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834호 / 불가해한 인생 여정

작성시간12.06.11|조회수5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834호 / 불가해한 인생 여정

                  

 

  제18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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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해한 인생 여정

 

 

 

 

 

      2012년 4월 23일 월요일이었다. 전 날은 주일이어서 하루 종일 바빴다. 새벽기도회 3시부터 6시까지, 주일오전예배 10시부터 12시까지, 주일오후예배 3시부터 4시 30분까지 하고 사이사이에 상담, 교제, 기도, 불 피우기 등의 일들이 있다. 시골교회 목사는 대개 혼자 도맡아서 한다. 다행히도 우리 교회는 장로님이 운전해 주시고 오후 예배 때 찬양 인도해 주시는 집사님들도 계시고 주일학교 공과공부를 맡은 집사님들도 계신다. 이웃 어느 목사님은 운전도 해야 하고 주일학교 공과공부도 가르쳐야 하는 분도 계신다.

 

    목회자로서의 삶은 주일이 가장 힘든 날이다.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이면 조금 피곤하여 오전에 몸과 마음이 늘어진다. 어떤 목사님 부부는 월요일에는 가까운 도시에 나가 목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푼다고 한다.

그 날 오전에 우리 부부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1시 경에 전화가 왔다. 우리가 부임하기 전에 잠간 우리 교회를 다녔던 분인데 요즘에는 통 교회를 나오질 않았다. 주일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57세였다.

 

     부부가 트럭을 타고 전주에 온 언니를 만나고 오다가 졸음운전을 하던 택시가 가드레일에 부딪치며 튕겨서 앞에 가는 트럭을 받았는데 트럭이 돌면서 옆의 방음벽에 부딪쳐 부인은 죽고 남편은 하체를 심하게 다쳐 일 년도 넘게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전북대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있고 죽은 사람은 방치할 수 없으니 빨리 장례를 치러야 한단다. 유가족으로는 딸이 하나 있다. 다행히도 딸이 재작년에 결혼을 해서 사위가 있어 상주 역할을 하게 된 모양이다. 그 사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우리는 얼굴도 못 본 사람이었다.

 

     딸과 사위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재작년에 결혼식장에 갔다 와서 이구동성으로 ‘그 집 사위 참 잘 얻었다’고 칭찬을 했었다. 장모도 만날 때마다 사위 자랑을 많이 했다. 사위의 말인즉슨 기독교장으로 하고 싶어서 자기네 교회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고인과 관련된 교회 목사님이 장례를 집례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분이 우리 교회에 요근래에 다니던 분은 아니지만, 우리 교회 구역에 사시는 분이므로 요청이 있으면 필히 장례를 집례해야 한다고 생각되어 시간을 약속하였다. 농사철이라 교우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일손이 그다지 바쁘지 않은 교우들4명을 급히 소집했다.

 

     월요일 4시에 교회에서 출발하였다. 전북대병원 장례식장이었다. 도착해보니 6시 30분에 입관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상주는 사위였고, 유가족이라고는 딸과 손자 하나, 손녀 하나였다. 참으로 초라하고 불쌍한 장례 정경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큰일을 치를 때 유가족들이 북적거려 시끌벅적한 게 더 좋아 보이는가 보다. 텅 빈 장례식장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나마 교통사고로 젊어서 죽은 어머니를 잃은 어린 딸의 모습에 다들 울적해졌다. 요즘 젊은 사람치고 사위는 의젓했다.

 

