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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온 이백 스물 세번째 편지
나는 지금 한국에 와 장로회신학대학의 세계교회협력센타에 머물고 있습니다. 창문너머에는 지금 봄 비가 내리고 있으며 아차산 중턱에는 개나리들이 노랗게 물들어 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30년 전에 수업 짬짬이 시간을 이용해 뒷 문을 통과하며 올라갔던 아차산은 그대로인데 학교에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가느다란 봄비를 온 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운동장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들이 물방울이 되어 튀어 오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당시가 떠오르는 것은 공부에 매진했던 기억보다도 학생들이 데모하던 모습만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사실 1979년도에 장신대에 입학할 때 나는 학문과 경건이라는 기치아래 열심히 공부하며 신앙생활을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상황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격동의 시대였다. 우리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수 많은 데모로 인해 강의는 휴강하는 날이 거의 였으며 심지어는 대학 문 안에도 들어 가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대학교의 정문은 어느 한 사람도 허락하지 않고 꼭꼭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손에는 책을 들고 분주히 움직여야 할 학생들이 있어야 할 대학에는 손에는 방패와 몽둥이를 든 전경들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고 학생들을 지켜주어야 할 나이 지긋한 교수님의 목소리대신 나이 든 경찰 아저씨들의 단호한 무전기 소리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몸을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위하여 내 던졌습니다. 나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그 원천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입니다.
1906년 2월 4일 현대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학문적이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학문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즐기고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주목할만한 활력과 뛰어난 감수성은 후에 본회퍼를 생각하는 지성인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키우게 했습니다.
1923년 본 회퍼는 16살의 나이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튀빙겐(Tubingen)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였고 21살의 나이인 1927년에 베를린 교수회에 “성도의 교제: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본회퍼는 이 논문에서 교회와 계시간의 관계를 잘 정립하였고 후일 현대신학의 거장인 칼 바르트는 이 논문을 가리켜 “신학적 기적”이라고까지 했습니다.
1939년에 본회퍼는 쾨슬린에 위치한 임시목사후보생 신학교의 교장이 되어 일했지만 그 당시 독일의 시대적 상황은 그를 단순히 목사요 교수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때 히틀러의 군대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본회퍼는 마침내 임시신학교의 문을 닫아야 했고 제국의 문학위원회로부터 본회퍼는 어떤 종류의 글도 출간하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지를 당하고서 많은 사람들은 본회퍼가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고백교회의 형제단을 대신해 일을 하면서 히틀러에 대항하는 지하 저항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오랫동안 근 평화주의자 입장을 옹호해 왔었으나 히틀러와 그의 악마와 같은 정권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 행동으로 대항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본회퍼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당신은 크리스천이고 목사이면서 어떻게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그런 음모 사건에 가담할 수 있었는가?" 했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사람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친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는 그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그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1942년 3월에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두 번의 시도를 하지만 실패로 끝납니다. 결국 본회퍼는 게슈타포에 의해 부모의 집에서 체포 당하고, 마침내 1945년 4월9일 본회퍼는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면서 짧은 인생을 마감합니다. 뛰어난 젊은 신학자인 본회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3주가 지나 히틀러는 자살하고 결국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후 50년 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원시켰습니다. 복원 판결이유는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형당한 프로센뷔르크에는 “형제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1945년 4월9일 플로센뷔르크에서 그의 삶을 마치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본회퍼가 처형 된 후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본회퍼를 순교자라고 칭하면서 그의 삶은 “현대의 사도행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옥중 서간>은 작게는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나의 친구들이요 선배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크게는 기독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세속화 신학, 신 죽음의 신학, 상황 윤리 등이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정치 신학, 혁명의 신학, 해방 신학, 민중신학이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급진 신학의 중심에는 항상 본회퍼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공신학, 환경신학 등 현대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실 본회퍼를 제외하고 20세기 신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신학계에 미친 그의 영향은 실로 대단합니다.
본회퍼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자신의 감옥의 현실과 세계 역사의 정황, 그리고 히틀러 정권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본회퍼는 추상적이거나 아니면 이론에 치우치는 신학이 아닌 실질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과 신앙과 신학은 일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9년 나 자신을 향한 개혁의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안고 입학한 장신대의 교정을 바라보며, 며칠 전인 본회퍼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인 4월 9일, 그가 기독교는 삶과 동떨어진 종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삶 속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생각하며,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이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자기 개혁의 바람이 새롭게 일어나기를 소망해봅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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