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847호 / 가장 높은 구원의 자리에 앉았지만

작성시간12.06.22|조회수6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847호 / 가장 높은 구원의 자리에 앉았지만

 

  제1847호     

       본 메일은 님께서 카페가입시 동의 하였기에 발송되었으며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카페 내정보에서  수정해 주세요

                            클릭하시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창골산 농어촌교회 돕기 일백운동

 

 

창골산 원고보내주실곳

cgsbong@hanmail.net

 

  가장 높은 구원의 자리에 앉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걷어차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 주위에서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숟가락을 들고 아이들에게 쫓아다니면서 먹이는 데 아이들은 그것을 안 먹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예수를 믿게 되면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줄 착각하고 있다. 환경이 바뀌고 너무나 멋진 삶이 전개되는 줄로 생각하여 꿈속에서 나래를 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 동안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에 따라 애급을 탈출하게 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어 탈출하여 나온 곳은 화장실도 변변하지 않고 씻을 곳은 더 더욱 불편하며 잠자리에 익숙하지 않아 불만불평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애급에서 해방되어 출애굽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마라의 쓴 물을 비롯하여 모래바람과 온종일 뜨거운 태양으로 인한 더위와 기온이 뚝 떨어져 밤새토록 추위와 싸워야 했다. 또한 하루 삼식 세끼 먹을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뿐이었다. 이에 대한 반감을 누구든지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난 나왔지만 주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모세의 지도력에 반발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노예생활이지만 차라리 애급에서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지 왜 이곳까지 끌고 나와서 고생시키느냐? 오히려 애급생활이 나았다고 하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모세에게 대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공격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구원받게 했으면 마음껏 살다가 죽게 만들지 왜 시스템 속에 집어넣어 우리를 어렵게 만드느냐?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항변은 지금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모세와 같은 리더의 말만 들고 따라가면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뒤를 따라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모세만을 믿고 따랐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갈수록 태산, 더위와 추위, 식량과 물 부족, 염병과 질병, 놋 뱀 사건, 정탐의 불평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데모하며 반기를 들었다. 차라리 애급에 있었으면 더 잘 먹고 호의호식하며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데모를 하고 트집을 잡았다. 심지어 나중에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했다.

 

   이런 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들은 일주일이면 통과할 수 있었던 길을 40년이란 세월 속에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을 40년이란 시간을 방랑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의 높은 자리에 앉혔지만 그것이 싫다고 삐져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그 시스템에 들어가기를 싫어한 것이다. 즉 옛 사람이 죽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데 죽는 것이 무서워하며 그렇게 죽는 것이 억울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틀에다 가두어 놓으면 그때부터 몸부림을 치게 되어 있다.

 

   출애굽해서 나온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애급에서 탈출하여 광야라는 시스템 안에다 집어넣고 예배의 규범을 가르치고 성막 방식을 전하며 절기를 만들어 지키게 하는 등 예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져 가는데 완강히 뿌리친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 가운데 교회를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교회라는 틀 속에 기독교라는 틀 속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왕 같은 제사장에 앉혀 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층에다 배치해 놨어도 그 자체를 싫어하면서도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난리 브루스를 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요 6:29) 외에는 없는데도 어디 가서 보란 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악하게 생각하며 나쁘게 생각하면서 교인들이 벌어오는 헌금에 왜 눈독을 들이는지 세상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그들도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하대하지 마라.

 

   그들도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일하는 것이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아주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보다 오히려 주일날 예배당에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거룩하게 예배하는 모습이 진지하며 경건한지

성경공부를 인도해 보면 말씀에 의문이 나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트집을 잡으려고 질문을 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는 상황을 전개하면서 분위기를 흩뜨려 놓는 분이 있는 반면 성경 공부하러 오신 분 가운데 인터넷의 자료를 보고 혼자 찾아오신 여성분인데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깨달아 가면서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출애굽 한 백성의 숫자가 장정만 60만 명 어린아이, 여성, 노인들까지 포함시키면 200만 명이 넘는데 그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수가 겨우 두 명에 불과하다면 한국교회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 가상아래 이와 같은 프로테이지로 따지면 겨우 10명밖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한국교회가 교회수와 교인 수가 많음에 현혹되지 마라. 일본 목회자와 한국 목회자가 함께 밤중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같이오는데 십자가의 물결을 가리키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런데 일본 목회자는 한국교회 천만인 성도와 일본의 한 명 성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말에 한국 목회자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분이 바로 미우라 아야꼬 여사다. 우리는 그렇게 내세울 인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 분은 병중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누워있기만 하다가 천정에 있는 벽지를 보고 벽지무늬를 만들어 자신의 선교 자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필자가 성경공부 멤버 중에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사업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탁월하게 알아야 하지만 성도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공부해야 한다. 성도들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데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기도만 있어서는 안 된다. 서울이 어느 교회가 성장한 계기 중 하나가 일자리가 없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 전화기를 주면서 전화비를 교회에서 내줄 테니 무슨 일이라도 해라고 해서 그 교회가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처럼 대안이 절실하다.

 

   이제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장을 만들면서 전도를 해야 되는 상황에 와 있다. 그러면 목회자가 이런 분야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면 그들을 이끌고나갈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올바른 일을 하면서 주의 일도 병행할 수 있는지 찾아나서야 한다. 믿음으로 김치를 담는 집사. 유통업을 하는 감리교 권사, 카드를 영업하는 평신도, 인테리어를 하는 집사, 건강식품을 취급하는 권사, 통신업을 운영하는 집사 등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사업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교회를 다니지만 마지못해서 다니고 있거나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면서 진정한 교회를 찾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출애굽 했지만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앉아있기를 원하는 존재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구원의 높은 자리에 앉았지만 자기가 왜 거기에 앉았는지 거기에 앉았다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개인택시나 일반택시, 대리운전, 화물, 자 영업하는 분들을 경멸하지 마라. 달라스에서 목회하면서 달라스 경찰서에서 청소하면서 무임으로 목회하는 분을 오랜 전부터 동경해 왔던 필자는 내 자신의 일을 갖고 목회를 해왔으며 현재는 목회를 하지 않지만 지금도 사역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거기에 왜 앉아 있으며 무엇해야 되는지 모른다면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 주님 앞에서 무엇을 했다고 자랑하지 말라. 불법을 행하는 자는 주께서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하거나 가르쳐줬는데 그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존재가 불법을 행한 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들과 같이 생활하셨다. 같이 먹고 마시고 같이 울고 웃으며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같이 했다. 거룩한 척하지 않았다. 남다른 특별혜택도 받지 않으셨다. 솔선수범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순종 잘하는 자들을 찾지 않으셨다. 전혀 순종할 줄 모르는 존재를 찾아 함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 성령 안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은 것이 바로 순종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불순종의 아들들을 모아 순종의 아들로 바꾸기 까지 얼마나 무서운 사랑을 하셨는지 깨닫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ljh4183@hanmail.net 

 원본보기

창골산☆칼럼  

글에 대한 문의는 필자께 

 

 첨부이미지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