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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TV를 보면 무언가에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현대인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극심한지 또 그 목마름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곤 합니다.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또 이런 모습은 사회가 발전하고 편리해 질수록 더 극심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문명의 발전은 편리함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큰 욕심을 선물해 줍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좋은것을 가지면 항상 더 좋은것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문명의 발전은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이에 비례해 자연히 사회는 바빠지며 가정은 파괴됩니다. 이런 사회에 사람들은 편히 쉴 곳이 없어 스트레스와 벗삼아 살아갑니다. 사람은 많으나 외로움은 더해가고 충분히 가졌으나 우울증은 깊어가고 편안한 집과 침대를 가졌으나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행복하고 별일없이 사는 사람을 찾기가 힘이들 정도입니다. 다들 피곤에 찌들어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더 좋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오직 만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는 욕심을 선물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욕심이 클 수록 공허함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요즘 세상 문화를 보면 마음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고 스트레스에 잠도 이루지 못하면서 계속 헛된 것에 눈을 뜨기만 합니다. 특히 TV나 세상의 놀이문화들을 보면 그 자극성에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현대인의 병이 깊은 만큼 세상 문화의 자극성은 심각하게 높아집니다. 이런 자극적인 문화는 '인생 뭐있어? 즐기면 그뿐이지.' 하고 정욕을 부추기며 더 깊은 탐심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눈이 어두워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나를 넘어뜨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던 자극적인 행위들에 도리어 중독되어 그것에 묶여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극적인 행위들에 병적으로 집착함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반증이 되는대도 불구하고 입으로는 행복하다며 스스로 주문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문화에는 절대로 만족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심적 불만족 때문입니다. 때문에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하며 거기서 심적 안정을 얻으려 하는데 이도 불안이 되어 나를 묶어 지배합니다. 행복을 얻었다면 이 같은 행위들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순이며 거짓의 증거입니다.
종교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현대인 이지만 모습은 지극히 종교적 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현대인 이지만 사실상 지금 세대만큼 종교적인 세대도 없을 것입니다. 편할 만큼 편하고 가질 만큼 가졌으나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함을 인식하므로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하고 기원하고 바랍니다. '모든 문제는 물질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하고 믿으며 욕심에 끝없이 발전했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점집이 늘어나 하나의 사업이 되고 있으며 기수련, 요가 등은 운동이 되었고 이름을 개명하는 일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은 잠깐의 심적 안정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사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잠깐의 심적 안정에 중독되어 자신의 탐욕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이 끝없는 목마름은 세상것으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인지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현대인 이지만 실상은 요행과 기적을 바란다던가 신비로운 현상에 쉽게 미혹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발전하고 지식이 넘치는 세대 이지만 가장 분별력 없고 헛되며 가치없는 삶을 사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우상숭배는 과연 극심합니다. 그것이 없을 때 불안하거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불안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병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이렇듯 마음 의지할 곳 없어 시작한 그 행위가 후에는 다시 정신적인 속박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상숭배는 병입니다. 또 이 우상숭배는 아주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옵니다. 불안과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자신의 어떤 행위든 자신의 입장에서 풀어가게 됩니다. 우상의 의미가 바로 내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예로 듭니다. 간단하게 제사란 무엇일까요?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살아서 이런 정성을 다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마음처럼 산 사람끼리 서로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이후는 다릅니다. 귀신이 되어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긴 조상신은 형식에 맞게 음식을 제때 대접 받으면 복을 공급하고 재앙을 피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복을 받고 재앙을 피하는 방법이 어디 있을까요? 이 제사의 의미가 조상과 부모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내 뜻일까요? 보십시요. 우상숭배는 사람이 만든 생명이 없는 것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욕심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뜻을 부여하기에 이처럼 좋은 수단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도 조건적 이어서 형식에 어긋나거나 제사를 지나치면 재앙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느 순간 제사에 지배 당하게 됩니다. 