 받으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570220l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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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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