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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0일, 목사인 남편은 노회에 참석하러 갔다. 하루 종일 혼자 집에서 뒹굴뒹굴 하며 책을 읽었다. 오후 7시에 칠보제일교회에서 <이옥 선교사의 찬양과 간증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집에 혼자 있느니 가볼까 하고 옷을 차려 입고 나섰다.
7시 30분이 되니 시작되었다. 목사님이 기도한 후 이옥선교사를 소개했다. 그녀는 기도한 후에 먼저 아코디언 연주를 하였다. 찬송가 547장의 곡이었다. 새 찬송가로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아는 찬송만 주로 부르므로 처음 듣는 곡이었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였다. 이옥 선교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통절하게 깨달은 자인 것 같았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는 하지만 그다지 통절하게 깨달아 회개하며 살지는 않는 것 같다. 그저 남에게 해코지 안 하고 손해 입히지 않고 양심껏 살면 된다는 안일함에 빠져 있다. 죄를 자복하며 애통해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싶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선명하게 받아들여진다. 부자가 되면 복음은 피상적이 되고 만다. 마음이 물질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이 들어갈 공간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재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간 자처럼 부자들은 천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대부분이 배가 부르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배고팠을 때의 순전한 신앙이 그립다.
북한의 조선인민군 여하사로서 7년 동안 충성하며 살다가 탈북한 자로서 그녀의 간증 마디마디마다 감동되지 아니하는 대목이 없었으나 나에게는 ‘죄’를 회개한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받은 ‘죄인’임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쓴다.
그리스도인들치고 어느 누구인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지 않은 자가 있으랴마는 이옥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어 택함을 받은 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약속한 말씀처럼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 하리니(사43:1~2)”라는 약속 가운데 구원을 받은 자였다.그녀는 부모님이 둘 다 공산당원이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철저한 공산당원 교육을 받아 김일성, 김정일을 신으로 경배하며 자랐다.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의 일체의 배급제도가 정지되었다. 처음에는 3년만 견디면 경제가 회복된다고 하여 북한 인민들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을 자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배고픈 데에는 견딜 장사가 아무도 없었다. 배가 고프니까 아버지는 홀로 집을 나가 굶어 죽거나 도시에 가서 부랑자 또는 범죄자가 되고, 어머니는 식량을 구하러 간다고 집을 나가 역시 굶어 죽거나 중국으로 도망가 탈북자로 살고 있는 집이 태반이었다. 그러니 집에 남은 자들은 10살 미만의 아이들과 늙은 노인들뿐이었다. 그들의 굶어 죽은 수가 지금까지 30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녀는 인민군 하사로 군에 있었으므로 그러한 절박한 사정을 모르고 오로지 김정일에게 충성하며 살고 있었다. 1998년 2월의 어느 날, 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부모님과 언니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휴가를 받아 집에 와 보니 끔찍한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부모님과 언니가 굶고 얼어서 죽은 지 3일이 지났고 16살 된 남동생은 굶어서 죽기 직전인데 쪼그라들어서 칠, 팔세쯤 되어 보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에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당에 대한 불신, 즉 사상적 반동 정신이 불꽃처럼 확 일어났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녀는 마음속의 타오른 반동의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앞뒤가 안 보였다. 군대에서 탈영은 곧 사형이라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을 포대기로 들쳐 업고 밤중에 산을 타고 도망가기 시작하여 20여일 후에 두만강변에 도착하였다. 3월 초였다. 강물은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먹은 것이 없으니 수영을 할 수 없어 물살에 떠내려갔다. 동생을 업은 포대기는 풀어져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정신을 놓은 상태로 물살에 떠내려갔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두만강 하류에서 중국 쪽 강변에 닿아 있었다. 마침 조선족들 몇 명이 물가에 나와 있었다. 그들의 구조를 받아 마을에 가 보니 그 곳이 바로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아버지가 원래는 중국의 조선족이었는데 어려서 북한으로 건너가 공산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 마을에 삼촌, 고모 등 아버지 쪽 친척들이 잘 살고 있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코디언 학원을 열어 잘 살게 되었다. 중국에서 북한의 탈북자들을 전도하는 한국에서 온 목사가 있었다. 그가 날마다 와서 그녀에게 전도를 했다. 5달이 넘도록 끊임없이 전도를 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간단한 내용을 반복하여 그녀에게 전도했다. 똑같은 말을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나중에는 진력이 났다. 듣기 싫었다. 그녀는 그 목사님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특히 ‘죄인’이라는 말에 강한 반발심이 생겼다. ‘내가 공산당원으로서 엄청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아왔는데 어찌 내가 죄인이란 말인가?’
