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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온 이백 서른 두 번째 편지
얼마 전 어느 부모님이 자식의 문제로 찾아 왔습니다. 부모님 중 특히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말하며 흥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 친척 형제도 없는 이 호주 땅에 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청소하며 궂은 일 마다 하지 않고 고생하면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아들 하나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살아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삐뚤어 나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바로 잡을 양으로 회초리를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더 역 효과가 나고 마침내 아들은 집을 나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수소문을 하여 아들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아들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뚝하면 집을 나가곤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치밀어 집에 잡아 온 아들에게 야단을 치며 손을 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한 번만 더 때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고 더 화가 치밀어 아들에게 손이 올라갔지만 정말 경찰에 신고할 맘으로 모발폰을 꺼내든 아들의 기세에 눌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집을 나가 지금껏 들러 오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던 어머니가 한 마디 했습니다. 애 아빠가 든 것은 회초리가 아니고 골프채였고, 아들에게 손을 댄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툭하면 때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일체 다른 것은 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공부, 공부만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 말씀에 잘 따르더니 사춘기가 오면서 아들이 삐뚤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죽 들으면서 이 아버지도 젊었을 때는 보통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젊었을 때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학생 시절부터 이야기를 하시더니 갑자기 말을 이어가지 못하셨습니다. 눈물을 한참이나 흘리시더니 아들을 보면 마치 자기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도 학생 때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툭하면 가출하고 부모님께 맞기도 수없이 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되게 하지 않으려고 아예 어려서부터 억압적으로 아들을 잡으며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피는 못 속이는가 봅니다, 그 놈이 자기를 꼭 빼 닮은 것 같습니다.”
자식의 문제는 바로 부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그러나 이 말이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그 부모님에 그 자녀’라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대체적으로 자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신은 아무 문제도 없고 오직 자식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자식의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십니다. 물론 부모의 좋은 점도 자식들이 보고 배우며 자라서 결국 자신의 부모님처럼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묵묵히 사랑하는 아들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하기는 합니다. 100세에 얻은 그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 무시무시한 명령을 받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순종하는 그의 믿음 앞에 정말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 부모님에 그 자녀’입니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이삭의 나이는 번제단에 쓰일 나무를 자신의 등 짝에 지고 갈 정도의 건장한 15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에 반해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나이는 115세를 훌쩍 넘긴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할 노년의 나이입니다. 이삭은 자신을 번제로 드릴 아버지를 힘으로도 충분히 제압하고 그 상황을 벗어 날 수 있었지만 이삭을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버지를 향하여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항변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순한 양처럼 번제단에 제물로 결박 당한 채 스스로 올라간 이삭의 믿음 또한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 부모에 그 자녀의 대단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이 아름다운 믿음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함과 비겁한 성정을 지닌 인간임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땅에 기근이 심하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 아브라함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혹시 자신이 애굽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에게 아내가 아닌 누이로 행세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물론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습니다. 자신만이 살겠다고 하나님이 맺어준 고귀한 아내의 자리를 잠시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아브라함은 아주 치사하고 비열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 흉년이 심하게 들자 아버지처럼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그랄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도 아버지처럼 자신의 아내인 리브가의 미모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까 봐 겁이 났습니다. 결국 아버지처럼 이삭도 자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물론 리브가는 이삭의 이복 누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비열함이 아들 이삭에게서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의 문제로 많은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처럼 나의 자녀들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로부터 온 것이 아닌지 부모 자신들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부모에 그 자식’이 맞다 고 생각된다면 ‘그 부모님에 그 자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모의 행위는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기질과 성격까지도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정말 자녀들의 미래를 염려한다면 먼저 나 자신의 믿음과 기질과 성품과 행위까지도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 집은 ‘그 부모에 그 자식’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님에 그 자녀’입니까?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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