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779호 / 아직도 점령할 땅이 너무나 많은데

작성시간12.03.21|조회수5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779호 / 아직도 점령할 땅이 너무나 많은데

                

 

  제1779호     

       본 메일은 님께서 카페가입시 동의 하였기에 발송되었으며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카페 내정보에서  수정해 주세요

                            클릭하시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창골산 농어촌교회 돕기 일백운동

 

 

창골산 원고보내주실곳

cgsbong@hanmail.net

 

  아직도 점령할 땅이 너무나 많은데

 

 

 

 

 

    여호수아 12장까지가 전쟁과 승리의 기사로 채워져 있는 반면 13장부터 이하는 토지분할을 하는 기사로 되어 있다. 전장까지는 여러 지역을 정복했으나 아직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 지역이 너무 많은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이가 많나 얻을 땅의 남은 것이 매우 많도다”(1)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언급한다면 “점령해야 할 땅이 너무나 많은데 너의 나이가 많은 것이 매우 안타깝도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시간이 촉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세가 많으면 급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할 일을 많은데 기력이 점점 쇠하여져서 언제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나이가 젊은 분이 있을 것이다. 본인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기준이 아니라 할 일이 남아 있는 기준으로 볼 때 나이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들도 은혜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작은 성을 함락한 것에 만족하여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약속하신 은혜 하나하나를 믿음으로만 획득하거나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언제나 진취적이며 항상 진격할 수 있는 만반의 대비를 해야만 한다.

 

    특히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이 되면 특별하게 진취적인 자세를 갖고 진격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겉으로 연로해진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많이 이루어 놓은 존재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유비무한의 삶으로 겸손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예비해 두신 땅이 남은 것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모든 것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땅이라 함은 우리 눈에 보이는 땅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하는 땅은 인간들 내면세계를 의미한다면 사람의 마음 바탕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고 여호수아서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 족속들처럼 짐승의 속성들을 죽이지 아니하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가나안이란 의미는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해야 되는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

 

    짐승의 속성을 죽이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삶을 추구해야 되는 것이다. 13절에 “다만”(우리 국역에는 12~13절에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내고 있어도’)이라는 슬픈 이야기는 전절까지의 매우 크고도 귀한 약속에 대한 사람의 대답을 표시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짐승의 속성을 죽이면서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 사단을 몰아내는 엄청난 일을 해내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의도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의 원형과 본질을 모르고 설교를 하거나 주의 사역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모른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된다. 과거에는 청동구리로 만든 거울이라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깨끗한 거울처럼 보이는데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0, 12)는 말씀의 진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의 진수를 알게 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다시피 알았던 말씀이라 아주 소홀하게 넘어갔었다. 그러난 온전한 것이 오면 즉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되는 상태가 돌입함으로 그 비밀을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영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백성이 된 그들의 적이지만 이것을 실제로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분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은사와 그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아 즐거워하는 것은 다른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기독교인의 심중에 얼마나 많은 적이 정복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은사의 사용의 목적은 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에 대한 자세로 낮아지고 낮아져서 가나안 땅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은 에녹(하노크, 하나님의 뜻을 전수하는 존재)과 엘리야처럼 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앞에 나타나고 자신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감으로 인해 세상에 없어진 상태이며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는 것이 은사를 사용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쫓아내지 않을 채 남겨 둔 것은(13) 이 후에도 여러 곳에서 거듭되는데(15:53, 16:10, 17:12) 이는 가나안 점령 후 토착민을 몰아내고 진멸해야 할 것을 앞서 거듭 명해져 있을 명령을 어긴 것으로(민 33:53~55, 신 7:2, 20:16~17) 장래에 화근을 남긴 일이다.

 

    신앙생활하면서 내면에 숨겨진 짐승의 속성을 처단하지 않으면 화근이 되어 일생토록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이 단순히 눈물뿌리며 자신의 죄를 지은 기억을 되새기는 차원이 아니다. 짐승의 속성이 아직도 내 안에 숨어 있으니 처단해주시고 그 짐승의 속성이 밖으로 나와서 나와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결해 달라는 차원의 기도가 절실하다.

 

    두 지파 반의 기업(산업)에 대해서는 “요단 서편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거듭 약속되어 있는데 모세는 두 지파 반에게 요단 동편 토지를 준 것이 본장에 몇 번이고 기록되어 있다.(8, 15, 29, 32) 이것은 모세가 그들의 요구에 의해 허락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요단 동편은 그들에게 약속한 땅 외의 것인 까닭이다. 레위의 기업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심이 거듭 언급되어 있어(14, 33) 이로 인해 레위인들의 특권이며 영광이 된 것이다.(시 16:5~6)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계획아래 요단 동서가 다 이스라엘의 땅이 된 것이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 안에 내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의 근원인 “아쉬레”라는 뜻을 갖고 있다.(시 1:1에서 언급하는 복의 의미) 무엇을 가진 소유의 기준으로 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땅에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아쉬레’라는 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내가 점령해야 할 땅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지는 땅을 정복하시려고 나를 부축이고 있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정복하러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하나님의 담을 그릇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상상해 보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와서 그들 가족들의 마지막으로 먹을 식사를 대접받은 후 그릇을 가져오라고 해서 밀가루와 기름을 담겨지게 하였다. 그 후에 동네에 나가서 그릇이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해서 그 그릇마저도 밀가루와 기름을 담았다.

 

    로마서 9:24에 “이 그릇은 우리”라는 문장처럼 하나님을 담을 그릇이 바로 사람의 마음 바탕이라고 여겨야 한다. 따라서 사렙다 과부가 가져온 그릇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기도 되지만 사람의 내면세계를 의미하는 마음을 뜻한다. 임직식 때만 되면 디모데후서 2:20을 인용하면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담을 그릇이 아직도 세상에 널려 있는데 하나님을 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정 하나님이 담겨져야 하는데 이것저것 섞어 짬봉으로 만들어 담겨져 있는 상황이다. 온전히 하나님만 담겨지는 그릇이 아무 그릇이나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분만이 담겨질 수 있는 온전한 그릇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과거의 그릇은 깨어지고 새로운 그릇으로 탄생되어져야 한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그릇으로 빗어져야 한다. 옛 그릇은 쓸모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신 토기장이 손에서 빗어진 그릇만이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피로 값 주고 사신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천국의 그릇이 탄생되어져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마음에 들어가 짐승의 속성이 죽어지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주님과 함께 죽고 장사지낸 후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탈바꿈하여진 마음 바탕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이다.

 

    아직도 점령할 땅이 너무나 많은데 이 땅을 정복할 용사가 되기를 원하시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공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고 같이 실천합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성경 아카데미는

성경의 단어 하나로, 성경 한 구절로, 성경 전체를 꿰뚫는 강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의 강의로 인해 감동의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목양교회(임 준식 목사)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열매교회(김 희자 목사)

지난 주 개강예배로 2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다른 지역에도 성경아카데미 반을 개설할 예정입니다.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ljh4183@hanmail.net 

 원본보기

창골산☆칼럼  

글에 대한 문의는 필자께 

 첨부이미지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