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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년 이 맘 때가 되면 나는 저들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싸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교회 바로 앞에 있는 논에 동물 분뇨를 뿌리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봄이 되면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논에 동물 분뇨를 뿌려댔다. 시골에서는 봄이 되면 냄새 때문에 쾌적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시골에 살면 공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고 하는 얘기들은 옛날 얘기이다. 요즘에는 오히려 도시보다도 더 공기가 나쁘고 물도 나빠졌다. 무분별한 농약 살포와 동물 분뇨 뿌리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하고 지하수는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결국 삶의 질이 엄청 낮아진 것이다.
옛날에는 농촌에서 봄이면 집집마다 겨우내 삭인 구수한 향내가 나는 잘 발효된 거름을 논에 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골에 거름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기껏해야 축산으로 발생한 거름이 있을 뿐이다. 농사철이 끝나 농한기가 되면 힘들여 마당 한쪽에다 거름을 모으는 순정한 농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그 대신 곳곳마다 둥그런 모양의 축산물 분뇨처리장이 있어 그곳에 동물 분뇨를 받아 놓아 발효를 시킨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충분히 발효가 되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동네 주변의 논에 봄이 되면 축산 분뇨를 살포하기 시작하면서 원인도 모르는 온갖 병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장염에 시달리며 약을 달고 산다. 나 또한 건강 체질이었으나 근래 들어 장염으로 인하여 적잖이 고생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매 년 이 맘 때만 되면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과 싸워보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축사에서 나오는 동물 분뇨를 사람들이 사는 주변의 논에 뿌리면 그것이 땅속에 스며들어 지하수를 오염시키므로 물을 마실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빨래에서도 냄새가 심히 난다. 200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뿌리기 시작했는데 그 해에는 두곡 마을에서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에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60대 중반의 한 부인네는 일 년 내내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염으로 고생을 하였다.
병원에 가면 특별한 원인을 말해주지 않아 계속 약을 복용했는데 나중에는 약독이 나서 몸이 점점 더 나빠졌다. 그리고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에서는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빨래에 검은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그리하여 물을 잘 살펴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검은 알갱이가 섞여 있었다. 양변기의 물에도 거뭇한 알갱이들이 떠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먹는 물은 상수도를 설치한 집이나 정수기가 있는 마을회관에서 한 병씩 받아다 먹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해에는 정읍시청의 온라인 민원에 글을 올렸다. 한 사흘 지나니 환경관리과 수질 보전 팀 담당 직원이 조사를 충분히 했는지 전화가 왔다. 그는 나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논에 동물 분뇨를 뿌리는 일은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농촌 삶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누군가의 계략으로 그 법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악법이 버젓이 만들어져 공무원들로서도 어찌 해 볼 수가 없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에게 조금만 이해하고 참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자기네들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양보하지 않으려는 가해자들과 삶의 밑바탕이 되는 건강의 해악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힘없는 농촌 주민들 사이에서 공무원들의 권한으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작년(2011년)에는 하도 답답하여 담당공무원에게 인터넷에 글을 올려 네티즌들의 도움을 받아 막아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랬더니 네티즌들의 힘을 아는 공무원인지라 즉시 해당자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중간에 똥 뿌리는 일을 멈추게 하여 적은 양만 뿌리고 중단하여 조용히 끝났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작년에 그렇게까지 했으니 올해에는 안 뿌리겠지 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2012년 3월 2일,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이른 봄의 아침나절에 또 다시 똥을 실은 차 3-4대가 줄지어 몰려와서 우리 교회 바로 앞의 논에 신나게 뿌려대고 있었다. 그렇게도 질기고 질긴 인간이 누구인가 하고 나가봤더니 우리 부부가 전도하려고 그토록 기도하면서 복음 전할 때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우리 교회 집사님이고, 칠보에서 식료품점을 하는 그의 아내는 조금 있다가 가게를 그만두고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고 만날 때마다 약속하는 바로 그 집 가장이었다.
