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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사람이 신앙의 푯대가 되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러나 신앙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라고 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는 말을 하기도 했다. 먼저 믿은 자들의 신앙이 나중 믿는 자들에게 신앙을 안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을 너무 신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라는 말을 음미해보아야 하겠다. 이 또한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의 분파를 책망하였다. 아볼로 파, 바울 파, 베드로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개탄하였다. 아볼로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느냐, 베드로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너희 죄를 대신하여 죽었느냐?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하나님의 대속제물이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돌려 유능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 있다. 박식한 성경 지식의 소유자, 유창한 설교자, 아름다운 목소리의 찬양인도자 등에게 매료되어 그들을 찬양하고 높이게 되는 우를 범한다. 물론 잘한 일들은 칭찬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칫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은 교만해져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수가 많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 지도자의 추종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그러한 일을 많이 경계하고 계신다. 우리의 참된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터 위에 서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지도자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즉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평신도들은 교회의 지체일 뿐이다. 교회의 각 지체는 머리의 명령을 받아 몸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데 연합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몸이 그러하듯이. 마태복음 16장 15~24절에 베드로의 이중성이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쳤다. 이제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정확한 대답에 만족하셨다. ‘아, 내가 잘 가르쳤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런데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은 바로 후에 예수님이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간하여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까지 성경을 읽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베드로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들이 많다. 마치 베드로가 교회의 머리인 양,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고 베드로를 성인시하는 무리들이 있다. 베드로 또한 인간이다. 그도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임에 틀림없다. 설령 베드로와 같은 자라도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동안에 ‘주의 종’이요, ‘주의 군사’로 모집된 자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어떤 목사, 어떤 장로는 마치 자기가 교회의 머리인 양 행세하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경우가 있음을 본다. 차츰차츰 자기의 자리를 높이다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보혜사라는 둥, 심지어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여 숭배를 받으며 만족해하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다. 더욱 더 답답한 일은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을 좀 자세히 읽어 보시라. 하나님께서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얼마나 많이 경계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의 나약성에 대해서, 사람은 믿지 못할 불완전한 자임을 보여준다. 쉬 올무에 빠져 죄에 침륜하는 존재임을 가르쳐준다. 많은 경우가 있지만 노아와 다윗을 살펴보겠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는 그 당시 온 세상이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한 시대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을 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 성경은 먼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인간 스스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라고 했다. 그러나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후 포도 농사를 지은 노아는 포도주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낸 추악한 몰골을 자식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얘기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기도 하며 술꾼들에게는 자기합리화에 빠지게도 한다.
“이봐라, 하나님의 택한 자인 노아도 술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냈잖느냐? 하나님께서는 술을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락하신 것이 아니냐?” 술에 관한 것은 여기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나가겠다.
아무리 그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았을지라도 그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매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으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존재는 못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는 거창한 인정을 받은 다윗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였으나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성경은 여러 번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윗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배려임을 알아야 한다. 그토록 성실하고 신실했던 다윗도 어느 날 궁중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체에 반해 정신을 잃고 남편이 있는 유부녀임을 알고서도 그녀와 동침하였다. 더욱 더 추악한 것은 그 사 실을 숨기려고 충신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술수를 썼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과정을 살피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 다윗을 책망한다. “죽어야 할 사람은 당신이라”고 말하는 나단의 책망을 듣고 그는 회개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만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 죄를 지은 것이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구출하여 주신 것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그리 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 때문에 그리하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가끔 착각에 빠져 사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어서가 아닌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착각에서 속히 빠져 나와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곤 한다. 그러면 ‘다 하나님의 은혜로구나’하는 깨달음이 오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고백하게 된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전주 시내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열심히 하여 몇 년 만에 꽤 큰 교회가 되었다. 요즘에 개척교회 하나 자립하는 교회로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도 새로 짓고 교회 재정도 자립하여 한숨 돌릴 만 할 때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아마도 개척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사모님의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어느 여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남편과의 불화 문제로 상담을 하러 왔다. 목사님은 그런 남편과는 이혼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목사님과 집사님은 재혼을 했다. 마치 다윗과 밧세바의 후속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후에 성도들은 하나 둘 빠져 나갔다. 이제는 교회의 문을 닫게 될 지경이라고 한다.
오늘날 한국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즉시 교회를 옮기는 것이다. 두 번 생각하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기도해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도시 교회 성도들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몰려다닌다. 그런 성향을 이용하여 요즘 개신교회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신흥 이단 종교가 득세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깊이 회개해야 한다.
경기도의 어느 개척 교회 사모님은 수년 동안 월세가 지긋지긋하여 날마다 철야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교회를 자그마하게라도 짓게 해달라고. 하나님께서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그랬는지 어느 집사님의 도움으로 경매로 싸게 나온 교회 부지를 사게 되었다. 도움을 준 집사님은 그곳에 아담한 교회를 지어 아름다운 교회의 목회 현장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싸게 산 부지를 몇 주 만에 많은 이윤을 남기고 다른 목회자에게 팔게 되었다. 이제 몇 억의 돈을 손에 쥔 사모님은 교회 건축은 잊어버리고 그 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재미에 빠졌다. 몇 년 후, 사모님은 돈을 많이 소유하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목회는 엉망이 되어 거의 목회를 접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인간의 실패담이 널려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순전하고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도 이런 실패의 일들은 많다. 왜 하나님께서는 잘 한 것만 기록하시지 않고 잘못한 것들을 더 많이 기록하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리에게 거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라고 의도적으로 그러시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난했을 때에는 교회 봉사도 잘하고 기도생활도 잘하던 성도가 사업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면 주일날 7시에 시작하는 1부 예배를 후딱 마치고 산으로 들로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놀러 가는 일이 허다하다. 변질되지 않는 한결 같은 믿음, 즉 정금 같은 믿음이 귀한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여,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변질되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삽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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