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609호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언

작성시간11.08.18|조회수4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609호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언

 

 제16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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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언

 

 

 

      한국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있다.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올바르게 예언을 하는 자들이 있다.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 상대방을 압도하여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케 하는 독특한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예언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무당처럼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예언을 구실삼아 상대방의 돈을 뜯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로 인해 기독교 안에서 만연되고 있는 예언자라고 하는 무리들이 누가 임명하지도 않았는데 예언자로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이란 은사는 전혀 기독교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전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그 사람에 대한 신변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꿰뚫어 알아맞히는 것은 무당보다 더 정확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무당들을 방문하게 되면 오히려 입에 거품을 물고 사경을 헤맨다.

 

   이로 인해 예수를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는 분들에게 신앙의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역효과를 가져 오는 경우를 목격되기도 한다. 주변 상황이나 환경에 적중하는 예언도 있지만 적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는 경우도 자주 목격한다.

 

    서울의 강남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언자는 상대방의 돈이 얼마나 갖고 있는지 그 액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심지어 은행이나 타 금융기관에 얼마나 예치되어 있는지 그 액수를 알아맞힌다. 스님들의 호주머니나 지갑에 갖고 돈의 액수, 사업수단이 능수능란하여 사업가들이 수중에 얼마를 갖고 있음을 감지한다.

 

    여기서 예언이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 하는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 예언에 얼마나 신뢰를 하느냐? 하는 것은 예언하는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예언을 한다고 해서 그 모두 다 하나님께서 전달하는 내용도 있겠지만 본인 스스로 예지력과 직관력을 발휘해서 알아맞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언을 하는 분들 가운데 누가 잘 맞히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로 근거하여 예언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오랜 전이지만 하와이에 천 권사라는 분이 있었다. 아직도 살아 계시다면 고령의 나이일 것이다. 50년이나 100년의 앞을 내다보는 예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오래 전 만주에 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여 예언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일자 깡 무식쟁이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정도로 겨우 문맹의 눈을 뜬 연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주변 목회자들에게 책망과 경고의 예언으로 인해 사명 감당하기가 매우 두려웠으며 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 불구하고 사명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힌센스(문둥)병에 걸려 하나님 앞에 참회를 한 뒤 다시 예언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나님께서 보내준 자에게 아주 정확한 예언도 하지만 방문자에게 너무나 합당한 말씀인 성경구절 하나만으로도 주님 앞에 굴복하여 참회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위에 언급한 강남의 예언자는 성경 말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에 가까운 예언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 녀에게 압도되어 끌려 다니는 예가 허다하다. 대부분 예언을 한답시고 반말로 하는 경우는 무당과 동일한 선상이다. 위아래도 구분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사람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교회 목사의 관계에서 남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만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천에 모 권사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 예언을 하는 부분이 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묵상가운데서 얻어지는 예언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두 예언자를 비교하는 것은 강남의 예언자는 자신에 찾아오는 분에게 위로와 용기가 아닌 상대방의 기를 꺾어 버리는 언행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천의 예언자도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서 신랄하게 꾸중을 하지만 위로와 격려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찾아온 분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드리는 언행을 반드시 시행한다는 점이다.

 

   강남의 예언자는 자신에 찾아오는 분에게 반말과 자신에게 굴복케 하는 언행으로 일관하지만 인천의 예언자는 설득력이 있는 논리적인 언행으로 반감을 사지 않는 모습에서 한번 찾아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몇 년 동안 아니면 9년 동안 자신의 문제를 놓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강남의 예언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과 사상으로 예언을 한다는 구실아래 하나님의 이름으로 빙자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입으로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예언자라고 하면 지례 겁을 먹는 분들이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싸여 있으면 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무당들도 이런 상태라면 어떤 예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면모를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탄복하거나 감동할 필요가 없다.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강남의 예언자가 맞힌 것도 맞히지 못하고 예언이 빗나간 예가 허다하다. 과거에 의정부에서 활동했던 동영희라는 여자도 봉투에 헌금 액수를 알아맞히며 넣었다 뺏다한 것도 알아맞힌다. 하지만 예언이 빗나가서 궁여지책으로 하는 말들이 나왔다는 것은 예언의 신빙성이 없다고 감지한다.

 

    양천구 신정도에 위치한 목양교회 임준식 목사는 예언은 이미 성경에서 다 기록되어진 것이며 다 이루어진 것을 다시 되새기거나 발현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듯이 예언이 샤머니즘처럼 앞날을 예견하거나 남의 사생활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예언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과 흡사한 다니엘서 5장의 말씀은 너무나도 기가 막힌 예언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대구삼덕교회 청년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얻은 메시지였다. 처음에 이런 말씀을 받았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거기에 모인 청년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5장 마지막 31절에 매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는 기록과 최규하 대통령의 연세와 동일한 나이였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었다. 말씀을 읽었던 청년들은 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와 같이 성경과 견주어 볼 때 일어나는 사건과 예언이 일맥상통한 일들이 자주 있다는 것이다.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것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주변상황이나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알아맞히는 것을 예언이라는 범주아래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한다. 앞날을 예견되는 메시지는 내가 꿈을 꾸거나 기도 중에 보여주는 환상이나 들려오는 음성에서 얻을 수 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 상대방의 조언이나 꿈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이 알려줄 때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교통 속에 얻어지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구에게든지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말로 일관된 어투를 하거나 상식 밖에 언행을 일삼는다면 무당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의 기를 꺾어버리거나 약점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다면 무당에 속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계의 어른들을 앞세워 광고를 내거나 강단에 올려 세워 건전한 기도원이나 교회라고 선전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역겨운 냄새가 여러 곳에서 지독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선택받은 성도들을 삼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당처럼 예언을 하는 자들의 종말은 주변에 있는 분들이 잠시 옹휘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주변에서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린 상태로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보이는 환상은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인정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치닫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천방지축, 안하무인, 고장난 브레이크로 달리는 자동차라고 할 만큼 짱구는 말려도 그녀의 언행을 말릴 수 없다는 응답이다. 전복되어 아주 폐차로 망가질 정도가 되어야만 정신을 차린다고 하는 정도라면 누가 주변에서 충고의 말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언은 상대방도 죽이지만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마치 자신의 예언으로 상대방도 찌르고 자신도 찌르는 무서운 결말이 발생된다. (잠언 26:9 23:35) 진정한 예언은 남을 살리기도 해야 되지만 자신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의 심령도 살려야 되지만 자신의 심령도 살아야 된다. 이 무더운 여름에 남도 시원하게 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며 자신도 시원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언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나타나기를 갈망하면서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570220l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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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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