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596호 /간단한 상처 치유법,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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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고 자란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을까. 그와는 반대로 자녀들을, 학생들을 좋은 길, 바른 길로 이끌려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가슴을 아리게 하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어보지 않은 부모와 선생님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결혼 후 배우자와 단 한 번의 얼굴 붉힘과 삐침이 없이 평생토록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런 로맨틱한 사랑만을 나누며 살아가는 부부가 이 세상에 한 쌍의 부부라도 있을까. 직장에서는 말할 것 없고 천국과 가장 유사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에서조차 속상함과 괴로움으로 속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나아가 보지 않은 성도가 어디 있으랴. 그뿐 아니라 악인이 형통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보며 잠시나마 낙망해보지 않은 사람이 또한 어디 있으랴.
이사야서 1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6-9)
본문이 보여주는 모습은 종말적인 비전이다.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시는 거룩한 하늘나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고, 어린이가 독사와 함께 뒹구는 아무런 해됨도, 상함도 없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평화만이 존재하는, 사자가 육식이 아닌 풀을 뜯어먹는 창조질서가 온전히 회복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도 그와 흡사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덕택으로 성도들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천국을 상속(기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천국은 이 세상에서처럼 침략자에 의해 파괴되거나 폐허가 되지 않을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도 그랬지만 우리나라 역시 전쟁으로 인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지금껏 떠나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사는 부모들, 배우자를 잃고 홀로 만고풍상을 겪으며 자녀들을 기르며, 가르치며 살아온 사람들, 팔다리를 잃고서 그런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민주화가 되기 전 독재자, 강한 자들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아간 또한 비명아래 죽어간 사람들, 억울함을 당하고서도 그 누구에게도 호소조차 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제3자들이야 아련한 추억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당사자들은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천국에는 그런 비참함이 없다는 것이다.
더럽지 않다는 것은 죄의 영향으로 인한 방탕과 미움, 미신 등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적, 영적 온전함만이 존재할 거라는 것이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시들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만이 있을 것을 뜻한다.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갈등이 있고, 투쟁이 있고, 경쟁이 있고, 전쟁이 있고, 강자가 있고, 잡아먹음이 있고, 불의함이 있고, 더러움이 있고, 늙음이 있고, 추함이 있고 그럼으로써 잡아먹힘이 있고, 죽임이 있고, 약자가 있고, 속상함이 있고, 패배가 있고, 탈락이 있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고, 한숨이 있고, 눈물이 있고, 의인이 잠시나마 형통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는 해됨과 상함과 온전치 못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류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한 이 세상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받은 아픔과 슬픔과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여러 괴로운 기억들을 치유하는 방법으로는 잘 알려진 것만도 수 십 가지이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치유법까지 합하면 이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의 간단한 상처 치유법 중의 하나는 이 세상은 천국이 임하기까지는 온전함이 존재하는 곳이 아닌 해됨과 상함과 부정과 불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피차간에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곳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아무리 은혜가 충만하다 해도 역시 해됨과 상함과 온전치 못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완전한 교회 방침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공평하지 못한 사랑이나 친밀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지나친 완벽성 때문일 수도 있다. 세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조직과 구성원에 대한 완벽한 기대와 바람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가할 수 있다. * 규칙-국가, 직장, 교회 등의 조직의 완벽한 제도를 기대함. * 매너-다른 사람으로부터 완벽한 예의를 기대함 * 수용과 친밀-타인의 완벽한 수용과 친밀을 기대함. * 업무-완벽하게 업무를 처리해줄 것을 기대함. * 기분-자신의 기분을 완벽하게 맞추어줄 것을 기대함.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완벽한 기대와 바람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 목표-지나치게 높은 목표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힘. * 계획-지나치게 철저한 계획을 세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거나 분노함. * 업무-잘 처리 되었음에도 늘 부족감을 느낌. * 시간과 속도-정확한 시간과 속도를 기대함. * 능력-자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기대함. * 인정-지나치게 인정받기를 기대함. * 존재 자체-자신의 연약함과 단점을 인정치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지나치게 온전함을 기대함.
셋째, 상황에 대한 기대와 바람 역시 지나치면 자신에게 상처를 가할 수 있다. * 날씨와 환경-완벽한 날씨와 환경을 기대함. * 원칙: 완벽하게 지켜지기를 기대함. 예외를 인정치 않음. * 평가: 철저한 공정성과 공평을 지나치게 기대함. * 결과: 실수와 실패는 성공을 위한 실험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음.
오래 전에 한 교도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죄수 중에는 더러운 세상 보기 싫다며 자신의 눈을 꿰매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큰 아픔을 경험했으면 그리하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은 사랑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온전히 임하시기까지는 해됨과 상함과 온전치 못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소나마 유연한 사고를 지닌다면 상처를 조금 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받은 상처로부터도 쉬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어떤 곳이라도 마찬가지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전치 못한 현실 속에서도 나지막하게나마 의연히, 묵묵히 사랑과 진리의 깃발을 세워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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