    홀로 이 일 저 일로 분주하면서도 힘든 티 안 내고 잘 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겨우 3살짜리 아들, 40일 밖에 안 된 갓난아이인 딸이었다. 딸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두 아이를 돌보느라 바빴다. 3살짜리 아들은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슨 이해가 있을손가, 여기 저기 헤집고 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40일 밖에 안 된 갓난아이는 한시도 눕혀 놓을 수 없으니 딸은 울 겨를도 없겠다 싶었다. 딸에겐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인지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고인의 삶을 생각하노라면 참 눈물겹다. 아니, 남편의 삶이 더 눈물겹다. 여자는 원래 서울사람이었다. 서울에서 여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남자는 전라도 정읍시 옹동면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청년 시절에 시골에서는 농사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으므로 돈 벌려고 서울에 갔다. 그는 정녕 생김새부터가 시골 사람이었다. 얼굴에 순박함 그 자체라고 쓰여 있다. 총각 때는 더 순진해 보였으리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줄거리는 알고 있다. 어찌어찌해서 여자와 남자가 만났다. 여자는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 했다. 남자는 과묵했다. 촌사람인 남자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여자에게 반했으리라. 여자는 시골의 순박한 남자가 좋았으리라. 어쨌든, 둘이 연애를 했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다. 정확히 병명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의학계에서는 정신신경계통의 질병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귀신이 들었다 해야 할지, 악령이 씌웠다 해야 할지, 아무튼 제정신이 아닌 때가 많았다. 남자는 처음에는 몰랐다고 했다. 그저 너무 똑똑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자기에게는 과분한. 여자에게는 자매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지금은 사모인 언니가 그 정신이 이상한 동생을 보살펴왔다. 아직까지도 동생을 전화로, 혹은 만나서 돌보아 주었다. 이번에 만난 것도 그 언니였다. 시골까지 올 시간이 없으므로 전주에서 만나 무슨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동생에게 남자가 생긴 것을 안 그 언니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남자가 너무 착하니 정상이 아닌 동생을 잘 돌보아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늘 제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제부에게 떠맡긴 격이었으니.

 

    급작스레 결혼식을 올렸다. 딸을 낳았다. 결혼하여 살다 보면 혹, 괜찮아지려나 하고 기대했으나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언니는 시골에 가서 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남자의 고향인 시골로 내려 보냈다. 시골에 와서 둘째 딸을 낳았다. 여자는 딸들은 끔찍이도 예뻐했다.

 

    둘째딸은 노래를 잘 했다. 초등학교 때에 어느 TV 프로그램의 전국 노래자랑에서 2등을 했다. 꿈이 가수였다. 그런데 둘째 딸은 고등학생 때 빗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를 중퇴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살았다. 부모들의 속을 많이 썩였다. 3년 전인가 여름에 친구들과 물놀이를 갔다가 죽었다. 아마도 심장마비였던가 보다.

 

    그 이후에 더욱 우울증에 빠져 지냈다. 여자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남자는 엄청 힘들게 살았다. 여자는 살림을 할 줄 몰랐다. 하루 종일 방 아랫목에 앉아 멍하니 지낸다. 남자는 일을 하러 나갈 수가 없다. 여자 혼자 놔두고 나갈 수가 없다. 여자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다행히도 여자가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국가에서 약간의 생활비가 나온다. 때로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었다. 사랑일까, 의무감일까, 아니면 자포자기일까. 남자는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한 번 살기로 작정한 이후로 25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여자를 아기처럼 돌보았다. 여자 앞에서는 화도 안 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푸념을 하곤 했다.

 

     “내가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이게 무슨 인간이 사는 겁니까?”여자의 집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처음 시골에 내려왔을 때에는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 차츰차츰 교회에서 멀어지더니 요근래에는 통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그 마을을 심방할 때마다 그 집을 들렀다. 말로는 ‘교회 가야지요. 그러나 아직은 아니고요. 좀 있다가 꼭 나갈게요’라고 말은 잘 했다. 그 집에 가면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면 죽은 둘째 딸 얘기를 하며 눈물 바람을 한참 한다. 우리는 다 들어준다.

 

     여자는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자기의 허황한 얘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남자는 이제는 더 이상 여자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뻔하다. “또 그 얘기” 하면서 고개만 설레설레 흔든다. ‘자기를 포장하여 얘기하기’가 여자의 병증인가 보다. 친구도 없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수준이 안 맞아 함께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 ‘혼자 집안에 틀어 박혀 자기와 놀기’도 역시 여자의 병증인 것 같다.