목사님은 복음성가 테이프를 주기도 했다. 그 곡들 중에서 ‘얼마나 아프셨나’라는 곡은 북한에서 김일성 찬가로 부르던 노래와 음정이 비슷했다. 목사님은 자기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녀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목사님이 오지 않기 시작한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조선족 하나가 그녀가 잘 되는 걸 시기하여 중국공안국에 그녀가 탈북자라고 고발을 했다. 그녀는 쇠고랑을 차고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며칠 동안 그녀는 감옥 안에서 발악을 했다. 고발한 자에 대하여 이를 갈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벽에 이마를 찧으며 고함을 질렀다. 부자 친척들이 돈을 써서 바로 그녀를 구출해 줄줄 알았으나 믿었던 친척들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것이 더 분했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며 복수심과 배신감에 치를 떨던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는 절대적 무력감이 찾아왔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 때 목사님이 준 테이프에서 들었던 <얼마나 아프셨나>라는 복음성가 가사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이라고 되뇌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의 통증이 손과 발에 느껴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숨넘어갈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 때 전도하던 목사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옥이야, 너 때문에 내가 죽었노라. 내가 너 때문에 못 박혔노라.” 온 몸으로 예수님이 느껴졌다.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예수님, 예수님, 살려주시라요. 살려주시면 하라는 대로 다 할께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옥이야, 너는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옳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날 용서하시라요.”
죄인임을 깨닫게 되니 성령님께서 그동안의 모든 죄를 다 보여 주셨다. 교만의 죄, 공산당의 돌격대가 되어 김정일을 찬양한 죄, 인민들을 선동하여 김정일에게 충성하게 한 죄 등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단다.” 통회하며 회개하였다. 그런데 5달이 넘도록 교만하고 강퍅한 자기에게 간절하게 전도한 목사님에게 지은 죄는 목사님 본인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될 것 같았다. 말씀의 대언자로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주의 종에게 함부로 한 죄는 용서받고 나서 죽고 싶었다. 그래서 간절히 그 기도를 했다.
드디어 북송하기 위해 차에 태워져 차가 출발할 즈음에 중국 공안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이옥은 공안국장님이 한 번 만나보자고 한다고 내리라고 하였다. 국장실에 갔다. 국장이 꼭 자기 딸처럼 생겼다고 몇 살이냐고 물었다. “22살입네다.” “내 딸도 살았으면 22살인데, 너는 내 딸이야” 하더니 “내 딸아, 내 딸아” 하면서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둘이 다 살려면 그녀가 여기서 지금 바로 멀리 도망가야 하는데 갈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불현듯 목사님이 알려준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그 당시에는 귀에 담아두지도 않았었는데. 바로 전화를 하니 목사님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목사님이 그녀를 붙들고 엉엉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그녀를 양딸 삼았다. 연길에 있는 탈북자 센터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두만강 물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남동생이 살아나서 먼저 예수를 믿고 아침마다 금식하며 누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정말 지금도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을 먹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였으므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저녁때 다시 제자들과 그 곳을 지나면서 보니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있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의아히 여기며 어찌 된 일인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2~23)” 이 시대에는 믿음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다. 우리나라에 교회는 많고 예배도 자주 드리고 온통 기독교의 세상인 듯하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자들은 얼마나 될까 의아하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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