죽은 생명은 사망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제사를 천번, 만번 지내도 사망에 매인 상태를 풀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사를 챙겨도 욕심에 따른 죄악, 지나쳐도 불안함에 죄악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서 오는 사람의 생각은 공통적으로 이 한마디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내 인생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것이 진리다.' 하고 쉽게 악행에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된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죄인된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 인류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면 그곳은 지옥과 다를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보십시요.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악행에 의미를 부여했습니까? 우상숭배는 죄악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만 잘되면 남이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이기적으로 세상에서 욕심을 더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선이 아니며 진리가 아닙니다.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이 땅위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나를 넘어뜨리는 악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이웃 보다 나의 탐심입니다. 매사 우상숭배를 분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육신의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죄악을 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땅에서 채우지 못하는 목마름을 땅에서 다시 찾는 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항상 사람에게 땅엣것만 구하게 만들어 사람을 타락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는 선이지 결코 악이 아닙니다. 선함은 내 마음에 쉼을 주고 편한 잠자리를 선물합니다. 하지만 악함은 말씀하신바 결코 쉼이 없습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결코 편한 잠자리를 선물받지 못합니다. 몸은 쉬고 있으나 마음은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쉬는 것만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전부 안식해야 합니다. 또 이 안식은 결코 사람의 능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항상 땅으로만 향해있기 때문에 욕심과 걱정을 얻을수는 있으나 만족을 얻을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이 마음의 안식 곧 행복을 위해 사람이나 짐승,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지만 그 뜻은 악하고 헛된 자기 자신의 뜻으로 결국 자기 집착을 벗어날 수 없는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마음의 안식이 없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욕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상숭배는 해결은커녕 오히려 욕심을 부추겨 더 큰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하고 결국은 사망의 권세로 나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나의 탐심과 자기 집착에서 오는 것으로 이는 근본이 악입니다. 때문에 우상숭배에 완전히 지배당한 사람은 매우 공격적이고 매사 불신에 자기방어하며 과시에 음란하고 모든 악행을 저지르기를 당연한듯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뒤바뀐 삶에 매사 남탓만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의 불만족이 어디서 오는지 이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욕심은 악한 마음으로 욕심을 가진자는 그 누구에게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아벨을 질투했고 이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가인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불안감입니다. 자신을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죄를 마주 했을 때 돌이켜 그 죄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타인이 이와 같은 죄악으로 나에게 해를 입힐까? 하며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반사적으로 사람에게 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이런 사람의 생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간단합니다. 타인의 죄악된 생각보다 더 강해야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문제해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악된 생각이 더 심화되고 결국 나에게 해를 입힌 자보다 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찬 세상은 죄악에 지배되어 타락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은 불순종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께 대해서도 불순종하는 사람인데 사람끼리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도 아닌 우리가 불순종하며 죄의 길을 택하고 살아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에 매여 모든 악행 저지르기를 당연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인정하는 선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불만족과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럴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행복에 가득찬 삶을 살며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죄인된 사람의 마음은 사망에 매여 육신의 욕구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원하는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열매는 불순종으로 이는 항상 죄악을 낳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람이 실패한 피조물인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선악과는 사람에게 선택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의 의지가 없다면 사람은 사람으로 불리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감정과 생각조차 없는 기계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상태의 피조물 이라면 지금 쓰고 있는 글 조차 쓸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감정과 생각조차 없는 피조물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생물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감정과 생각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의지가 있고 때문에 만물중에 뛰어난 피조물 입니다. 절대 실패한 피조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선택의 의지가 있고 사망의 길은 사람이 선택한 길입니다.
