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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온 이백 스물 일곱 번째 편지
지난 11일 2012 여수세계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최초로 바다를 주제로 해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여수엑스포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글로벌 축제로 꼽힙니다. 한국에 있을 때 마무리가 한창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지척에 두고도 일정 상 보지 못하고 호주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93일간의 ‘꿈의 향연’에 돌입한 여수엑스포에는 80개의 전시관 있고 세계는 이 전시관을 통해 미래 과학의 모습을 보기도합니다. 현재 지구가 당면한 문제들을 보면서 지구의 미래에 대한 모습들을 세계의 모든 국가들과 기업들이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는 지구의 현재를 보지 않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현대 과학을 보지도 않고 미래 과학을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독교도 미래의 신학을 내다 보아야 합니다. 미래의 신학을 내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현대신학은 “현대”와 “신학”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먼저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신학이란 성서와 각 시대를 연결해 주는 채널 혹은 다리입니다. 신약 성서는 약 2000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한쪽으로는 성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각 각의 시대가 있습니다. 성서의 면으로만 보면 당대의 신학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성서를 배제한 체 그 시대를 보면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언어, 판단, 가치관, 사고의 양식 등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성서를 보아야 합니다.
각 시대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특성에 따라 각기 신학의 역할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신학은 그 시대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의미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징에 따라 신학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이 말은 시대가 급변하고 강한 도전이 생기면 신학도 그만큼 그 시대를 새롭게 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성서해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과거의 위대했던 신학은 그 시대에 가장 하나님을 잘 드러내고 성서의 정신을 보여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역할을 제대로 했을 때 이것을 훌륭한 신학이라고 한다고 김동건교수는 그의 책 21세가 신학의 과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신학이라고 말했을 때 현대를 언제부터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현대신학의 시작을 대체로 시기적으로는 계몽운동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20세기, 좀더 정확하게는 1914년 경으로 보고 신학자로는 칼 바르트부터 현대신학에 넣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무수히 많은 신학들이 있어 왔고 또한 그 신학들을 주창하는 수 많은 신학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신학 중 하나가 공공신학입니다. 사실 공공이란 용어의 의미가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및 윤리와 연관 되어 이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공공신학이 주장하는 바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분명히 이와 연관하여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 내지는 봉사를 도외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존에도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 속에서 정치신학, 해방신학, 사회선교신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기독교가 좀 더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확인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어 왔는데 이러한 흐름들이 공공신학이라는 개념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늘 날 당면해 있는 현대신학을 보면서 미래신학을 내다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미래신학은 미래에 다가올 시대 정신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나갈 것입니다. 다가 올 미래는 컴퓨터의 발전과 정보교환의 능력 증대로 말미암아 가상공간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작게는 게임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의와 중요한 의사결정도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맞추어 사이버교회의 등장과 함께(이미 등장했지만) 가상공간에서의 교회가 계속적으로 등장하며 그에 맞춘 미디어신학도 등장 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사이버 교회의 등장과 함께 사이버 상에서 드리는 예배가 지역교회에 가서 드리는 교회를 대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이버신학도 등장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왜 꼭 오프라인에서만 모여야 하는지 분명한 교회론이 정립되지 않으면 기독교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자각해야 합니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 동안 기독교는 항상 도전에 직면해 왔었고 그리고 그 도전을 항상 부딪혀 가며 이겨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도전은 계속 직면할 것입니다. 그 도전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것을 뛰어 넘는 신학 창출이 분명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자신의 처해져 있는 현실을 보면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나의 현재의 믿음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미래의 믿음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지금의 신앙의 상태도 어떠한지 솔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미래의 신앙의 모습을 예견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현재의 믿음의 모습이 불확실하다면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미래의 믿음의 모습도 불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현재의 신앙의 상태가 불 투명하다면 모든 이들에게 투명하게 나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주님이 오실 때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지에 대해서도 불투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는데, 공부하는 학생들도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데, 과학자들도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위하여 연구하는데 하물며 신앙인인 우리들이 현재의 나를 성찰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의 나를 예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의 나를 준비합시다. (김해찬 / 시드니하나교회목사)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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