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만나기
하나님 만나기1: 외로움을 체험하라
나는 외로움이 우리를 주님께 주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한테 자동차를 빌린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중에 보니 라디오는 고장이 났고 CD 플레이어만 작동이 됩니다. 당연히 친구가 모아둔 CD를 하나하나 뒤적거리면서 들을 만한 노래(그냥 트로트라고 해둡시다)가 있는지 찾아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자기 취향(클래식 음악이라고 해두죠)의 CD만 잔뜩 꽂아놓았습니다.
갈 길은 멀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금방 지쳐버렸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CD에 손을 댑니다. 좋아하기로 치자면 스틸 기타 쪽이지만 높이 뽑아올리는 테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선은 그저 들어줄 만한 수준입니다. 적어도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참 듣노라니 점점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팀파니가 쏟아내는 리듬에 맞춰 심장이 뛰고 첼로 소리를 따라 고개를 흔듭니다. 얼마 뒤에는 이탈리아어로 된 아리아 소품을 따라 흥얼거리기까지 합니다. '어라, 이것도 괜찮은데!'
이제 한 가지 묻겠습니다. 클래식 음악도 듣기 좋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게 됐습니까?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달리 들을 음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침묵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순간, 평생 들어본 일이 없었던 노래를 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하시는지 아십니까?
-맥스 루케이도,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에서
하나님 만나기2: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라
캘리포니아의 산 이시드로의 한 간이음식점에서 피살된 스물한 명의 가족과 하나가 되어 몸부림칠 때, 전쟁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의 가족들과 함께 괴로워할 때,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손과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린 배와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낄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지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천부적인 가난함, 곧 우리가 진흙과 하나님의 입맞춤으로 창조되었음과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감을 깨달을 때, 남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 위해 쓰고 있는 명예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권력 따위의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게 된다(나 자신 얼마나 자주 이런 목적으로 성직자 옷을 입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복종을 강요했는지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영혼의 가난은 거짓과 허위를 부수며 얄팍한 영적 우월감과 유력한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할 필요성을 헤어나게 해준다.
가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하찮은 노력으로는 영적인 삶의 그 어떤 성장이나 진보도 추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하심에서 비롯한다. 심지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가 주님이신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생명은 거저 주시는 덤이다. 우리는 참된 겸손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에 마주 서 있다. 우리 내면 저 깊은 곳의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브레넌 매닝, '사자와 어린양'에서
하나님 만나기3: 감정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우리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의지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것이나 주의 것으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셨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의 여름 별장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되고 드려진 의지의 중심 성채에서 살도록 하자.
주님의 식탁에 있으면 영혼들은 때때로 거룩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 조수는 높고 떠들썩한 기쁨의 여울은 수문을 크게 두드려 넘어뜨릴 것처럼 하고,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기쁨에 넘치는 찬양의 합창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면 삶은 때묻은 회계 사무실, 더러운 상점, 소음 이는 공장, 불경건한 작업장을 대면해야만 한다. 주님과 겸손히 동행함으로 체험하는 오늘의 어려움과 어제의 기쁨을 비교해볼 때, 그것이 정말 어제와 같이 헌신된 삶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 우리의 의지가 한치도 변함없이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음을 알고 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나의 하나님, 감정의 홍수는 여름의 시냇물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의지는 주님의 발치에서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단 둘이 있었던 축복된 순간과 마찬가지로 오직 주님께만 헌신하고 충성하며 주님만을 바라고 있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다. 이와 같이 할 때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프레드릭 마이어, '주님의 오묘한 인도'에서
하나님 만나기4: 하나님을 집으로 삼으라
우리 집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우리는 침실이 어디 있는지 주방이 어느 쪽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힘겨운 이 세상에서 온종일 애를 쓰며 살고 난 뒤에는, 우리는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집을 절실하게 그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분이 되실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영양분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보호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 피해야 할지, 인도를 받기 위해 어디에서 돌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집이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듯이, 하나님의 집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곳이다. 하나님의 집은 누구에게도 침범당한 적이 없고, 벽에는 금이 간 적이 결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지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주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주말 별장이나 휴일에 잠깐 들를 방갈로나 여름 휴가를 보낼 오두막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번쯤 들르는 호텔이나 노년에 이용할 양로원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지붕 아래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실제 거주지가 되길 원하신다. 그분은 신용 조회 때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 우리가 실제로 소유한 주택이 되길 원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의 집이 되길 원하신다. 그분의 아들이 말씀하시는 약속을 들어보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
-맥스 루케이도, '내 영혼을 위한 맞춤공간'에서