말씀하시기를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셨습니다. 아담의 뿌리인 우리가 사망을 이길수 없는 바 결코 죄악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인인 사람의 상태로는 아무리 스스로 힘을 써도 결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가 도리어 우리의 상태를 밝히 비춰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 이라는 사실을 율법이 밝히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고 자신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딱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인정해야 이 상황을 해결하는 단 한분을 찾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행위가 아닌 용서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 땅위에 어떤 이름이 사망을 이길수 있습니까? 어떤 이름이 죄를 사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까?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고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늘에 오르신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흘리신 보혈에 우리가 깨끗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 믿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관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죄악의 대한 진노와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고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우리가 거듭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성도는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고귀하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성도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 생명으로 거듭나 의에 속한 성도가 되었다면 죄의 결과를 아는 것이 당연한 순리입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짓는 죄인은 죄의 결과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로 그들의 결말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 하거나 불안에 시달리거나 철창을 피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자신이 겪게 될 결과를 알았다면 그들이 결코 범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도 이와 같습니다. 선한 하나님과 멀어져 죄악에 거하는 사람은 결코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죄악에 대항하지 않고 평생을 욕심에 살지만 결코 만족은 얻지 못합니다.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오히려 고통과 저주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더 크고 편안한 것을 위해 죄악에 타협하고 이웃을 죽이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이 땅위에서 부유하게 살지 몰라도 결말은 스트레스 뿐인 힘든 삶과 멸망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작은 죄라도 죄는 우리를 교만하게하고 넘어뜨리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거짓말 하나로 불안에 사로잡히고 이 불안으로 인해 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내 눈을 가리는 악으로 죄악은 우리를 온갖 세상 욕심에 눈이 멀게 하고 결국 우상숭배로 이끄는 무서운 사단의 무기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우리는 죄에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주님을 만난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우리의 삶은 사망과 죄와 악의 근원인 사단이 주관했지만 주님 안에서 성령충만한 삶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오냐오냐 기른다고 자녀가 올바르게 자라지 않습니다. 매를 들지 않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연단하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하셨습니다. 죄가 우는 사자같이 무서울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흑암이라 해도 작은 불빛 하나에 힘을 쓰지 못하는 법입니다. 사단을 크고 크신 영광인 하나님께 비할 수 있을까요? 보기에 세상이 타락해 하나님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뉴에이지와 신비주의에 물든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영적으로 목마른가를 보여주는 실상입니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갈수록 미신과 종교적 엑스타시에 빠져 심각하게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이 도리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키고 결코 사랑을 소멸치 않으며 소망으로 나갑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으로 통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를 세상에 욕심에 내버려 두기도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겪어보고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탄식하시고 오래참으심으로 우리가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자녀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같은 순종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말씀하십니다. 배고픔은 겪어본 사람이 알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사람이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왜 죄 가운데서 살았는지 왜 힘든 고통에 살았는지 그 이유는 모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계속 죄 가운데 중독되어 복음을 외면한다면 기회는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다 내려놓고 구하십시요. 분명히 믿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찾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진정한 행복과 자유가 있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찾는다는 것은 잃어 버렸을 때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도 성경에 있습니다. 사람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과 가까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억압되어 사는 것이 아닌 그것을 정복하고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에서 우선순위는 항상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불만족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만족은 항상 더 큰 만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인 것입니다. 이를 깊이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죄를 씻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으로 선과 악은 결코 어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암덩어리가 결국 온몸을 병들게 하듯 아주 작은 죄라도 있다면 결코 천국을 허락 받을 수 없습니다. 기업으로 주시는 성읍의 모든 족속을 진멸토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상태도 같습니다. 죄에 묶여있는 죄인의 상태로는 당연히 죄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곧 죄사함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삶 곧 죄악에서 돌이키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십시요. 회개해 돌이키고 사함 받으십시요. 이 세상에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를 사하시고 사망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로써 본질을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승천하시고 그대로 다시 오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또 연약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심으로 행할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 쓸모없는 나의 생각,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고 주시는 은혜를 거저 받으십시요. 작고 작은 피조물로 아무것도 드리지 못함을 깨닫고 이 몸을 주님 앞에 드리십시요. 내주하시는 성령을 믿으십시요. 항상 성령의 간구하심을 듣고 기억하고 의지하십시요.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를 기쁘게 여기며 말씀과 기도로 모든 상황을 간구하며 이겨내십시요. 항상 만족을 주시며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요. 사람은 여전히 선택의 의지가 있습니다. 부디 선한 진리를 택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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