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840호 / 광야

작성시간12.06.21|조회수9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840호 / 광야

 

  제18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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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구원받아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동시에 두려움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와 기쁨을 맛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마 이렇게 생각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이며 우리 앞의 나날은 엄청난 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바로가 죽자 사자 쫓아오고 있었지요.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고 크신 능력을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은 마른땅을 밟으며 홍해를 무사히 건너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요? 아마 십중팔구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아.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이스라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또 그 크신 위엄에 무릎꿇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복이 넘치는 땅으로 가겠지?" 하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극히 메마른 광야였습니다. 세상에 광야라니... 대체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구원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광야는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일용할 양식만 먹고 살아야 하는 곳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애굽을 그리워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요? 아마 십중팔구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아.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애굽은 많은 우상이 있는 곳입니다. 허나 광야는 텅빈 곳입니다. 이는 두 장소는 완전히 반대의 장소인 것입니다. 우상신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도 다양합니다. 불의 신, 강의 신, 바다의 신, 땅의 신, 농경 신... 등등등 자신의 복을 위해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는 우상신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이런 것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건너가야 하는 고된 여정이 되는 곳입니다.

 

   광야에는 우상이 없습니다. 광야는 자기 욕망을 부인해야 하는 힘겨운 곳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리석어 보이십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았으면서 무슨 불평, 불만을 저렇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 무지하고 얼핏보면 바보같아 보이는 이스라엘이 바로 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기적 또한 나도 겪은 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되었을때 우리는 크나 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어찌 이렇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유월절 문설주에 피를 발라 재앙을 모면했던 모습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거저 죄사함 받아 신분 자체과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홍해의 기적과 같은 모양으로 옛것에서 새것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애굽 곧 모든 욕망의 우상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간 것일까요? 오.. 아닙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곳은 광야입니다. 우리는 광야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 그 고난이 우리를 낮아지고 겸손하게 할 것이며 이런 마음은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그리워 했듯 우리도 세상 욕망을 그리워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무지하고 때론 바보같고 자꾸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우리도 세상 우상을 그리워하고 자꾸 넘어지고 일어서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벽이란 없습니다. 그저 주님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언약의 땅에 대한 소망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욕망을 부인하며 한걸음 한걸음 주님의 품으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이렇게 힘든데 누가 가려하겠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 따르는 생명의 길이 힘들지만 얼마나 평안한지 아십니까?" 애굽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마 더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상들은 죄악과 사망을 주고 결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죄악, 그리고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 것인지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다면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리의 죄악이 사함 받아 생명을 얻었다는 감격의 순간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그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나긴 광야길에서 수천번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손 붙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치 않는다면 광야의 여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수만번 넘어질 것이고 몸이 강한 사람은 수백번 넘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뭉치고 서로 독려하며 일으켜 세우면 비록 조금 늦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잘했다. 칭찬하시고 눈물로 반기며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까짓 몇 번 넘어진 상처쯤은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을 가끔씩 그리워 했다고 주님께서 책망하실까요? 전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끈질기게 일어서서 끝날 예수님의 품에 안기면 저의 옛사람은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 양들이 앞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릅기둥이 이스라엘의 나아 갈 방향이 되었듯 말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한 우리는 가는 길 마다 승리 할 것이며 결국 완전히 승리할 것입니다. 죄악은 우리를 삼키지 못할 것입니다.

 

           축복의 사람 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그대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죠. 주님 그대를 너무 기뻐하시죠. 주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고 주를 항상 찬송하는 그대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죠. 주님 그대를 너무 사랑하시죠. 그대 섬김은 아름다운 찬송 그대 헌신은 향기로운 기도 그대가 밟는 땅 어디에서라도 주님의 이름 높아질 거에요. - 낮아짐을 선물하시고 겸손함을 선물하시며 항상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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