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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봄, 가을에 학년에 맞는 거리에 있는 주변의 산으로 소풍을 갔다. 나는 산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주변에는 산외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이 많다. 지금은 도시 사람들이 둘레길, 올레길 하며 주말이나 휴일이면 친목과 건강을 위하여 찾는 곳이 되었다. 1학년 때에는 산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학교에서 3km 정도 떨어진 언덕으로 소풍을 갔다. 그 때는 그것도 높은 산인 줄 알았다. 지금 가끔 그 마을을 지날 때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그리운 회상에 젖는다.
학년이 오를수록 점점 더 먼 곳에 있는 산으로 소풍을 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아련하게 그 곳이 기억이 난다. 동곡 마을 앞산, 지금실 마을 뒷산, 신배 마을 뒷산, 그러다가 4~5학년쯤에는 상두산, 옥정호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이름도 잊은 산 등으로 갔다. 6학년 때에는 쌀을 한 되씩 싸들고 1박 2일로 금산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멀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노라면 발바닥이 아픈 느낌이 든다. 그 당시 선생님들이 무슨 생각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그 먼 거리를 걷게 했을까 싶다. 아마도 극기 훈련 차원이었던 듯싶다.
아무튼, 걸어도걸어도 목적지가 쉬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하루 종일 걸어서 금산사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되었다. 가지고 간 쌀을 독에 부으니 절에서 저녁밥을 해줬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오락이고 뭐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절 구경을 하고 나서 다시 절 밥을 먹고 절에서 싸준 도시락을 들고 부르튼 발의 물집이 터져 절룩거리며 집으로 걸어왔다.
그 시절에 소풍을 가면 아이들이 으레 학수고대하는 것이 바로 보물찾기였다. 그 시절에는 아주 작은 상품조차도 좋았다. 요즘 아이들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요로운지라 교회에서 주는 선물이나 간식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 받고 뒷걸음치는 아이들이 많다. 그 시절의 보물찾기 상품은 주로 학용품이었다. 지우개, 자, 칼, 연필, 공책, 필통 따위. 소풍 가기 전부터 아이들은 이번에는 어떤 상품이 걸린 보물을 찾게 될까, 기대를 부풀리며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어떤 아이들은 미리 점을 치기도 했다. 어떤 상품을 타게 될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 상품을 걸고. 별 게 다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6년 동안 딱히 보물찾기로 상품을 탄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무엇을 찾는 일에 서툴렀다. 이유가 뭘까?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금도 어느 체육대회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경품을 타 본 적이 거의 없다. 보물을 찾는 데에도 노하우가 있나, 싶다. 그렇다고 노하우를 배우려고 하진 않았다. 그러니 소풍 때마다 그다지 재미도 없었던듯하다. 가끔 보물을 두 개 찾은 애가 하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찾은 보물이 아니어서인지 별로 기분이 즐겁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는 하도 내가 보물을 못 찾으니까 선생님이 살짝 나에게 보물 있는 곳을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찾은 보물, 나에겐 그것이 진짜 보물로 생각되었다.
가끔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족하곤 한다. “넌 이미 가장 귀한 보물을 찾아 가지지 않았니? 더 이상의 다른 보물에는 관심을 꺼라.”그렇다. 내가 찾은 가장 귀한 보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성경은 보물찾기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 지구상에서 베스트셀러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지역을 망라하여 읽는 책이다. 그러나 성경에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처음이자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의 일관된 구속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구속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이 발견하도록 곳곳에 감추어두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철학교수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서양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유독 기독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교수의 강의를 듣는 C.C.C.(기독교대학생선교회)에 소속된 학생들은 그에게 전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를 전도하려고 시도하다가 그에게 찍혀 F학점을 맞고 군에 입대한 남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어느 해에 근로 장학생이어서 교수님의 연구실을 청소해야 했다. 마침 그 교수님의 연구실을 청소하는 날이었다. 그 분도 개인적으로 뵈니 강의실에서와는 달리 상당히 따뜻한 면이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분의 책꽂이에 성경책이 꽂혀 있었다. 나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말했다. “교수님, 여기 성경책이 꽂혀 있네요. 성경책은 읽어 보셨어요?”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했다. 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야, 뭐, 저어, 읽긴 읽었지.” “아니요, 대충 읽는 것 말고요. 정말 한 번 잘 읽어보세요. 그러면 교수님도 기독교를 지금과는 다르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한 번 읽어보도록 하지.” “교수님, 꼭요. 꼭 잘 읽어보세요, 네?”
그 순간 교수님의 낯빛이 발개졌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분이 성경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성경을 제대로 잘 읽으면 그 속에 하나님께서 꼭꼭 숨겨 놓으신 보물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성경은 지성인이라면 반드시 필독해야 하는 책이라고. 물론 지성인이 아니어도 읽어야 되고. 대학시절에 교수들이, 선배들이 이런 말을 했다. 지성인의 책꽂이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하는 책은 성경책이라고. 그러나 성경책을 소지하는 것, 혹은 성경책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보화를 발견해야 한다.
교사 초보 시절에 어느 과학 교사는 교무실에서 시간이 나면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성경 중에서 잠언이 좋아서 읽는다고 했다. 왜 잠언이 그렇게 좋으냐고 했더니 그가 말하길, “잠언에는 인생의 바른 지침이 되는 좋은 글귀들이 많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인생의 바른 지침이 되는 좋은 글귀라면 여타 다른 모든 종교에도 공통적으로 다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귀한 보물이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랍니다. 성경에서 그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저 한 권의 좋은 책을 읽은 것에 불과하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관한 비유가 있다.“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4~46)”
천국은 보물, 보화, 또는 진주와 같은데 그와 같은 보물, 보화, 진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속에 감추어진, 인간이 반드시 찾아 가져야할 보물, 보화, 진주이다. 이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다.“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특별히 굉장한 사람 같아 보이는 사람이나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백짓장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사람은 질그릇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도 한 순간에 깨져버리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그 속에 보배, 즉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녔다는 것이다.고등학교 때 영어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가끔 유머 공간에서 써먹는 것을 보았다. 나도 이쯤에서 한 번 써먹어 보고 싶다.
어느 시골 마을에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옛날 물건을 수집하러 다니는 장사꾼이 찾아갔다. 그 농부의 안마당을 기웃거리던 옛날 물건 수집가의 눈에 멋진 게 띄었다. 아주 값나가는 오래된 골동품 그릇이었다. 골동품 감정 전문가인 그의 눈에 꽤나 값이 비싸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무식한 농부는 그것을 고양이 밥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얼씨구, 저걸 내 손에 넣어야겠는데. 아무리 무식한 농부라지만 먼저 그 그릇에 관심을 보이면 자기의 속마음을 들킬 염려가 있으니 그는 그걸 감추고 농부에게 접근하여 고양이를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 고양이 값을 두둑하게 쳐주었다.
농부는 흔쾌히 고양이를 그에게 팔았다. 고양이를 안고 가다가 무심한 척 뒤돌아 와서 그 장사꾼이 농부에게 말했다.“여보시오, 시골 양반, 생각해보니 고양이 밥그릇이 필요해서 그러는데요. 내가 고양이 밥그릇으로 쓰게 저거 가져가도 될까요?”“예끼, 여보쇼, 내가 저것 때문에 오늘도 고양이를 열 마리나 팔았다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정작 중요한 것은 제쳐두고 변두리, 주변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더러 있다. 현대 조국교회에 소속된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보화도 아닌 것들을 부여잡고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허다하여 마음이 착잡할 때가 많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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