 

    남자는 전도하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기만 한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여자가 저렇게 된 것이 마치 하나님의 잘못이기나 되는 것처럼 원망 섞인 말을 가끔 하기도 한다.“은미 엄마를 봐요. 하나님이 계시면 저럴 수 있는 겁니까?”우리는 말문이 막힌다. 어떻게 설명해 줄 방법이 없다. 너무도 비참한 현실의 삶 앞에서 유용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유구무언일 뿐이다.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하나님, 이럴 때 우린 어떻게,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합니까? 우리의 지혜로는 그를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남자가 시골로 내려온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 십 번 그를 전도하려고 시도를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과 여자를 교회 앞까지 태워다 주고 자기는 가버렸다. 그나마 몇 년 후에 여자도 아이들도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큰 딸은 신앙이 좋은 남자를 만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 모양이다.

 

     하관예배를 마친 후 파놓은 묘에 어머니 관을 넣고 흙을 덮자 그제서야 딸의 울음이 터졌다. 25년 동안 어머니 역할을 잘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것이 딸들에게는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지 딸이 아닌 사람들은 모르리라. 고인의 어린 딸의 통곡소리가 온 산에 울렸다. 모든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딸이 친정어머니가 없으니 남편이 속 썩일 때, 혹은 시집 식구들의 푸대접을 받을 때 어디 가서 속상한 하소연을 할 수 있으랴. 장례를 마치고 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불쌍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는 잊고 이제는 어린 자식들 잘 기르며 용감하게 살아라. 잊을 건 잊어야 해. 이젠 네가 어머니잖니? 네 아이들에게 상처 입히지 않을 만큼만 슬퍼하여라.”“그동안 저희 어머니 심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 잊고 열심히 살게요.”“아버지 치료된 후에 집에 오시면 함께 우리 교회를 방문해라. 함께 아버지 영혼 구원을 위해서 힘써보자.”"꼭 찾아갈게요. 저희 아버지도 좀 자주 심방해 주세요. 사모님, 고맙습니다. 저희 어머니 장례 잘 치르게 도와주셔서요. 목사님의 설교 말씀과 기도내용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수요일은 비가 왔다. 바람도 불었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어제 장례를 마치게 되어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 하관을 하고 봉분을 만들려면 엄청 고생을 했을 텐데, 창밖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수요일 밤 예배를 마치고 책을 좀 읽다가 10시 30분경에 잠을 자려고 이부자리를 깔았다. 그 때 전화가 왔다. 밤중에 오는 전화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 시골에서는 급한 용무가 아니면 10시 이후에 전화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긴장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반신만 많이 다쳤다던 남자가 치료를 받는 도중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10시경에 갑자기 죽었단다. 장례식 내내 하반신이 불편하면 어떻게 살까, 걱정했었다. 하반신만 다친 게 아니라 장기들도 다친 모양이었다. 사실 교통사고가 나면 눈에 보이는 외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사위가 또 장례예배를 맡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남자는 예전에 교회를 몇 번 나온 적은 있지만, 그 후에 10여 년 동안 한사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사람이 어차피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졌으니 좀 일찍 가는 거야 그렇다쳐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그가 너무 불쌍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거리다가 새벽을 맞이했다. 다음 날 5시에 입관예배를 드리러 갔다. 오는 동안 성도들 모두 불쌍한 그 영혼을 생각하며 침울했다. 홀로 남은 딸도 불쌍했다. 고아가 되었구나. 다행인 것은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것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지겠지. 상복을 입은 자그마한 딸은 우리를 보자 울었다. 꼭 껴안고 함께 울었다.

 

   “열심히 살아라. 아이들 잘 키우고”라고 밖에 말해줄 것이 없었다. 사위가 말했다. “어젯밤 제 형님이 예수님 영접을 시켰대요. 영접을 한 후 바로 돌아가셨답니다.”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참 잘 됐다, 라고 말했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하루걸러 이어진 장례식인지라 문상객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호주가 죽었으니 더더욱 문상객은 없으리라. ‘정승네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아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뜸하다’라는 옛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불쌍하고 애처로운 부부는 50대 후반에 아내 먼저, 남편이 그 뒤를 따라 죽었다. 나는 삶을, 죽음을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시89:46~48)”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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