시골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입지가 매우 좁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여 항의를 하면 당장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시골에서는 관계전도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들이 대부분 교인들과 관계있는 사람들이므로 한바탕 싸움을 하 후에는 관계가 막히게 되어 전도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작년에는 우리 부부가 똥을 뿌리는 현장에 나가서 항의를 하고 설득을 하고 있으니 그 동네 사시는 권사님이 급히 나오셔서 우리더러 “제발, 목사님은 이 일에서 빠지세요. 차라리 우리가 싸울게요” 하셨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작년 한 해 동안 동네에서 그 일에 대하여 엄청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친히 동네어른들을 찾아가 물의 중요성과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동네분들이 합심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하였더니 남자분들이 모두 고개를 외로 꼬고 들은 척도 안 했다. 아마도 주동자에게 술 한 잔이나 얻어 드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은 직접 당해본 당사자들이 아니면 그 심각성을 잘 모른다. 한 번 똥을 뿌리고 나면 그 냄새는 논을 뒤집어엎을 때까지 두어 달 동안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늘 맡고 살아가야 한다. 냄새는 그렇다 치고 주로 지하수를 마시고 사는 주민들의 건강 문제가 크게 타격을 받는다. 사실, 시골 주민들은 환경의식이 별로 없다. 우리가 시골에 들어온 지가 20여 년 되는데 그동안 우리는 항상 그들과 환경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왔다. 함께 큰 언쟁을 할 수는 없다. 언쟁을 하고 나면 전도의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저녁에 식사 후에 한 시간 정도 농로를 따라 운동을 하기 위해 산책을 한다. 두곡 마을에서 시작하여 화장동 마을을 지나 수암 마을 초입까지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농로로만 편도 2km정도 되는 길을 왕복하니 하루에 4km정도의 걷기 운동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운동 도중에 시냇가에서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온갖 쓰레기를 태우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 특히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비닐과 같은 농사용 화학제품 쓰레기를 태우는 것이다. 냄새가 지독하다. 몸에 해로운 다이옥신이 많이 방출된다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권고를 하지만 실행이 되질 않는다. 믿는 자들까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불신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면사무소나 시청 등 관공서에 주민들의 환경의식 고취와 감독에 대한 업무 담당자가 있겠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임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는 하도 답답하여 민원 전화를 넣어 보지만 아무런 조치도 성과도 없다. 오히려 전화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말투로 전화를 받는다. 어찌 해야 할 지 우리도 막막할 따름이다.
외국의 형편이야 귀로만 들었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세계적으로 한국인의 환경의식은 아주 낮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환경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매우 중요한 자산인데 기성세대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산천의 곳곳마다 쓰레기 투기, 다이옥신 무분별 발생 등으로 인하여 손상된 상처투성이의 자연이 신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잘 다스리고 지키고 가꾸어 후대들에게 물려주라고 하셨건만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자연은 파괴되고 파괴된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삶도 함께 파괴되어 가고 있다. 자연을 되살리자고 외치는 아우성 소리는 분분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해질 녘에 집집마다 쇠죽 쑤는 구수한 냄새가 동네에 좍 퍼져 하루 종일 마을 광장에 모여 뛰어 놀다가 뱃속이 설핏 고파 올 때 그 냄새가 얼마나 맛나게 나던지 속으로 저걸 한 그릇 먹으면 맛이 어떨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가 만들어내는 거름으로 한 해 농사를 지었다. 물론 소농들이었으니까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농사도 기업적으로 하고 소도 기업적으로 기른다.
땅이 넓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나라에서는 소를 방목하므로 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겠지만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소를 좁은 축사에 가두어 놓고 사료와 풀을 주어 기른다. 그러니 요 근래에는 보리를 심는 대신 논을 세를 내주어 풀을 재배하게 한다. 풀이 자라려면 엄청난 영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비싼 비료나 퇴비를 주어 풀을 기를 수 없고 값이 싼 축산 액비를 마구잡이로 논에 뿌리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축산업자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소 값은 떨어지고 사료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 수지가 안 맞는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니 비싼 퇴비, 비료 등을 사 댈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동물 분뇨는 돈을 받고 뿌린다는 소문도 있다. 내가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서 분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을 주민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 분뇨처리장과 축산업자와 논 주인이 야합하여 이익을 따라 뭉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는 말씀처럼 욕심을 부리면 다른 사람의 삶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부에만 관심이 있다. 그 일이 타인에게 줄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의하는 사람에게 서운하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그럴 수가 있어? 이웃사촌 좋다는 게 무엇인가? 그 정도는 이해해 주어야지”하면서 온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면서 적반하장이다. 그러니 그 권사님이 목사님을 말리면서 “목사님이 참으세요” 했던 것이다.
사람은 본성이 악하므로 이득을 따라 뭉쳐 큰 세력을 형성하므로 일개 힘없는 주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대항할 힘도 방법도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 하신 것처럼 욕심이 욕심을 만나 헤롯과 빌라도가 담합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순진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들은 축산업자와 분뇨처리장 사장의 꼬임에 넘어가 양심은 마비되었다.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도 몇 잔의 술에 양심을 팔고 그들과 한 편이 되는 무지 몽매하고 순진한 시골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물론 나에게는 하나님의 백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귀한 영혼들인지라 이 일을 하나님께 이르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두 알고 계시므로 알아서 처리해 주시리라. 그러나 목회자인 우리는 이 일로 인하여 그 영혼과 그의 가족의 영혼들을 실족케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가 된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시골에 살면서 특히 목회자로서 주민들의 위법한 행위를 보고도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산다. 행여나 한 영혼의 구원의 길을 막을까봐서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기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고 하셨다.
목회자로서 목회지의 한 영혼이라도 실족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늘 조심하면서 말 한마디라도 하려면 수십 번 생각 또 생각해보고 하게 된다. 그런데 매 년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물의 오염 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은 양보할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지 진퇴양난이다.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할 뿐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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