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824호 / 형제가 연합함이 아름답도다

작성시간12.05.22|조회수5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824호 / 형제가 연합함이 아름답도다

 

  제18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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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가 연합함이 아름답도다

 

 

 

 

 

     오늘은 2012년 3월 13일 화요일이다. 주일날 오전예배를 마치고 남자 성도들이 점심식사를 하다가 주변에 좋은 산행길이 있는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 지 20년이 넘은 목사님은 주변의 모든 산길을 꿰고 있으므로 몇 군데 둘레 길을 하나씩 함께 다녀보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멀리 잡을 것 없이 바로 실행하자고 하여 화요일 오전으로 정하였다.

 

    참가자들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6명이었다. 모두 50대이다. 박종규(가명) 집사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크게 실패한 이후 5년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살다가 귀국하였다. 지난 해 12월에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낙향하여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된 분이다. 주영범(가명) 집사는 감곡에서 조경 사업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지금도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다. 머지않아 재혼할 예정이다. 우리 동네가 너무 아름다워 이사 오려고 준비하고 있다. 가끔 우리 교회를 출석한다. 양기명(가명) 집사와 이명희(가명) 집사는 부부이다. 우리 동네의 폐교된 초등학교를 구입하여 이사 왔다.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우리 교회에 연초에 등록한 분들이다.

 

    9시 40분에 교회 마당에서 모이기로 했다. 40분이 거의 되어 맨 먼저 박 집사님이 도착하였다. 밖에 나와 보니 날씨가 매우 화창하고 훈훈하여 우리 부부는 겉옷을 얇은 것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50분이 다 되어도 세 분이 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분이라 박 집사님은 시간관념이 분명했다. “아니, 이렇게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들하고는 함께 못 놀겠네요” 한다. 나는 괜스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변명을 했다. “아마 약속 시간을 잘 모르고 있나 봐요. 다시 한 번 전화해 봐요”라며 남편을 채근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과연 대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의 차이가 확연했다. 나도 상대방이 약속 시간에 늦는 걸 싫어하는 편이지만 잠잠히 기다려주는 편이다. 박 집사님이 “우리끼리만 그냥 출발합시다”라고 한다. 9시 52분에야 세 분이 부랴부랴 도착하였다. 사실 옛날에 비하면 그다지 늦은 편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래 들어 시간관념이 밝아진 것 같다. 과거에는 ‘Korean Time'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30분 정도는 그저 그러려니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10분 정도만 늦어도 질타를 당한다.

 

     봉고차를 타고 5분 정도 갔다. 벌써 봄이 왔다고 여기저기서 일하는 분들이 눈에 띄었다. 산 초입에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6명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이다. 단 한 가지, 예수를 믿고 산성교회에서 주일날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시133:1)”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2)”

 

     전에는 서로 모르는 자들이었으나 몇 차례 함께 한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니 이제는 형제가 되었다. 외모로나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하나님의 한 자녀들로서 의기투합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박 집사님이 몇 달 전에 서울에서 내려올 때 여동생이 목사님에게 부탁했더랬다. “오빠가 그 교회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오빠는 너무 이성적이어서 아직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고향이라고는 하나 일찍 떠난 탓에 타향과도 같은 시골에 왔으니 모든 게 설 것이 분명하다. 그는 주일날 예배에는 꼭 참석하였다. 처음보다는 훨씬 마음도 편안해진 듯했다. 말수가 적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유형의 사람인 듯하다. 나도 또한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서 그의 성격이 이해가 된다.

 

    50분 정도 소방도로로 난, 잘 닦여진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주 집사님은 조경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주변의 나무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나무 얘기를 들으면서 상식이 늘게 되어 뿌듯했다. 공기는 신선했고 상쾌하여 우리들의 폐가 기뻐했다. 심호흡을 하며 좋은 공기를 실컷 들여 마셨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온 몸이 녹아내렸다.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이 집사님은 방 안에 봄을 들여 놓고 싶다고 갯버들과 개나리를 한 다발 꺾었다.

 

     50대가 되니 운동의 중요성이 실감된다. 40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었는데 몸의 여러 부분들이 삐걱거린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꼭 한 시간씩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집 주변의 농로 올레 길을 걷는 것과는 다르게 산 속의 둘레 길 걷기를 했더니 몸과 마음이 훨씬 더 가뿐해지고 상쾌해졌다. 등에 약간의 땀이 흘러 노폐물이 빠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겨울 동안에는 땀 흘릴 일이 별로 없어 노폐물이 많이 쌓였으리라.

 

    내려오는 길은 더 빨랐다. 40분 정도 걸려서 내려왔다. 집에 돌아오니 11시 40분 이었다. 나는 오전에 산행을 하고 나면 점심때가 될 거라 생각해서 나의 주특기인 ‘야곱의 팥죽’을 끓여 대접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이미 팥을 삶아 놓았었다. 양 집사님 부부야 사택에서 여러 번 식사를 했으므로 괜찮겠지만 박 집사님과 주 집사님은 아직은 사택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흔쾌히 대답하지 않는 걸 내가 간곡히 권하여 함께 팥 칼국수를 만들어 먹기로 하였다. 물론 팥 칼국수는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으니 함께 분업하여 즉석에서 만들어야 한다.