하나님 만나기5: 하나님과 동역하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면 상승작용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같이 일할 때 나타나는 기하급수적인 힘의 증가는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이다. 버지니아 해변에 위치한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러스티 스티븐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열나게 잔디 깎는 기계를 밀면서 우리 집 마당을 돌고 있었지만, 과연 이 작업을 저녁 먹을 시간까지 끝낼 수 있을까 의심이 생겼다. 우리의 여섯 살 난 아이 마이키가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묻지도 않고 내 앞에 떡 서서는 잔디 깎는 기계에 손을 얹었다. 내 아들이 나를 돕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기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내 아들이 기계를 받자마자 기계는 털털대며 거의 멈추기 일보 직전으로 들어갔다. 그가 헤매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는 킬킬대고 웃고 있었지만 차마 '야, 내가 할게. 저리 가라, 애가 뭘 하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우리 아들 착하지, 아빠가 도와줄게' 하면서 뒤에서 같이 밀기 시작하였다. 나는 앞에서 미는 아들과 부닥치지 않으려고 허리를 꾸부정하게 하고 몸을 앞으로 불쑥 내밀고는 두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잔디를 깎았다. 우리는 계속 잔디를 깎았지만 내가 혼자 하는 것보다 속도가 나질 않았다. 마이키가 '나를 도와주신' 관계로 잔디 깎기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아!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하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도와드리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같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잃은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아버지, 그리고 내 연약한 손이 그 위대한 일을 돕고 있는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하나님 아버지는 은혜를 베푸사 허리를 굽히시고 내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손잡이를 꽉 잡고 밀어라! 하나님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늘 아버지는 우리와 동역하는 것을 즐기신다. 우리는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우리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신다.
-더치 쉬츠, '파수꾼 기도'에서
하나님 만나기6: 삶의 모든 현장에서 기도하라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못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나의 성화에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모든 직장인의 바람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만남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이내 직장생활이 어려워진다. 사무실에 나가기가 싫어지고 일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 먼저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형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 에서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웠을 때 그는 기도했다. 형의 손에서 구원해달라는 아주 단순한 기도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셨고 형제가 반갑게 만나 쌓인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은 직장인의 가장 큰 바람인 만큼 그것도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조국의 재건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고 먼저 왕에게 인정을 받아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느헤미야는 왕에게 인정을 받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의 민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직장 상사들 중에는 별일도 아닌데 까다롭게 구는 이들이 있다. 보기도 싫고 함께 있기도 싫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결하는 길은 역시 기도뿐이다. 까다롭게 한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며,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그 머리에 숯불을 쌓게 된다(롬 12:20).
-방선기, '크리스천@직장'에서
하나님 만나기7: 죄 사함을 받아들이라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한 채 죄 사함을 받기에 합당해지도록 자신에게 계속 벌을 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 선택은, '나는 완벽주의를 통해 하나님이 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나 자신을 혹사시켜야 한다.
반면에 두 번째 선택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분과 닮은 존재이되, 선함과 악함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신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을 용납한다. 내가 하나님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인간이면 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1,3).
나는 여기에서 그가 말한 환난이 우리가 현실에 직면할 때 마주치는 끔찍한 불안과 공포를 포함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무서움을 맞서서 뚫고 지나갈 때, 그것을 넘어선 반대편 끝에 숨어 있는 찬란한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희망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고 말한 대로,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완전함과 결함을 지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그분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시고 인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인정받고 용납받고자 애를 쓰는 인간적인 성향에 대해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데이빗 스툽, '완벽주의로부터의 해방'에서
하나님 만나기8: 은혜의 법으로 세상을 품으라
기독교는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과 관련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덕법에 대한 기독교 교리다. 전쟁과 사악함을 인간의 도덕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모두 실패했고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다 그러하듯, 법은 인간과 죄성을 공유한다. 칼빈의 말처럼 법률도 '죄의 성질에 속한 것'이다.
어떤 법이 절대적 가치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정죄와 재앙의 씨앗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악의 힘을 막아줄 울타리로만 기능해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은 은혜에 속한 영역이다. 예를 들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평화와 의를 이룰 수 없다. 법은 언제나 금지의 역할을 할 뿐이며 인간의 내적 모순에 의해 이미 타락한 것이다.
법은 판단의 범주에 속한다. 세상의 도덕법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지적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법은 바알세불을 완전히 쫓아낼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인간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시킬 수 없다. 진정한 법은 오직 하나, 바로 우주의 법이다. 우주의 법은 심판이나 은혜의 방식으로 실행된다. 만일 인간이 심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은혜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도로시 세이어즈, 리처드 포스터의 '영성고전산책'에서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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