 

    한 번 교육을 받은 사람이 낫다고 양 집사 부부는 저번에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탓에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살림을 친히 하며 사는 주 집사도 으레 그렇거니 하고 끼어들어 일을 맡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목사님이 하는 ‘밀가루 반죽 밀기’였다. 오늘 목사님은 12시에 목회자 모임이 있어 가야 했기 때문이다. 뭣 모르고 달려든 일이었는가 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반죽을 밀었다. 여주인인 나는 팥을 걸러 끓였다. 이 집사님은 칼로 썰었고 양 집사님은 썰어놓은 것을 털었다. 아직도 낯선 것이 다 가시지 않은 박 집사님은 남의 부엌에 들어오기가 어색한지 서서 구경을 하겠다고 하였다.

 

    박 집사님은 종가 집의 귀한 외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사업에 실패한 후 외국에 나가서 5년 동안 혼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부엌일을 배웠다. 그가 외국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고향 집에 내려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종규가 이제는 밥도 잘 하고 설거지도 잘한데요, 글쎄.”

91살 된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홀로 둘 수 없기에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서울 일을 다 접고 내려왔다고 한다.

 

   자기 집에서는 잘 하지 않는 부엌일을 하면서 낑낑대는 남편을 보다 못해 타박을 하는 이 집사님이 “이 이는 글쎄 설거지 한 번을 안 해줘요” 한다. 그 때 지금은 밥도 하고 설거지도 손수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박 집사님이 얘기하였다.

 

   “내가 외국에서 돌아와서 온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엄마, 물 줘요’ 해서 내가 혼을 냈지요. 지금 세상에는 옛날과 달리 남자도 부엌일을 해야 결혼 생활을 무사히 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요. 그 후로부터 설거지는 남자 셋이서 돌아가면서 했어요.”

 

    이 집사님이 그 얘기를 듣고 남편에게 “그 봐요. 다른 집들은 다들 주방 일을 남자들이 도와주잖아요. 혹 재벌이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남자들도 주방 일을 해야 한다구요”라고 했다. 그 때 주 집사님이 “주방 일 돕는 일과 재벌과는 별개의 문제지요. 재벌이라도 제대로 된 남편이라면 주방 일을 도와야지요” 하니 그 말이 가장 신선한 최신판으로 인정받았다.

 

     팥 칼국수가 완성될 즈음, 나는 김영덕(가명) 집사님이 생각났다. 그는 지난 해 11월 25일에 비어있는 시골집으로 이사 오신 분이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늙고 빈 몸으로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살면서 약한 시골 교회에서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여 우리 교회에 합류했다. 나는 사택에 손님이 와서 식사를 하게 될 때나 외식을 하게 될 때면 홀로 사는 그분을 꼭 챙긴다. 특히 남자가 홀로 살면서 끼니를 때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정년 2년 전에 부인이 암으로 죽었다. 부인이 죽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그가 조그마한 시골 학교로 자원해서 왔다. 마지막 일 년을 조용히 보내셨다. 그 때 우리 교직원들은 평생 처음으로 즐겁고 한가한 교직생활을 했다. 욕심을 버린 교장선생님께서 교직원들을 닦달하지 않으니 모든 직원들이 잘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소신껏 하면서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고 근무했던 한 해였다. 그분이 하는 얘기가 “혼자 살다보니 가장 힘든 것이 밥 먹는 것이더군요. 그동안 아내가 모든 걸 해줬는데 이제 와서 나 스스로 밥 해 먹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더만요. 식당에 혼자 가는 것처럼 부끄럽고 눈치 뵈는 일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 때에 나는 홀아비의 심정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외식할 때에나 집에서 특별한 식사 대접을 하게 될 때에는 우리 교회의 홀아비 성도들이 생각난다. 이 집사님이 이사하기를 미적미적 미루고 있는 주 집사님에게 “주 집사님, 우리 사모님이 홀아비들을 잘 챙긴다잖아요. 그러니 빨리 이쪽으로 이사 와서 산성교회로 오세요”라고 했다. 주 집사님이 “사모님이 홀아비들 보모네요” 하여 모두 히히히, 호호호 웃었다.

 

   김 집사님은 전화를 받고 바로 오셨다. 뜨끈뜨끈한 팥 칼국수를 맛있게 먹으며 만찬교제를 나눴다. 요 근래 들어 세 번째로 팥 칼국수를 먹는 김 집사님과 처음으로 맛있는 팥 칼국수를 먹어 보는 주 집사님이 두 그릇을 비웠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니 그동안의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다.

 

    즐거운 하루였다. 한 하나님, 한 믿음을 갖고 한 형제가 되어 한 밥상에서 식사를 하니 더욱 형제애가 굳어지게 된 것 같았다. 전에는 서로 낯모르는 자들로서 길에서 만나면 눈길 한 번 안 주고 스쳐 지나갔을 테지만 이제는 한 하나님 안에서 만찬교제와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지게 된 모습이 아름다웠다. 천국에서의 삶은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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